서울답사 5

굴 속의 시간 2010. 3. 15. 22:54

사직단

사직단에서는 정문을 눈여겨 보라고 했다. 초익공 양식인데 출목을 가진유일한 건물이라고. 사직단, 사직단, 사직단이라… 사직공원이니 사직도서관 하는 이름들이야 귀에 오래 익었지만, 여기도 제대로 한 번 가 본 기억이 없다. 이것 참, 나는 정말 서울이라는 곳을 모르는구나. 창경궁에서 만난 분까지 하여 일행이 셋이 되어 택시를 타고 사직동으로 움직였다. 가는 길을 보니 경복궁에서 창경궁으로 나오던 길을 거꾸로 타고 경복궁을 지나쳐 조금 더 가면 되는 곳이다. 그러고보면 숱하게도 지나쳤을 곳이다. 하지만 여태 모르고만 있던 것. 택시는 바로 사직단 정문 앞에 내려주었다. 보자마자 아, 이건가 보다… 그러나 정말 무방비 상태로 방치되어 있다시피 해. 오, 안쓰럽고 안쓰러워라.

그 건너편으로 이런 표지판 하나가 있는 정도였다. (표지판에 반사된 길목수 다시 등장 ^ ^)

전면 세 칸에 측면 두 칸의 맞배지붕 건물. 홑처마로 되어 있고, 익공 양식의 문 건물이다. 사진에서는 보이지 않지만 문선 위에는 홍살을 달았고, 간포의 자리에는 화반 같은 것 없이 소로만으로 소박하게 처리되어 있다.


이 건물에서 중요한 구조와 양식의 특징이라면 유일한 초익공 이출목이라는 점. 그러니 고개를 쳐들고 익공 부분을 유심히 보았다.

그렇다면 잠깐 익공에 대해 공부했던 것을복습.익공이 하나 있는(초익공 혹은 일익공) 건물에서는 출목이 없는 것이 대부분이다. 아니, 이 건물 빼고 모두 그렇다 할 수 있다. 대표 건물들로 익공 양식의 흐름을 보면 아주 초기의 건물 해인사 장경판전(1488)의 익공은 그냥 보아지를 초각한 형태와 크게 다르지 않은 모습이었다. 이 때까지만 해도 창방은 수장폭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는데강릉 해운정(1530)에서 보이는 초익공 양식에서는 창방이 다포에서처럼 굉장이굵어진다. 또한 강릉 해운정이 지어진 것과 비슷한 시기, 같은 지역인 강릉 오죽헌(1536)에서는 익공을 둘 겹쳐서 쓴 이익공방식을 썼다. 말했듯 이익공은 익공을 둘 겹쳐 쓴 거라 할 수 있겠는데, 이렇게 되면 익공 위에 놓이는 주두 또한 둘을 쓰게 되는 것이다. 초익공 위에 놓이는 주두를 대주두,이익공 위에 놓이는 주두를 재주두라 하면서 말이다. 이 때까지 건물들을 보면보가 초익공 위의 주두이거나 이익공 위의 재주두 위로 걸쳐지면서 바로 주심도리를 받게 되곤 하는데, 청평사 회전문(1557)에 가서는익공 위에 주두, 주두 위에보가 놓이는 것은 같지만 보 위에 바로 주심도리가 올라가지 않고 받침목 하나를 두고 올라간다. 하지만 그받침목이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이야 높이 차를해결해주기 위한 것일 뿐 어떤하나의양식이라 할 건 없을 것이다. 청평사 회전문은 초익공으로 여기에서는 보머리에도 초각이 잘 되어 있음을 볼 수 있다. 이 정도가출목 없이 짜여지는 익공 양식들일 텐데, 여기에서 한 가지더 눈에 띄게 되는 것은익공계열에서는 이익공이 되더라도 초익공과 이익공 사이에 첨차간 이격이 없이 딱 붙게 된다. 이것은 다포에서도 마찬가지, 첨차간 이격이 있는 것은 주심포에서만 볼 수 있다 할수 있겠다.

이렇게 익공 양식이 진화를 해오면서 17세기에 들어서는 출목이 있는 익공 양식이 되게 된다. 종묘 정전(1608)에서 확인한 이익공 일출목 양식이 대표적인데, 마치 초익공이 주심포의 헛첨차 역할을 하고, 그 위로 이익공이 한 번 더 나가면서 출목을 낼 수 있게 해준다는 것이다. 어! 그런데 특이하게도 바로 이 사직단 정문(조선중기 건물, 1720 중건)에서는 초익공 양식이면서 초익공에서 바로 출목을 내고 있다는 것이다. 창덕궁 주합루(1777)창경궁 통명전(1834), 경복궁 경회루(1867) 같은 건물들은 거꾸로 이익공인데도 출목이 없는 이익공 무출목 양식을 보여준다는 것도 특이할만한 점이다. 지금 말한 이익공 무출목 건물들은 다들 조선 중후기 건물들이면서 궁궐 건물이라는 거라는 것 또한 눈에 띈다.

강의 시간 교수님은 사직단 정문의 수리보고서 같은 것은 한 번쯤 읽어두면 좋을 거라 했다. 문화재연구소 홈페이지에 가면 있더라고 메모를 해두기는 했는데, 홈페이지에 들어가도 도통 못찾겠다 꾀꼬리, 꾀꼬리꾀꼬리…. 어구야, 누구에게 부탁을 해보거나 해야겠다. ㅠㅠ

*어느 블로그에 가보니 익공 계열 건물에 대해 나름 정리를 해둔 것이 있어 고마운 마음으로 퍼왔다.

익공(翼工) 방식



목조건축양식인 공포(栱包)의 일종으로, 공포의 구조형식인 주심포(柱心包)·다포(多包)·계의 세 가지 형식 중 구조적으로 가장 간결하게 꾸며진 형식이다.

이와 같이 간편한 공포구조로서 거대한 건물도 능히 결구(結構)할 수 있는 익공형식은, 조선시대의 배불숭유사상으로 지나치게 화려하고 경비를 많이 들이는 것을 삼가는 경향과도 관련이 있을 것으로 생각되며, 한편 전부터 주심포계의 공포구조형식이 간결하게 변형되다가 결국 익공계 구조형식을 따르게 되는 두 가지의 발생단계를 생각할 수 있다.

그러므로 전술한 궁궐건물 외에도 성곽건물과 서원·향교건물, 사찰의 부속건물에 익공형식이 많이 쓰였음을 볼 수 있다.

이 형식에는 기둥 상부 주두(柱枓) 밑에 돌출한 익공재를 놓고 그 위에서 직접 보〔梁〕의 머리가 얹히도록 한 1익공 형식과, 익공재 2개를 두어 그 위에 보가 얹히도록 한 2익공 형식이 있다. 2익공 형식에는 주심(柱心) 외부에 출목 하나를 두어 외목도리(外目道里)를 받치는 1출목 2익공과 출목을 두지 않는 무출목 2익공 형식이 있다.

익공계의 전형적 특징을 종합한다면 다음과 같다.


① 조선시대부터 사용된 간단한 공포구조형식의 건물로 가구가 간단하다.

② 보통 궁궐·사찰 등의 부속건물과 사묘·누정 등의 건축에 많이 사용된 형식이다.

③ 기둥은 배흘림이 거의 없는 각주 (角柱)와 원주 다같이 사용되며, 기둥 윗부분에서 창방과 직교되게 짜여진다.

④ 보통 1익공과 2익공 형식이 있고, 2익공 형식일 때 출목이 있는 것과 없는 것이 있으며, 2익공은 주간에 화반을 두는 경우가 많다.

⑤ 익공쇠서는 보통 상면이 수평으로 가공되어 끝이 뾰족하고 건물 내부 쪽으로는 보 밑에 양봉을 이루고 있다.

⑥ 보의 뺄목은 보의 폭 그대로 돌출하여 삼분두 또는 직절되어 계자눈을 돌리는 경우가 많다.

이와 같은 전형적인 것 외에도 익공형식은 부분적으로 변형된 형식이 많아 시대와 기능에 따라 발전되었다.



익공형식이 언제부터 사용되었는지 확실하지 않으나 익공이라는 용어는 1796년(정조 20) 집필된 ≪화성성역의궤 華城城役儀軌≫에 쓰여 있으며, 그 이전에도 영조 때 기록된 ≪종묘개수도감의궤 宗廟改修都監儀軌≫에 ‘입공(立工)’이라 한 것이 있는데 이것은 익공형식을 표현한 듯하다.

문헌에는 구조적인 설명이 없지만 일부 표현된 그림이나 실제 세워진 건물로 보아 다음과 같은 특징을 나타낸다.

첫째, 기둥 상부에서 창방과 같이 十자로 짜여지나 창방 윗면의 높이보다 익공재 높이를 더 높여 여기에 주두가 안치되게 주두자리를 파고 주두를 얹었으므로, 익공재의 위치로 보아 결국 헛첨차와 같은 형식을 나타낸다.

둘째, 익공재 위에 보머리를 직접 닿게 얹되 주두 상부가 보 밑에 묻히도록 조립하고, 보머리는 보의 폭 그대로 주심 밖으로 빠져 삼분두(三分頭) 또는 운형(雲形)으로 끝마무리를 한다.

셋째, 2익공일 때에는 재주두(再柱頭)라는 특수한 크기의 주두를 사용한다. 넷째, 익공재의 건물 내부 쪽은 반드시 보를 받치는 보아지[樑奉]을 형성하고 있다.

≪화성성역의궤≫나 ≪궁궐영건의궤 宮闕營建儀軌≫를 통해서 표현되는 익공의 구조형식을 전형적인 형식이라 말할 수 있는데, 이들의 실례는 경복궁·창덕궁·창경궁·덕수궁 등 궁궐 안의 누정(樓亭)이나 행각(行閣) 및 부속가와, 종묘(宗廟)의 정전(正殿)과 영녕전(永寧殿), 능의 정자각(丁字閣) 등 사묘건물을 들 수 있다.

이 가운데 대표적인 것은 종묘정전과 경복궁의 경회루(慶會樓)이다.

정전은 2익공 형식인데 기둥 상부에서 창방과 제1익공재를 직교되게 가설하고, 익공재 윗면을 파서 주두가 물리도록 올려놓고 그 위에 제2익공재를 올려놓되 외부로 출목을 두어 첨차를 소로로 받치게 하였으며, 이 윗면에서는 재주두와 퇴보를 얹고 이 퇴보머리에서 외목도리를 받치도록 되었다.

익공쇠서의 끝은 뾰족하여 마치 새부리 모양을 하고 그 윗면은 거의 수평을 이루도록 다듬었다. 또 건물 내부에서는 쌍S자형이 변형된 화두자를 가지는 당초문의 양봉을 꾸미고, 외목도리 밑에는 위에서부터 장여와 첨차가 놓이고 그 밑에 소로를 2개의 익공쇠서 사이에 끼워 받치게 하였다. 퇴보머리는 삼분두를 조각하여 제2익공재 상면에 내려앉혔다.

경회루는 2익공 형식을 취하고 있는데 출목이나 첨차 없이 제1익공은 주두 밑에 짜고, 제2익공은 재주두 밑에 짜고, 제2익공 위에서 보를 얹고 그 위에 처마도리를 받치도록 하였다.

이와 같은 특성을 보이는 형식을 전형적인 것으로 볼 수 있는데, 주심포계 형식과 익공계 형식의 한계를 정하기는 어려움이 있어 학자들간에 이견이 있을 수 있다.

실제 익공계를 사용하였던 가장 오래된 유구는 강릉 오죽헌(烏竹軒, 1536)과 해운정(海雲亭, 1530) 등 조선 초기의 것으로서, 오죽헌은 2익공 형식이고 해운정은 1익공 형식이다.

오죽헌은 기둥 윗부분에 창방을 양측에 걸어 이 창방과 같은 높이에서 직각으로 제1익공 쇠서를 돌출시키고, 이 위에 주두를 놓되 익공 윗면을 약간 파고 물리게 하여 여기서 첨차와 제2익공을 十자로 짜놓았다.

제2익공 위에는 재주두를 놓고 그 위에서 보와 장여 등을 맞추었는데, 보머리는 주심에서 원래의 폭대로 빠져 그 끝이 직각으로 절단되었다.

익공쇠서에는 화두자(華頭子)가 잘 나타나고, 1익공에는 상하면에 굴곡이 있는 조각을 두어 주심포계의 것과 비슷한 점이 있다.

익공의 내부는 보 밑에서 보를 받는 보아지를 형성하고, 첨차 일부는 교두형(翹頭形 : 활이나 원호 모양으로 깎아낸 모양)으로 하고 일부는 당초나 초화지(草花枝) 문양을 나타내며, 주간(柱間)에는 화반을 놓았다.

해운정은 네모기둥 위에 초익공을 짜 주두를 놓고 그 위에 보머리를 얹었다. 여기서도 익공 내부는 당초문의 양봉(樑奉)을 만들고, 익공쇠서는 상하면에 굴곡 있는 조각을 두었다.

특히, 귀포에서는 도리와 장여 뺄목 밑에 소로를 받치고 있어 익공계의 구조에서 흔하지 않은 특징을 보이기도 한다. 또 주간의 창방과 도리 사이에 청판을 막고 판소로〔板小累〕를 배열하고 있으며, 화반(花盤)은 두지 않았다.

경상북도 안동에 있는 봉정사화엄강당(鳳停寺華嚴講堂, 보물 제448호)의 예를 들면, 그 짜이는 수법이 2익공의 형식을 따라 주두 밑에서 제1익공형을 놓았고, 또 주두 위에서 제2익공형을 놓았다.

외부로는 제2익공에서 직교되는 출목첨차(出目檐遮)를 두어 외목장여와 도리를 받치고 있으며, 밖으로 뻗어나온 익공쇠서의 부리는 길고 뾰족하게 뻗어 익공계의 전형적인 모양을 이룬다.

이들은 내부에서는 상하 맞닿아 부재가 당초문의 양봉을 만들고, 외부에서는 부재가 서로 떨어져 첨차 밑에 소로를 끼워 받치며, 보의 뺄목이 주심에서부터 밖으로 수장재의 폭처럼 좁아져 쇠서 모양의 끝을 내밀고 있다.

그러므로 이 건물형식은 주심포의 성격을 띠고 있다.

이렇게 주심포계의 형식을 취하면서 익공으로 발전되는 양식이 많이 있는데, 예를 들어 안동 개목사원통전(開目寺圓通殿, 보물 제242호)의 정면포작을 비롯하여 전라남도 송광사하사당(松廣寺下舍堂, 보물 제263호), 강원도 청평사회전문(淸平寺回轉門, 보물 제164호) 등은 과도기적인 형식으로 주심포계로 분류되는 경우가 많다.

흐앙, 이 사진은 왜 찍었는지 도무지 기억이 안 나. 분명히 무언가 아하, 저렇구나 싶어 찍긴 찍었을 텐데, 어이구 이 밥통 같으니라구!

측면 모습이다. 외출목들 빼고 도리가 다섯 개인 오량 맞배 건물의 얌전한 모습. 중앙 기둥이 종보까지 올라가고 맞보 형식으로 되어 있다. 박공 한 쪽에도 판재 하나로 쓰이지 않았고 몇 개를 맞대어 썼다. 양쪽 박공 사이는 지네철 이음방식,중인방 아래는 화방벽.

문 뒤로 사직 제단이 있는 사직사 터가 보인다. 사극 같은 걸 보면 신하들이 왕에게 말할 때 종묘와 사직을 받들어 어쩌구저쩌구 하는 그 종묘와 사직을잇달아보고있는 것이다.'좌묘우사'의 원칙에 맞게 경복궁의양 옆으로 종묘와사직이 배치되어 있는 것.종묘는아다시피 선대 왕들의 신위를 모신 곳이고, 사직은 사(땅)과 직(곡식)의 신에게 제를 올리는 곳. 이들 모두 정도전이 한양을만들 때부터 아주 계획적으로 배치, 조성한 것이다. (그러나 고려 때는도성을 만든 뒤 한참 뒤에 태묘(조선으로 치면 종묘)를 만들었기에 도성 바깥에 있다.)


사직단 안으로 들어가 볼 수는 없었다. 그저 동문 바깥에서 돌을 밟고 올라가 안을 들여다볼 뿐. 동서남북으로 있는 문에는 모두 홍살문이 있고, 제단으로 진입하는 길목들에도 홍살문이 세워져 있다. 그리고 땅신의 제단과 곡식신의 제단이 나란히.

서울문화재 홈페이지에서 서울 사직단 정문서울사직단에 대한 동영상들을 볼 수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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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냉이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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