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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이로그 2010. 12. 14. 21:50

그렇게 긴 밤을 보냈으니 아침부터 부지런을 피울 까닭은 없었다. 그러나 왠일이니, 그 날의 호스트 피네 아저씨가 씽씽하게 일어나 다시 정갈한 술상을 준비했다.동포 아저씨가 오는 거야. 내려오라구 문자 보내니까 그냥 응, 한 글자만 뚝 찍어보냈다더니 벌써 다 들어왔다나. 아니나 다를까 차 들어오는 소리가 들린다. 나는 아래위 한 세트짜리 내복 바람으로 툇마루로 나가 만세. 으아, 무연이도 왔어.

다시 시작되었다.

고백컨데 나는동포 아저씨가 다 왔다는 소리에이불을 한 번 더 말아 돌아누웠다. /아우, 나OO이 아저씨 어려워졌단 말이야. /참으로 미안한 말이지만, 아저씨가 암 수술을 받은 뒤로 이상하게도 전과 같지를 못했다. 술을 먹어꾸벅꾸벅 졸거나, 야이새꺄 뒤통수를 쳐주어야 나도 같이 까불어어깨 위로 올라타고 애교와도 같은 개지랄 쌩쑈를 부릴 수 있었건만,아저씨가 아프고 난 뒤로는 그토록 반가이 만난 자리에서도 이내 민숭맨숭 부끄러워하는 것도 잠깐, 어려워 무슨 말을 붙여야 할지 어색뻘쭘해져온 것이었다. 그런데 이 날은 아저씨가 들어서면서부터 막걸리를 찾았고, 피네가 동치미를 내어왔다. 야이새꺄, 그 한 마디에 나는 정신이 행복혼미해지며 한동안 감춰오던 본성을 다시 드러내기 시작했다. 그 뒤부터는암 것도 떠오르지 않아. 잠깐의 액션활극이 벌어지기도 했을 것이고, 그 거뭇한남정네들의에로코믹이 연출되기도 했을 것이다. 그렇게 하루가 또 어둑어둑,멀리 한밭에서 장로님이 소주를 한 보따리 사들고 납시었고,이웃마을의 오키 언니, 광부를 했다던 동범이 형아 얼굴 또한그 어둔 방 안으로 가물가물.그리곤 어찌되었을까? 다음 날 공장 일을 나가야 하는 갑식이 형이 나를 태우고 새벽 길로 올라와 청량리 역 앞에서떨궈주었겠지. 꺼진 전화기를 깨워 통화목록을 보니 그 날 밤엔 텔레콤들의 도움을 받아은산이도 다녀가고,탁이도 다녀가고,남중이도 다녀갔나 보다. 그리고 저 아랫녘 우와 형님은 나에게 겁탈을 당했다나 어쨌다나.

* 사실 이 날의 얘기는 갑식이 형아의 구술을 받아적어야만이 그 날의 생생한 이야기를 그대로 담을 수 있겠으나, 석고개 부라더스는 그 때처럼 한 집에 살지 않으므로 그럴 수 없음이 안타까울 따름.

월요일 청량리 역. 안경은 어데 버리고 왔나, 모자는 또 어따 흘리고 왔니. 엄마가 싸준 다시멸치 한 봉지만은 꼭 안고 있네. 하필이면 비까지 추적추적 내렸고, 하필이면 나는 난지도가 사준 잠바까지두 겹으로 껴입고 있어.역 광장의 노숙인 포쓰 작렬.오오옼, 오우웤 헛구역질을 해대며 라이터를 빌려 담배를 피웠다.불 좀 빌리자는데 왜자꾸만 슬금슬금피하는 거야.기차가 오려면 아직도 두 시간.앉아 기다리려니 땅이 빙글빙글 돌아 그건 못하겠고, 차라리 일어서서 역 둘레를 빙글빙글 도는 게 낫지. 오오옼,워오옼. 피네는 지금 어쩌구 있을까. 폐허가 되어버린 그 방에서 부스스 눈이 뜨고나면 쓰러진 술병만 여기저기 나뒹굴고 있을 텐데. 그거 하나하나 주워 일으키는기분 어떨지 모르지 않으니. 그래도, 씨발,다녀오길 잘 했어. 기차는 왜이리도 오질 않니, 자꾸 딴 데 가는 기차만 오구 지랄. 그러면서도 영월 갈 생각을 하니 어찌나 외롭고 불안하던지. 이제가고 나면그 때부턴 또 혼자. 일주일을 그대로 비우고 있었으니 얼마나 냉골일까.이젠 좀 정신을 차릴 수 있을까, 어디로 돌아가야 하는 거니, 돌아가야 할 곳 거기가 맞기는 한 것인지,그냥 이대로 엄마 뱃속에 들어가 한 삼 일만 있을 수 있다면. 태초, 그 따뜻하고 포근하던 엄마의 자궁 속,딱 사흘만 그 안에 들어가 있다 나올 수 있다면.

* 자판 앞에 앉으니 되는대로 끄적여지기는하지만, 기껏해야 복원 가능한 기억이란 그 서른 몇 시간 가운데 몇 장면이 되질 않아. 괜찮아, 그러나, 다만,누구 하나찜찜하지만은 않았기를. 쓸쓸하고 슬픈 거야다 용서가 될 것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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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냉이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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