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리산 펜션

굴 속의 시간 2010. 3. 15. 09:05

속리산 펜션

맞춰놓은 시간에 일어나니 비가 온다. 오지 말아라, 오지마라 했는데 주룩주룩 내린다. 어제 강의를 마칠 때까지만 해도 하늘은 잔뜩 먹물을 머금고 있기만 했는데, 이리 내려오는 길 위에 들자마자 죽죽 퍼붓기 시작했다. 으아, 이거 하필이면…. 지난 주 서울답사를 함께 한 한 강의실의 길목수 형님과 함께 보은으로 내려왔다. 이번에는 법주사.법주사에는 우리가 수업시간에 다룬 목조건축문화재만 셋, 그것도 어느 것 하나 예사로 지난 것이 없다. 모두 복잡한 특징을 가지고 있으면서 또한 전형과 이형을 함께 지니고 있는 중요 문화재들. 게다가 사천왕석등과 쌍사자석등까지. 개별 사찰로 이렇게나 봐야 할 것이 많은 곳이 또 있을까 싶다.

여기 법주사에는 중학교 때 한 번 와 봤을까? 수학여행도 아니고 극기훈련이라는 이름으로 이박삼일 다녀갔던 곳. 아하, 그 전에 초등학교 때도 5학년 때 담임 선생님이랑 온 적이 있다. 선생님 고향이 청주였는데, 여름방학을 맞아 우리 반 친한 아이들 다섯을 데리고 삼박사일이나 고향집에 데리고 간 일이 있다. 그 때는 그게 좋은 줄도 몰랐네. 참 좋았던 선생님. 아, 내게도 그리 좋은 선생님이 있었구나.어젯밤 보은에 닿은 것은 밤 아홉 시쯤, 생각보다 법주사 앞은 그리 화려하진 않다. 지난 번 가본 수덕사 같은 곳만 해도 그 앞은 으리으리한 숙박시설에 관광객을 꼬이는 상점들이 커다란 단지처럼 있었는데, 여기는 그래도 오래된 단층 건물들이 잔잔하게 이어져 있다. 심지어는, 어. 이거 어디 하룻밤 묵을만한 데가 없는 거 아닌가… 잠깐 걱정을 할 정도로 말이다. 물론 이 낡고 오래된 단층 건물들에는 촌스런 간판의 나이트니 노래방 같은 것들이 뭐 이래 많나 싶기도 하지만 말이다.

몇 군데 값을 물어 삼만 원만 내라는 펜션에 들었다. 역시 낡고 오래된 민박이지만 방이 널찍해 좋았다.밥집을 찾아 고픈 배를 채웠고, 슈퍼에 들러 옥수수수염차 조그만 것 두 개와 포테토칩, 오감자 한 봉지씩을 사 담아 숙소로 들어왔다. 오! 이런 곳에 와서 여관방에 들면서도 슈퍼에 들러 산 것이 술보따리가 아니라 옥수수수염차에 포테토칩이라니…. 푸하, 이건 정말 놀랄 노자가 아닐 수 없다. 전처럼 술을 안 먹고 지낸 것이 벌써 두어 달 째 되어오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아예 입에도 대지 않고 지낸 건 아니었다. 혼자 밥 차려먹다가 한 잔 홀짝, 잠들기 전에 한 잔 홀짝. 그래, 그것도 안 먹고 지낸 거나 다름없지 뭐. 그동안에는 언제나 사흘에 한 번은 흠뻑 젖어 질퍽거렸고, 걸판진 자리를 찾아 죽자고 마시곤 했을 테니 말이다.^ ^암튼 이렇게 술을 멀리해 지내고 있던 차에 약이라는 것까지 먹게 되었다. 그 전에야 엄마가 약 몇 재만 달여 먹어라 하면술을 안 먹을 수 없는데 무슨 약이냐고, 아마 나는 평생 약이라는 거 못 먹을 거 같다고 요리 빼고 조리 빼고 하기만 했는데, 이참에 그것까지 할 수 있겠다 싶은 것이다. 아마 일정기간 술을 안 먹고 지내기로는 평생 두 번 다시 오지 않겠나 싶기도 했고 말이다. ^ ^ 그래, 약까지 지어 먹게 되었으니 이젠 정말 한 몇 달은 술은 아주 뚝! (토요일 강의를 마치고 난지도 녀석 아픈 얘기를 들으면서도 술 한 잔을 못할 때는 에이, 확! 하는 생각이 몇 번이나 들기도 했으나, 그것도 참아. 돌아오는 길에 오늘만큼은 한 잔 할 걸… 후회스런 마음이기도 했으나 암튼 그렇다. 그날 난지도와 나는 둘이서 사이다를 소주잔에 홀짝홀짝 세 병이나 깠네.) 길목수 형님은 수술한지 얼마 안 되기도 했고, 워낙 술이 몸에 안 받는 분이라 했으니 차라리 잘 되었다. 그리하여 아직은 낯선 두 남정네가 한 여관방에 들어 술 한 병 없이 옥수수보리차로 밤을 보낸 것이다. (으아, 정말 놀라운 경험이 아닐 수 없다. ^ ^)

오늘 가볼 곳들

1. 법주사 원통보전 (1624)

수업 노트들을 뒤적이며 법주사에서 봐야할 것들을 살폈다. 우와, 정말 여기에는 우리가 공부하고 있는 전통건축의 알맹이들만 쏙쏙 모아놓은 것 같다. 원통보전을 보면 불전 가운데 특이하게도 모임집으로 되어 있다. 게다가 겹처마가 아닌 홑처마로 되어 있는데 추녀 위에는 사래가 있다. 연목들은 홑처마인데 추녀부만 겹처마 양식이라니. 수리보고서를 찾아보니 아마도 이것은 원래 겹처마이던 건물을 조선시대에 중수하면서 홑처마 양식으로 바꾸느라 이리 된 것 같다 한다. 법주사의 대부분 건물이 조선시대, 임진왜란 후에 다시 지어지면서 양식의 변화가 있었다 하는 것은 강의 시간 교수님도 몇 번이나 강조해 얘기하곤 했다. 더구나 억불정책이 강했던 조선시대에 법주사는 이례적일만큼 조선왕조의 지원을 받아 중건이 많이 되었다고…. 하여 법주사에는 궁궐에나 있을 법한 어도(임금만 다닐 수 있는 길) 같은 것도 있다 했던가. 그 지원에는 임진왜란 당시 사명대사의 승병 활약도 한 몫 했을 거라 했다. 기억하기로 이 법주사는 사명대사가 머물던 절이라고 한 것 같아. 아무튼 그러저러한 배경 속에서 법주사는 임진왜란 이후 왕실의 지원 속에서전란으로 소실된 대부분 건물을 다시 짓게 되었다 하는데, 그흔적들은 건물들마다 나타난다. 다시 원통보전으로 돌아오면 이 건물은 공포 양식에서도 특이한 혼합양식을 보이는데, 기둥 창방 위로 평방이 놓인 건물임에도 이 건물은 기둥 위에만 공포가짜올려 있는 모습이다. 기둥 위에만 공포가 있는 것은 주심포 건물의 특징, 평방이라는 받침재를 써서 공포의 하중을 고르게 받는 것은 다포양식 건물의 특징이다. 그러면서도 포짜임의 모양을 보면 일반적인 공포처럼 소첨과 대첨 짜임이 아니라 중첨이라는 부재를 하나 더 끼워 소첨, 중첨, 대첨으로 짜올린 모습이다. 이것에 대한 설명은임란이후 당시 부재의 수급 문제에서 설명을 하곤 하는데, 아무리 왕실의 후원을 받아 중수를 했다 하더라도 이미 당시 조선에는목재가 상당부족한 상황이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다른 건물들에서도 추녀를 하나로 쓰지 못하고 중간에서 잘려 덧추녀로 보완을 하거나 종보로 쓸 부재가 없어 몇 개의 나무를 겹쳐 합재로 썼다거나, 대웅보전의 귓보 같은 경우도 굵은 나무를 구할 수 없어 밑 부분을 얇은 기둥으로 썼다거나 하는 모습들이 눈에 띈다고 했다. 그러니원통보전의 공포부에 이례적으로 중첨이라는 것을 둔 까닭도 소첨, 대첨 위로 바로 긴 출목 가로재를 두기 어려우니 소첨, 중첨, 대첨으로 부재를 절약하기 위해 그러한 방식을 썼다는 것이다.원통보전이 통일신라 시대 건물인데 조선중기 이후 중건되었다는 것을 확인케 해주는 또 한 가지는 기단의 모습이다.원통보전의 기단은자연석을 쌓은 위로 장대석 밑 부분을 그랭이 떠서 덮은 것인데 이 또한 눈여겨 볼만한 부분이다. 그 밖에 원통보전의 특징이라 말할 수 있다면 이 건물은 전면 세 칸에 측면 세 칸, 정방향에 가까운 사모집, 그리 큰 건물이라 할 수 없겠는데도 내고주를 쓴 건물이다. 후열의 내고주는 자연스레 후불벽의 기둥이 되고 있다. 또한 사모집이다 보니 대량들이 놓이면서 가로재가 교차하고 있는데, 이 교차한 부분 위로 심주가 올라서 있는데, 심주 윗부분에는 꿸대가 죠차하여 서까래 뒷뿌리를 받치고 있다는 것이다. 또한 이 심주는 덧추녀의 뒷뿌리를 눌러 지붕하중과 추녀하중의 균형을 잡아주고 있다는 것. 심주와 절병통이 추녀 뒷뿌리를 눌러 추녀 하중의 균형을 맞추는 모습은 창덕궁 상량정을 보면서 한 번 정리한 바가 있다. 추녀가 처지게 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모임집에서 주로 나타나는 특징이라 했다. 아, 추녀는 상중도리 왕찌 위를 올라타고 있다 했지.

2. 법주사 팔상전 (1626)

으아, 떠올리기만 머릭가 핑핑이다. 온갖 특이하다할 구조는 다 갖추고 있는 건물. 일단 이 건물은 탑 형식의 목조건물이다. 이게 탑이여, 건물이여 싶을 정도로 탑이면서 건물인 구조물. 5층 목조탑이면서 내부공간은 예불을 올릴 수 있는 불전인 것이다. 이 건물에 나타나는 특징은 무엇이 가장 중요하다 말하기 어려울만큼 중요한 면을 몇 가지 가지고 있는데, 그 한 가지는 각 층마다 공포 양식이 다르다는 것이다. 1층은 주심포 양식이고 2층부터 4층까지는 주심포식 다포(기둥 위에만 포가 짜여진 다포), 5층은 다포 양식이다. 게다가 2층부터 4층까지의 공포들은 보머리 초각부터 살미들의 초각이 저마다 다르다. 아, 몰라몰라. 이걸 어찌 외우란 말인가! 그리고 또 한 가지의 중요한 양식적 특징은 말했다시피 이 건물은 중층건물, 그 가운데에서도 1층에서 2층, 2층에서 3층, 3층에서 4층으로 올라갈 때는 반칸물림 식으로 올라갔고, 4층에서 5층으로 올라갈 때는 적층형으로 올라갔다. (그것도 그냥 적층형이 아니라 차주조를 쓴 적층형. - 요건 조금 뒤에 다시 ^ ^;) 자, 다시 보자. 1층에서 2층으로 올라가는 반칸물림만 해도 앞서 살핀 반칸물림의 세 가지 양식인 귓보형, 귀고주형, 귀잡이보형 어느 것에도 속하지 않는 혼합형 양식이다. 그것은 바로 귓보와 귀잡이보를 동시에 쓴 반칸물림 양식. 말하자면 건물의 귓부분에서 귓보와 귀잡이보가 칸의 45'로 서로 직교하듯 교차하고 있다는 것인데, 귓보는 휜 나무를 써서 귀잡이보 밑으로 감아들며 올라온다. (아이고, 죽갔네. ^ ^ 일단 이쯤하고 넘어가자.) 1층에서 2층이 반칸물림으로 올라갔으니 2층에서 3층으로 올라갈 때는 온칸이 날라간다. 반칸을 물리고 또 반칸을 물렸으니 한 칸이 날아간다는 것. 그 다음 3층에서 4층으로 올라갈 때는 가장 평범한 양식의 귓보형 반칸물림으로 올라가고, 4층에서 5층으로 올라가는 방식이 이 건물에서 또 한 가지의 특이한 양식을 보여준다. 기둥으로 보자면 1층의 외진을 이루는 바깥 기둥은 2층으로 올라갈 때 없어지게 되고, 2층의 외진기둥은 귀잡이보 위에 세워지며 3층의 외진기둥은 그야말로 길게 뻗어올라가는 내진기둥이다. 그리고 4층의외진기둥은 3층의 귓보 위에 세우는 기둥이 되게 되는데, 그렇담 5층의 외진기둥(외진기둥이라 할 것도 없다, 5층은 한 칸 평면이니 말이다. 아무튼)은 4층까지 올라오는 내진기둥이 그대로 올라가는 게 상식적인 모습일 것이다. 왜냐하면 반칸이 줄고 반칸이 줄어 1층에서 3층으로 올라갈 때 한 칸이 날아가고, 또 반칸이 줄고 반칸이 준다면 3층에서 5층으로 올라가며 또 한 칸이 날아갈 테니 말이다. 온칸이 날아갈 때는 따로 귓기둥을 세우는 것이 아니라 그 아래아래층의 내진기둥이 그대로 길게 올라가 외진열을 이루지 않던가. 그런데 5층의 기둥은 3, 4층에 있던 내진기둥이 그대로 올라가는 것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다시 말하면 한 탑 양식의 건물에서는 그러한 기둥을 특별히 '사천주'라 하는데, 이 사천주가 그대로 올라가 5층의 기둥을 이루지 않는다는 것인데 그 부분을 눈여겨봐야 한다는 것이다. 그 까닭은 5층 꼭대기 층을 귀틀구조를 짜 단단하게 잡아주고 있는데, 그 귀틀의 모서리들이 사천주의 기둥열에서 형성하고 있고, 5층의 기둥은 오히려 사천주 기둥열보다 조금씩 바깥으로 빼놓고 다시 시작한다는 것이다. 이것을 설명하자면 먼저 5층의 귀틀구조를 설명할 수 있어야 하는데, 이 건물은 길게 솟아 있는 탑 양식을 하고 있기 때문에 자연 풍하중을 많이 받을 수가 있다. 그 말은 꼭대기가 흔들릴 수 있고, 뒤틀리기 쉬운 위험에 있다는 것이다. 그러할 때 뒤틀림을 이기기에 가장 좋은 방식은 귀틀을 짜는 것인데 5총의 벽체를 귀틀로 짜려다보니 4천주를 그대로 기둥열로 쓸 수 없게 되었다. 그러니 기둥열에서는 귀틀을 짜고 있고, 그 귀틀 바깥으로 바짝 붙여 기둥을 따로 세워준 것이니 이러한 기둥을 차주조라 한다. 우리 문화재에는 법주사 팔상전 말고 쌍봉사 대웅전이 이러한 차주조 기법을 쓰고 있는데, 법주사 팔상전과 쌍봉사 대웅전은 그 기법에서도 차이를 보인다. 법주사 팔상전은 기존 기둥열에서 상층 기둥을 조금 내어서 올렸다면, 쌍봉사 대웅전에서는 하층 기둥열보다 조금씩 들여서 상층 기둥열을 올리는 차주조 기법이니 말이다. 아무튼 이러한 방식으로 쌓는 중층 구조는 반칸물림도 아니요, 온칸물림은 더더구나 아니요, 적층구조라 할 수 있겠는데 완전한 적층도 아니고 조금씩 들이거나 내어서 쌓는 기법이라 할 수 있다.

또 한 가지, 법주사 팔상전의 특이할만한 점이라면 기단부의 모습이다. 이 건물 역시 통일신라 시대에 지어진 건물이 임란 때 소실되면서 그 뒤에 다시 지어진 거라 할 수 있겠는데, 그러니 기단은 통일신라 때 것이고, 건물은 조선중기 이후의 것이다. 그런데 기단을 보면 사람 하나 지나다닐 수 없을 정도로 좁다. 이 어찌된 일인가? 우리 전통 건축에서는 기단이 처마선보다 바깥으로 나가서도 안 되지만 최소한 두 사람 정도가 어깨를 스치며 다닐 수 있을만한 폭을 갖는 것이 예사인데, 이 건물은 기단이 거의 없다시피할 정도로 좁다. 심지어는 1층의 우주가 기단 귀틀석 위에 서 있다. 그 말은 기둥의 맨 끄트머리 모서리 위에 섰다는 것인데, 아무래도 이건 자연스럽지가 못하다. 그러면서 교수님이 말해준 것은 실제 답사를 갔을 때 눈 밝은 사람이라면 바깥 기둥 밑에 주초석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을 거라 했다. 안에 있는 내고주나 사천주들에는 모두 초석이 있는데 바깥 기둥에만큼은 초석이 보이지 않는다며 말이다. 이 말은 바깥 기둥들은 기단 갑석 위에 기둥이 바로 놓였다는 것이다. 그러니 예전 모습은 초석이 있는 기둥들만 이뤄진, 그 정도의 규모였는데 조선시대에 들어 중수를 하면서 한 칸씩을 더 늘리면서 기단 위에 초석 없이 바로 기둥을 세웠다는 것을 뜻한다. 아! (아참, 기둥 밑 초석을 말하면서 한 가지 더 기억나는 것이 있는데 내진기둥들과 사천주 밑에는 초석이 놓였지만 맨 가운데에 있는 심주에는 심초석이라는 것이 있다. 이것이 중요한 것은 이 심초석 안에 부처님의 사리함이 있다는 것. 이 건물은 무어라 했던가? 탑이라 했다. 탑은 무엇인가? 부처님을 상징하고 사리함을 안치하는 곳이다. 그래서 이 건물에는 일반 목조건축물에는 없는 심주라는 것도 있고 심초석이라는 것도, 그 심초석 안에 사리함도 있는 것이다. - 시험볼 때 팔상전의 도면을 그리게 되면 이 심초석과 사리함 부분을 빼놓기 쉬운데 그것을 빠뜨리면 안 된다면서) 아무튼 아까 원통보전에서도 통일신라 시대 원형에 비해 조선시대에 중수를 하면서 달라진 모습들을 살펴보았는데 팔상전에서도 그러한 특징이 확연히 나타난다.

3. 법주사 대웅보전 (1624)

정면 일곱 칸, 측면 네 칸 건물이다. 이 건물은 중층불전으로 우리나라의 3대불전이라 하던가. 구례 화엄사와 무량사 극락전 그리고 법주사 대웅보전. 특이하게도 이 대웅보전에는 석가모니불이 아니라 비로자나불이 있다. 비로자나불이 있는 불전은 '대적광전'이라 하거나 '비로전'이라 해야 걸맞을 텐데, 당시 주불전들을 '대웅전'이라 한 것에 맞춰 그냥 계속해서 '대웅보전'이라는 이름을 쓰게 되었다며 말이다. 아무튼 법주사 대웅전은 중층불전으로 우리나라 3대 불전에 속하면서도 그 가운데에서도 가장 큰 불전에 가장 큰 불상을 지닌 불전이라 했다.

말했듯 이 건물도 중층건물이다. 그렇다면 이 건물은 어떤 방식으로 올린 중층건물인가? 적층형인가, 아님 온칸물림식 중층인가 그도 아님 반칸물림식 중층인가? 반칸물림식 중층양식이다. 그렇다면 귓보형인가, 귀고주형인가, 귀잡이보형인가? 아니, 아니, 아니! 이 건물 또한 이 건물만의 특이한 방식으로 중층을 이뤘다. 귀고주형과 귀잡이보형이 혼합된 방식. 위에서 법주사 팔상전은 귓보형과 귀잡이보형이 혼합된 방식이라 했다. 그런데 이 대웅보전은 귀고주형과 귀잡이보형이 혼합된 방식이다. 반칸물림의 중층양식에서 혼합방식으로 배운 것은 딱 두 가지였고, 사례도 각각 하나씩 딱 둘이었는데 그 둘이 모두 법주사에 있다. 우와, 법주사! 법주사는 귀잡이보를 좋아해. ^ ^법주사 대웅보전은 귀고주를세우고 귀잡이보까지 두었다.그런데여기에서도 또한 특이한 점이라면 귀고주를 하나의 통재로 쓰지 않고 상층과 하층으로 나누어 썼는데(그 사이에 귀잡이보가 있다.)상층의 귀고주가하층의 귀고주보다 더 굵다는 것이다. 아니, 상층의 귀고주는 다른 기둥들과 같은 굵기이고, 하층의 귀고주가 가늘다 하는 게 맞겠구나. 아무튼 이렇게 기둥 둘을 이어서 썼다면 흔히 아랫기둥을 더 굵게 쓰고, 윗기둥을가늘게 썼을 텐데 이건 또 어떤까닭인가? 쉽게 생각하면 된다. 아래의 귀고주는 건물 내부에 있는 것이고, 위에 있는 귀고주는 상층의 외진기둥, 즉 바깥에서 보이는 기둥이 된다는 것. 그래서 좋은 기둥을 바깥에서 보이는 위치에 썼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같은 굵기의 기둥으로 아래에도 받치는 것이 더욱 안정적일 텐데 그렇게 하지 않은 까닭은? 앞서도 계속 말해왔다. 당시 법주사를 중수할 때는 조선에 목재가 부족하여 굵고 긴 기둥을 구하기가어려웠다. 사실 굵고 긴 기둥만 구할 수 있다면 상층, 하층을 굳이 분리해서 쓰지 않고 하나의 통재로 2층까지 올라가는 귀고주 하나만으로도 가능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어려워 따로 귓보를 쓰면서까지 상층과 하층 기둥을 분리했고, 여기에서도 굵은 기둥을 구하지 못해어쩔 수 없이 그 둘 가운데 하나를 가늘게 써야 했는데, 아랫 기둥을 그렇게 한 것이다.

4. 법주사 사천왕석등, 쌍사자석등 그리고 삼년산성

이 말고도 법주사 사천왕석등과 쌍사자석등을 봐야 한다.둘 다 통일신라 시대에 만든 것인데, 사천왕석등은 통일신라시대의 대표적 전형 양식을 보이고 있고 쌍사자석등은 아주 특이한 이형 양식 가운데 하나이다. 사천왕석등에서 통일신라시대 전형인날씬하고 홀쭉한 중대석, 그리고상대석의 복련과 하대석의 악련이 봉긋한 모습, 옥개석의 귀꽃이 조그만 것, 하대석부터 중대석, 상대석, 화사석이 모두 팔각으로 올라가는 모습, 지대석만 사각… 따위를 확인해야 해. 그리고 상륜부는 고주형과 보개형, 석탑형 가운데에서 고주형이라는 것도 확인. 통일신라시대 쌍사자석등은 이곳 법주사 말고도 중흥산성과 영암사지에 있다는데 일단 여기에서나마 벌서고 있는 라이온킹들이나 잘 보고 오자. 그렇게 법주사에 있는 원통보전, 팔상전, 대웅전과 사천왕석등, 쌍사자석등을 보고 난 뒤에는 역시 보은에 있는 삼년산성도 둘러보기로 했다. 우리나라에서는 거의 유일하게 100% 석재로 뒷채움이 되어 있다는, 그래서 물빠짐이 좋아 배수구가 따로 필요없다는, 그러나 단점으로는 편심하중이 발생할 수 있다는, 성곽양식. 그렇게 100% 석재 채움으로 된 산성이어서 삼년산성을 걸으면 딸그락딸그락 돌밟는 소리들이 요란하다던데 그 소리 또한 발바닥으로, 귀로 확인하고 와야지. 아, 또 하나 삼년산성에는 보축이라는 게 있다며 강의 시간 사진으로 본 것도 있다. 그 또한 가 봐야지.

휴우, 비가 조금씩 그치고 있다. 길목수 형님도 일어나방 안에서 준비 마치고 기다리고 있나 보다. (나는 민박 카운터에 있는컴퓨터 ^ ^) 자, 그럼 출발! 우선 비옷이랑 우산부터 사야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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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냉이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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