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숙을. 콜비츠를, 콜비츠 앞에 선 김종숙을, 에게해 그 낡고 작은 아파트에 차고 쌓이던 그것들을. 피흘리는 사랑을, 그 초라하고 헐벗은 진정의 싸움을.
어머니, 어머니와 아기, 아이들, 가난, 배고픔, 전쟁, 그 처절함.
저 조그맣고 깡마른.
콜비츠의 자화상, 김종숙.
한참을 멈춰 서 있게, 몇 번이고 걸음을 돌리게 하던 그림. <시립보호소>.
저 아이, 아이들. 김종숙에게 말했다. 이제 나는 저 그림들에 있는 아이 얼굴이 다 감자로 보이는 것 같아.
그랬더니 김종숙이 웃었다. 그리고 그 얼굴로 하는 말. 이제 냉이가 쪼끔 철이 들라 하는가 보네.
제주에 내려와 전시장에서 들고온 약식 팜플렛 도록을 달래에게 보여주었더니, 콧물을 들이켜 우는 소리가 조용히 들려왔다. 그러더니 이 그림 앞에서는 으앙 하고 울음을 터뜨려버려. 죽은 아이를 가슴에 포갠 채, 목을 꺾어 절규하는 아이의 엄마.
명함보다 작은 크기로 조악하게 인쇄를 해놓은 팜플렛 그림을 보면서 울음을 그치지 못하는 달래를 보며 나는 적잖이 당황스러워. 눈물이 마른 걸까, 나는.
* 전시장에서는 작품을 사진찍을 수는 없어 인터넷에 올라 있는 것들을 내려받았다. 그러면서 다시 보게 되는, 이번 전시에는 걸려 있지 않은 저 그림들도 다시 보고 있어. 눈에 익은 그림들이지만, 언제나 처음 본 듯한 저 그림들, 아이의 눈빛과 어미의 굵은 팔뚝, 그리고 등짝.
<씨앗을 짓이겨서는 안 된다>
<굶주리는 아이들>
<잠든 아이를 안고 있는, 일하는 여인>
<빵을!>
돌아오는 길, 미처 제대로 된 말 한마디 나누지 못하고 오는 것 같아 왠지 가슴이 허전하였다. 저녁 술자리에서 김종숙이 많이도 피곤해 보여 그랬을까, 내내 웃는 얼굴이었지만 지쳐보였다. 축하한다는 인사라도 제대로 할 걸. 그런데, 축하라는 말, 그 말이 과연 어울리는 말인 건지도 잘 모르겠다. 고맙다, 라고 말을 해야 했을까… 그것도 아닌 것 같아. 눈물겨움, 아, 맞다. 그 말을 했었어야 하는데 차마 하지 못했구나. 눈물겨움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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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이 오고 싶어했지만, 올라오지 못한 달래에게 보여주려고 들고 있는 전화기로 사진 몇 장을 찍어.
몇 해 전이었을 것이다. 팔을 들 수도 없을 정도로 붓질을 하던 때. 그림 그릴 때만큼은 아무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있어 좋다고 했다. 그림을 그릴 때만큼은 행복하다고, 팔을 쓰지 못해 어쩔 수 없이 그림 그리는 걸 참아야 한다는 게 너무나도 괴롭다고. 궁금했다. 그림 그리는 게 정말 그렇게 좋은지, 어떻게 그렇게 좋을 수가 있는지.
에게해 언니가 모라고 대답을 했더라. 받아적지를 않았으니 정확하게 옮길 수는 없으나, 아마 그런 뜻으로 말했던 것 것 같다. 그림을 그리고 있을 때는, 뭐가 보인다고. 보이는 그게 있는데, 그걸 그리는 게 행복하다고. 그게 뭐냐고 나는 다시 물었겠지만, 그게 뭐라고 꼬집어 말을 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아는 이들이야 다 알 김종숙의 어물어물어버버 말투. 그게 보여, 뭐가 있어, 그 뭐가 있는데, 그걸 말로 할 수는 없고…….
김종숙도 그냥 그거라 하거나 뭐가 있다 하기만 하였으니, 나로서도 그냥 그런 게 있나 보다 할 수밖에. 그러나 감히 말한다면 아마 그거를 말했는 것 같아. 그것의 진짜, 그것의 진정, 다 걷어내고 남은 그것. 나락 한 알 속의 우주 식으로 말을 하자면 그 자체로의 우주. 그 깊은 알맹이이자, 그것의 참된 실체. (아, 떠오르는 말들을 늘어놓고 보니 왜 이리도 하나같이 식상하고 후지기만 한지.)
다시.
아마도 그거일 것이다. 먹통 엉아가 그토록 찾아 헤매이던 그것. 헐벗음, 초라함, 처절함, 벌거숭이의 그것, 피흘리는 그것. 아마도 김종숙의 그것은 황시백의 그것에 닿아있으니. 그이들 모두 어쩌지 못하고 끝까지 가야만 하는 인간들, 쥐스꼬부띠스끄. 헐벗은 진정, 초라한 진실, 피흘리는 사랑.
김종숙은 어버버 말법으로, 그게 있다고, 그게 보인다고, 그걸 그려낼 때 자유롭고 행복하다고 말을 하였고, 나는 나대로 그렇게 짐작하거나 알아들었던 것 같다. 그 헐벗고 초라한 실체를 드러내는 일은, 그 자체의 깊은 우주를 들여다 보아야만 하는 일, 그 진정을 가리는 그 모든 것과 싸워야만 하는 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