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자를 낳을 무렵 이 책을 주문해서 받아놓고 있었건만, 이제야 겨우 읽었다. 하긴, 감자가 나온 뒤로 책 한 권을 온전히 읽은 게 몇 권이나 되려나. 의학에서 쓰는 말이나 내용이 적지 않아, 읽기에 쉬웠다고는 할 수 없겠지만, 용어의 생소함을 감안하면 아주 친절하고 쉽게 쓰인 책이었다. 궁금해하던 것들을, 막연하게 알고 있던 것들을, 그리고 생각지 못하던 그 이면까지도 구체적으로 찾아 들려주는.
책의 제목만을 보았을 땐 백신 반대론자의 그걸 거라 오해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 책을 쓴 사람은 현직 의사이며, 백신을 접종하고 있는 백신 옹호론자. 나 또한 인터넷 서점에서 이 책을 고를 때, 바로 그 점 때문에 더욱 신뢰가 느껴져 주문을 했으니.
저자 소개의 일부를 옮기면,
(앞줄임)
시어스 박사는 <<우리집 백신 백과>>에서 아이들에게 필요한 백신에 대한 설명과 함께 대안적 접종 스케줄을 제안한다. "백신에 들어가는 여러 화학물질과 성분이 절대적으로 안전하다는 것을 입증할 만큼 충분한 연구가 없다"고 말하는 시어스 박사를 두고 '백신 반대주의자'라고 비난하는 사람도 있지만, 사실 그는 백신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며 날마다 병원에서 접종을 하는 백신 옹호론자이다. 그는 백신의 위험을 최소화하면서도 백신이 주는 효과를 극대화하는 대안을 찾는 데 관심이 많다.
(아래 줄임)
이렇게나마 감자품자의 백신스케줄을 만들 수 있었던 건, 전적으로 이 책에 기대서였다. 그동안 백신 성분의 위험 및 백신의 부작용, 백신의 효용에 대한 합리적 의심을 품고, 그것에 대해 지적, 경고해주는 자료들은 인터넷을 통해서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었다. 하지만 그에 대해 대안적인 백신 접종에 대한 팁이나 선택적 접종, 그러했을 때 각각의 접종 시기는 어떻게 계획하고, 각각의 질병에 대한 주사약의 종류들은 어떠한지, 그 각각의 주사약을 제조하는 과정이나 거기에 들어간 성분들은 어떠한지를 하나하나 알려 보여주는 건 찾지를 못하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대부분은 보건당국에서 제시하고 있는 표준 스케줄에 따라 "닥치고 접종!" 이거나 아니면 그 반대편에서 백신의 위험에 대해 경고만으로 끝나버리고 마는 "닥치고 거부!" 둘 중의 하나말고는 아기를 키우는 부모로서는 어떻게 해야 할지 난감하기만 하던.
내가 잘 알지 못하는 부분이기에, 경솔함을 최대한 경계하려 했고, 가능한 신중하게 찾아보고 싶었다. 노력이 부족했을지는 모르지만, 적어도 인터넷 검색으로는 참고해볼만한 대안적 백신접종 스케줄 같은 건 찾아볼 수가 없어. 태어난 순간부터 하여 표준접종만 열댓 가지, 횟수로 치면 오륙십 번의 투약을 하게끔 되어있는 속에서, 저마다 어떤 기준이나 원칙, 환경에 따라 어떤 것을 선택하고, 또 어떤 것을 후순위로 두거나 접종 자체를 권장하지 않는지, 그에 대한 구체적인 실행 계획에는 힌트를 얻을 수 있는 게 없어.
그래서 열흘 가까이 걸려, 마치 수험서라도 되듯, 줄을 치고, 요점 정리를 해가며 이 책을 보았네. 그렇게 해서야 짜볼 수 있게 된 감자품자의 백신 계획서.
한 가지 더 안타까운 건, 병원에 대한 소개를 찾아볼 수가 없다는 거. 백신에 들어있는 티메로살(수은) 성분이, 과다한 알루미늄이, 포름알데히드가, 동물과 사람의 세포조직이 위험하다고 경고를 하고 있긴 하지만, 그래서 각 질병에 대한 주사약들의 성분을 찾아, 그것들이 최소로 들어있는 제품을 찾았다고 할 때, 과연 어떤 병원을 가야 그에 대한 상담이나 요구가 가능한지에 대한 소개 같은 건 전혀 찾을 수가 없어. 예전에도 달래가 유선염으로 고생일 때, 병원에서 처방해주는 팔로델이라는 약이 미국에서도 금지약품이 되어버린 위험한 약이라 하여, 그것 대신 도스티넥스라는 약으로 처방해주기를 바란다고 하였을 때, 씨알도 먹히지가 않던 병원과 의사. 아무리 머리를 조아리고 조심스레 의견을 전하려 해도, 의사의 권위에 도전하는 막되먹은 환자 취급만을 받았으니.
그런 게 좀 안타깝다. '안전한 예방접종을 위한 모임(안예모)'나 '약 안쓰고 아이 키우기(안아키)' 같은 모임들이 있다지만, 정작 어떤 병원을 가면, 투약이나 접종 스케줄에 대해 부모의 의견이나 질문을 건넬 수 있는지. 수은이 든 주사약을 쓰면 위험합니다, 라고는 엄중히 경고해주지만, 그런 요구를 들어줄 수 있는 병원이 어디에 있는지, 에 대한 실질적인 정보 같은 거는 찾아보기가 어려우니.
다음 주부터 병원을 다녀보려 한다. 저 백신접종 계획서를 들고, 상담이 가능한 병원, 의사를 만나야 할 테니. 그때까진 아빠 혼자 이 병원 저 병원, 의사 선생님들을 만나러.
아기 이름이 비파라고 했던가. 시와에게서 들어본 이름이었다. 그런데 한 달 전 쯤, 그 가족에 대한 인터뷰가 신문에 크게 난 일이 있어. 도시를 떠나 숲에서 사는 삶을 선택한, 자급자족을 지향하며 전기니 가스, 기름을 비롯 공산품 소비를 최대한 지양하며 살아가고 있는 젊은 부부와 아기가 살아가는 이야기. 친구의 친구 이야기이니 더욱 궁금하기도 하였고, 관심있게 읽어보았던.
그런데 정작 놀라웠던 건, 그 기사가 나간 뒤로 트위터에서 백신 논쟁이 일었던 거. 아니, 그건 논쟁이 아니었다, 무서울 정도로 몰아부치던 폭력적 언사들. 순간, 내가 보고 있는 이게 정말 맞나 싶어, 졸린 눈을 비비며 자세를 고쳐앉기까지 했다. 그이들은 백신을 거부한 부모들을 공중보건에 기생해 내 아이만을 보호하려는 기생충이라는 표현을 아무렇지 않게 내뱉어. 아동학대라는 말은 그나마 점잖은 표현이었고, 이 사회에서 추방해야 할, 법을 제정해서라도 벌금을 때려야 한다는, 당장 눈 앞에 보이면 두들겨 패고 싶다는, 온갖 혐오의 표현들이 넘쳐났다. 마치 일베충에게 욕을 퍼붓듯, 백신거부자라는 기생충을 경멸하고 혐오하는.
흔히 보는 포털사이트의 기사 댓글이라면 그저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익숙한 장면이겠거니, 했을지도 모르건만, 그게 아니었다. 그런 트윗 멘션을 쏟아붓는 사람들은 세월호 단식을 지지하였고, 여혐에 대해 분노하며 메갈리안을 지지하거나 사대강 녹조를 걱정하는,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들의 선택을 옹호하는, 멘션들을 주로 올리던 사람들이었다. 그랬으니 더 놀라웁던. 그 가운데에는 진보정당 지지자임을 드러낸 이가 있는가 하면, 적어도 센스있는 이미지와 촌철의 비아냥으로 박근혜 정부를 조롱하는 이들이 대부분이었다.
마치 일베나 어버이연합을 대하는 속도와 강도로, 줄줄이 이어지던 리트윗과 멘션들. 더 독한 말들이 뒤따랐고, 더 자극적인 경멸과 혐오가 뒤를 이었다. 그러더니 나중에는 기사에 난 가족들이 입고 있는 감물 염색이 든 옷차림까지 시비를 걸면서, 예수를 흉내낸다느니 사이비종교 같다느니. 아기에게 예방접종을 하지 않았다는 걸 문제삼던 이들은 급기야, 나무를 때고 사는 삶을 두고도, 계면활성제가 들지 않은 세제를 쓰고 사는 것마저도, 태양광 전지를 이용해 인터넷을 하는 것마저도, 온통 비아냥에 경멸과 혐오의 대상으로 삼았다. 도시를 거부하는, 문명을 거부하는, 과학을 거부하는, 맹목적이며 위선적인.
낙인을 찍었다.
지금껏 이해가 되지를 않아. 더구나 다른 영역에서는 소수자들의나 소수의견을 그런 식으로 묵살치 않는, 오히려 소수라 하여 짓밟히고 뭉개어질 때 함께 옹호를 해주던, 행정당국이나 국가시스템이 공공의 이름으로 폭력을 행사할 때 그것을 역겨워하던, 사람들이지 않았던가. 그런데 백신비접종자에게만큼은 사회의 기생충같은 존재들, 위선과 경멸의 대상으로 낙인을 찍어.
순간, 나와 달래 또한 이 사회로부터 추방받아 마땅한, 벌금을 거둬가지 못해 이가 갈리는, 눈앞에 있다면 한 대 때려주고 싶은, 기생충이자, 아동학대자가 되고 말았다.
아무래도 내가 트위터라는 공간을 오해하고 있던 모양이다. 물론 나는 거기에 아이디가 없고, 이용자가 아니긴 하지만, 관심있는 이슈가 있을 때면 한 번씩 들여다보게 되곤 하였는데, 그럴 때면 감탄을 할 때가 많곤 했다. 마치 하이쿠를 보듯이, 아주 짧은 몇 문장 만으로도 몇 쪽 분량 하고픈 이야기를 탁, 탁 던져주곤 하던. 응축시킨 경쾌한 문장들도 그러했고, 먹통구리처럼 답답하게 돌아가는 세상의 일들에 시의적절하게 잽을 날려주는 것도 그러했고, 기발하다 싶은 그림과 사진들도 마찬가지. 하여 트위터리안들은 개성 넘치고 센스있는, 자기 생각이 또렷하며 눈치보지 않는, 사회 주류의 폭력을 역겨워하고 용납치 않는, 그런 이들일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그렇지도 않은가봐.
심지어 황현산 선생마저도. 트위터의 몇 마디 짧은 문장만으로도 시원한 감탄과 묵직한 질문을 전해주곤 하던 선생마저도, 백신비접종자들에게 한 마디를 보탰다. 물론 욕지거리 수준의 혐오까지는 아니었지만, 말투만 점잖았달 뿐 결코 다르지 않은. (그 뒤에 본 딴지의 기사는 기가 차지도 않았고, 민중의소리 컬럼은 허탈하기만 해.)
그렇게 쏟아내는 이들 가운데, 그렇게 한 마디씩 보태는 이들 가운데 백신과 관련된 문제를 나름 진지하게 고민한 이들은 얼마나 될까. 물론 그 분야의 고민이나 공부가 깊은 사람만, 거기에 대한 의견을 가질 수 있는 건 아니지만, 그렇게까지 낙인을 찍고 혐오를 내보이며 사회에서 추방해야 마땅하다고 열을 올릴 정도의 말을 한다면, 그건 좀 다르지 않겠는지. 그래놓고는 현대의학을 부정하는, 과학을 불신하는, 문명을 거부하는, 생태주의라는 허울을 뒤집어쓰고 있는 위선적이고 맹목적인 사이비들로 몰아붙이는.
백신거부자들을 혐오하는 그이들의 트윗 멘션들은 과학에 대한 태도로 이어지곤 했다. 그러나, 정작 과학적인 태도라는 게, 과연 '닥치고, 접종!'에 있는 것인지. 그 백신에 사용되는 주사약의 성분이 어떤지도 모른 채, 생후 어느 시기에 맞추어야 가장 적절한지에 대한 검토를 따져보지도 않은 채, 뱃속에서 나온 핏덩이에게 알콜솜을 문질러, 시키는대로 맞으라면 맞고, 뭐가 뭔지도 모른 채, 그저 하라는대로, 시키는대로. (문득 '가만히 있으라!'던 어느 배의 선무 방송이 떠올라.)
합리적인 의심이나 질문을 가질 수 있다면, 그에 대해 질문하고, 문제제기 하고, 선택하는 것. 과학적 태도란 그런 게 아닐지. 현대의학이, 과학이 얼마나 자본의 이해에 종속되어 있는지, 어떤 분야에서나 세계 표준처럼 알려져 있는 미국의 제약회사라는 곳들이 얼마나 무서운 곳들인지, 굳이 그런 얘기까지 해야 할까. 멀리 갈 것도 없이 최근의 가습기 살균제 실험 조작만 해도, 독성학에서는 최고 권위자의 보고서였다. 최근 미국에서 7년동안 질병관리본부 소장으로 있던 이는 퇴임하자마자 미국 백신의 절반 이상을 제조하는 제약회사에 백신사업부 대표로 들어갔다. 백신의 위험 중 가장 논란이 되어온 게 자폐증 문제였고, 최근에는 마치 여러 연구 결과에 따라 자폐증은 백신과 무관한 것으로 결론이 났다며, 백신신중론자들을 공격하고 있지만, 그 연구논문 23종 가운데 18건이 백신 제조업체의 지원을 받은 연구였다. 그 밖의 대학의 연구라는 것도, 직접 그 연구프로젝트에 지원을 하진 않지만, 다른 연구에 재정 지원을 함으로써, 학자적 양심에 따른 독립적 연구라 보기에 어려운 것들이 대부분일. 미국 FDA에서는 비경구(주사) 약물 제제에는 알루미늄 함량이 리터당 25 마이크로그램을 넘지 않아야 한다는 경고문을 붙이고 있지만, 백신만큼은 그러한 경고문구를 제외하고 있다. 그래놓고는 FDA에서 백신 한 대에 대한 알루미늄 최대 허용치를 850그램으로 결정. 우연찮게도 그 수치는 페디아릭스라는 제약회사의 콤포 백신에 든 알루미늄 함량과 일치한다. 흔하게 하는 것처럼 아기들이 한 번에 여러 개의 백신을 동시 접종할 경우 많게는 1225 마이크로그램의 알루미늄이 몸 속으로 들어갈 수가 있는.
이분법을, 흑백을, 혐오하고 거부할 줄 알던 이들이, 오히려 그것에 따르지 않는다고 열광하며 낙인찍기와 혐오를 내보이는 걸 보며, 이걸 어떻게 보아야 할지. 최소한의 합리적인 토론, 질문이나 논증 따위는 없는. 그 태도는 그토록이나 많은 이들이 못참아하고 있는 그 '여혐'과 무엇이 다르겠는지. 여혐에 분노하면서 똑같은 방식의 혐오를 누군가에게 하고 있는 그 아이러니를.
정말 묻고 싶었다. 언제부터 당국의 지침을 유일무이한 그것으로 받아들이며, 그 틀을 벗어난 선택을 향해 그토록 증오를 해왔는지. 적어도 아니라 여겼던 이들이 보이는 파시즘적 모습에, 정말 놀라웁기만 하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