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굴

냉이로그 2010. 12. 14. 23:44

영월 역에 내리니눈비가 내려.그래도하얗게 옷입어 깨끗이 맞아주니 좋았다. 지난 월요일 네 시 버스를 타고 영월을 나가 두 시 오십 분 도착 기차로 내렸으니 정말 꼭 일주일 만이구나. 엿새하고 스물 세 시간. 징하게도 술을 마셨다. 그간 일 년치 못먹은 술과, 그리고 앞으로 또 일 년치 먹지 못할 술을 그 일주일 사이에 다 마시고 올 작정이었으니. 간아, 네가 고생이다. 일 년동안 아끼고 아껴 핑크빛이던 네가 그 며칠 사이에 썩은 보랏빛이 되고 말았겠네.

고백하자면 나는 그 일 년의 수험생활이 결코 즐겁고 행복하지만은 않았던 것이다.그렇다 하여즐겁고 행복하였다고 말하던 그 시간들이 전혀 그렇지 않았다는 것이 아니라, 그러면서도 내내 두렵고, 불안했고, 외로웠다. 그리고 앞으로 한 해를 더 그렇게 지낼 생각을 하자니 떠들어대던 허세처럼 결코 자신감이 충만할 수 없어.두렵다면또다시 견뎌야 할 그 외로움. 아마 나는 그것을 못견뎌 어쩌지를 못할 때마다 이 공책을 열어 지금 하는 공부가 얼마나 재미난지, 공부하는 시간만큼즐거운 때가 없다고,이렇게 공부를 할 수 있어 너무나 행복하다고 떠들어대었을 테지.

안그래보이는 것 같지만너는단단한 애라는 말을, 더러 들어오곤 했던 것도 같다. 그러는 한 편, 왜 그리도 허약하고 불안한지를 걱정스레 얘기하는 것 또한 그만큼이나 자주 들어오기도 했을 것이다.그러나 생각해보면그 말과 그 말은 같은 사람이 다른 자리에서했던 것도 같고, 그렇다면 아마 나는 그극단을 왔다갔다 하고 있었는지도, 그 말들의 중간 어디 쯤에 있었는지도 몰라. 그러나 분명한건 그게단단함이었건,물러터지기만 한 거였건 나는 많이도 외롭고 불안했던 것이다.

이제 그만 정신차려. 아마 정신 차리는 데만 해도 또 다시 일주일이 걸릴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그리 해봐야지. 이천십일년 시월 구일, 그렇게 술독에 빠져 돌아다니면서도 내년 시험 공지가 뜬 건 확인하고 있었다. 이제 다시 그 때까진 술이랑도 안녕, 친구들 안녕, 식구들에게도 미안해요, 나보다 더 가난하고 힘겨운 벗들이 내미는 손길에도 잠시만 더 모른 ……. 연속극도 시크릿가든까지만 보고 아주 끊어, 잠들기 전에 야한상상 같은 것도 하지 마라, 괜찮아, 다시 공부보다 즐겁고 행복한 건 없다 느껴지게 될 테니. 내 전화기는 아마 오랫동안 꺼져 있거나, 켜 있다 해도 대부분의 번호를 씹을 것이다. 어디에도가는 일 없고, 누구도 들이는 일 없이 지내겠지. 지나는 길에 잠시 들른다 하더라도 나는 여기에 없는 거야, 거기에도 없고, 아무 데도 없어. 그렇다고 이를 악물어어깨에 담이 들거나 오버페이스를 자초하는 어리석은 짓 따위를 하지는 않아.그게 무엇이든 이를 악물어 덤벼드는 일 따위는 하고 싶진 않으니까. 그런 식으로 하여이룬 일이란 언제나 그만큼의반대 급부를 낳게 한다는 건요만큼 사는 동안에도 몇 번의시행착오를 통해 충분히 학습되었으니까. 참거나 이겨내야 할 게 있다면 약간의 외로움과 얼마의 불안함.

이리하여 나는 다시 굴 속으로 돌아왔다. 아, 그런데, 돌아온 곳이 고작 굴이라니. 정작 내가 돌아가야 할 곳은 그곳이 아니었나, 갑식이 형과 함께 찾은 그 시절의 따뜻함과 풋풋함, 아름다움, 그 시절의 꿈, 함께 한 사람들……. 그런데 나는 지금 어디로 돌아왔다고 말하고 있는 것인지, 갑자기 다시 머리가 아파온다. 돌아갈 곳은 거기인데, 어디로 돌아가겠다고 하는 것인지. 뭐야, 이거. 아씨, 결론이 이렇게 나면 안 되는데. 머리가 아파오는 게 다시 술이 오르는 것 같아, 아, 모르겠다, 여기선 일단 그만. 아무래도 아직 내가 술이 덜 깨었나 보다. 비장까지는 아니라도 나름 개운한 마음으로 굴 속의 시간을 시작하려 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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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냉이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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