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름

냉이로그 2014. 3. 27. 11:47



1. 용눈이


 어느 날이었더라, 달력을 찾아보니 23일이었고, 일요일이었다. 물론 그 일요일에도 현장으로 일을 나왔다. 비가 왔던가, 공사일보를 뒤적여보니 그렇진 않다. 어떤 이유에서였는지, 일몰이 가까워지면서 현부장님이 어서 가방을 챙기라며 서둘렀다. 일몰이 가장 아름다운, 오름에 데리고 가주려 그런다면서.  

 하긴 밥먹을 때거나 차를 타고 이동할 때마다 내가 얼마나 칭얼거렸기 때문일까. 가까운 오름에도 한 번씩 데리고 가달라고, 말로만 어디가 좋다, 좋다 해주지 말고, 손잡고 데리고 가주라고. 아니면 일요일에도 쉬지 못하고 일하러 나오는 후배를 안쓰럽게 여겨 그런 걸까.




 이 파란 잠바 아자씨가, 이 회사에서 나으 사수이자 오름박사인 현부장님. 여기는 용눈이 오름, 저 오른편으로 보이는 것이 높은 오름. 
 

 다섯 시 오십 분 쯤, 공사일보를 날림으로 써놓고는 가방을 챙겨 자동차에 실었다. 그러더니 부아아아앙, 현부장은 그 굽고굽은 중산간 길을 아우토반이라도 되는 듯 차를 몰아. 그러면서도 힐끔힐끔 창밖을 살피며, 아직 해가 안 떨어졌다며, 해가 걸린 걸 볼 수는 있을 거라며 악셀을 밟았다. 성질 급하고, 말이 빠른 데다가, 무슨 일이든 두세 가지씩 멀티로 해내는, 정신없이 산만해보이는 이 현부장님은, 그 속도로 차를 몰아가면서도 저기 보이는 데가 다랑쉬 오름이고, 그 아래가 아기 다랑쉬, 저기는 돝오름이라던가, 무슨 돼지오름이라 했고, 또 저기는 높은 오름, 또 무슨 오름…… 눈 앞에 봉긋한 무엇만 나오면 쉴 새 없이 설명을 해주었다. 그 이름에 담긴 뜻이며, 거기에는 어느 계절에 가야, 어떤 날씨에 가야, 제대로 그 맛을 느낄 수 있다는 둥, 아침에 가야 좋은 데는 어디고, 저녁에 가야 좋은 데, 촉촉히 비가 내리는 날 가기에 좋은 곳, 비온 뒤 맑게 개었을 때 가면 좋은 곳…… 후우우, 따발총처럼 설명을 해주는데, 게다가 말이 빨라지면은 제2외국어 같은 제주 사투리가 반도 넘어, 그랬으니 내 기억에는 제대로 남은 것이 하나도 없어 ㅠㅠ   

 그러나 좋았다. 표현은 서툴지만 마음이 따뜻한 사람. 무언가를 해주고 싶어 애를 쓰는 게 그대로 느껴져. 그 빠른 말투와 정신없는 산만함은 부끄러움을 감추느라 그러는 거라는 것도 알 수가 있어. 언젠가 오름나그네라는 국숫집에서 막걸리 한 잔을 같이 하러 들어갔는데, 현부장은 과이연 오름박사라 할만 하였다. 그러니까 지금처럼 사람들이 오름에 관심을 갖게 되고, 주목받는 관광지가 되기 훨씬 전, 이십 대이던 현부장은 이미 그 시절 <오름나그네>라는 세 권짜리 책을 읽고는 그것에 빠져 그때부터 제주에 있는 오름이라는 오름을 틈만 나면 찾아다녔다. 이 섬에는 삼백서른일곱 개의 오름이 있다던가, 그것들 다는 아니지만 지금껏 칠십 곳 정도의 오름을 다녔다 한다. (일주일 내내 하루도 쉬지를 못하는 회사 생활을 생각하면, 보통 정성이 아니었을.) 그러면서 하는 얘기가, 마음에 드는 곳을 몇 번씩 오르고 하면서 어느 계절, 어느 시간 대, 어떠 날씨에 가야 가장 좋은지가 느껴지더라는 거. 암튼 그런 현부장이 이 날은 퇴근 뒤, 해가 넘어가는 거를 붙잡기라도 하듯, 부랴부랴 서둘러, 일몰이 아름답다는 그곳, 용눈이 오름으로 데려다 주었다.   





2. 뛰어! 





 용눈이 오름은 그리 높지 않았지만, 오르는 내내 사방으로 확트인 시야가 너무나도 좋아. 마치 월정 바다 앞에 섰을 때처럼, 또다시 가슴에 아무 것도 걸리는 것이 없는 것 같은 시원함을 느껴. 게다가 그 시간엔 오름을 걷는 이들도 몇 있지가 않아, 그랬으니 굼부리로 오르는 고블고블 오름길이 손짓을 하는 것만 같아. 누구라도 그랬을 것이다. 그 앞에 서면 그 길을 따라 내달리고 싶어. 마치 압바스키아르소타미 감독의 영화 <내 친구의 집은 어디인가>의 아마드가 숙제장을 가지러 그 산길을 힘껏 뛰어 오르던 것처럼, 그렇게 그 길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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