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명서를 쓰고 하는 일은, 아마 제가 하기 어렵지 않을까 싶어요.
어젯밤에도 잠들기 전에, 생각해 보지 않은 건 아니었어요.
이 조선반도에 전쟁이 일어나지 않도록, 그리고 남북녘 사이에 평화를 바라는 마음에서야
다른 여러 선생님들과 저 또한 다르지 않겠지요.
그런데 성명서라는 형식이 저에게는 그렇게 와 닿지가 않았어요.
성명을 내 건다는 것, 입장을 밝히고, 책임있는 당국에게 무언가를 요구한다는 것...
저 개인적으로는,
지금 정세에서 우리가 흔히 보아온 성명서 같은 것을 쓴다는 거에는
솔직히 마음이 그리 움직여지지가 않아요.
그 대상이 박근혜 정부이건, 또는 한미연합사령부라는 이름을 내세운 펜타곤이건,
물론 그들의 대응이나 태도에 아주 근본적이고 심각한 문제가 있기는 하지만,
그것에 일침을 가하기에는
핵 무장에 전쟁 불사 엄포를 놓고 있는 북녘의 태도에 대해 같은 무게로 또한 말하지 않을 수가 없을 거예요.
그러나, 저는 지금에 있어 남쪽 정부, 그리고 북쪽 정부에 대해
날선 목소리로 책임을 묻거나 질책성 요구를 하는 것은 어떤 울림도 되기 어렵다 싶어요.
오히려 이쪽 저쪽을 더 자극하는 것은 물론,
불안한 마음으로 지켜보는 일반 시민들에게도 공명하지 못할 것 같아요.
선생님의 문자를 확인하면서, 성명서라는 말을 볼 때
지금에 와서 우리처럼 아무 것도 아닌 이 땅의 조그만 사람들이 그 어떤 목소리를 낸다면
성명서가 아니라 뭐랄까 기도문 같은 것, 참회와 반성의 편지 같은 것,
그런 것이어야 하지 않을까 싶었어요.
오늘의 긴박한 정세를 상기시키고,
그러한 긴장을 오히려 더 경색 국면으로 몰아가는 정부의 태도를 꼬집어
진짜 안보는 평화에 있음을 더 큰 목소리로 얘기하는 것 또한 물론 필요하겠지만,
그런데요, 저는 남쪽 혹은 북쪽 정부를 상대로 한 그러한 성명보다
더 절실한 건 우리 자신, 나 자신을 돌아보는 데 있는 것 같아요.
글쎄요, 아마 저 스스로부터가 그런 마음이 들어서인지 모르겠어요. 나는 과연 박근혜를 위시한, 김정은을 위시한, 그들에게 평화를 선택하라는 말을 떳떳하게 할 수 있겠는지.
북녘의 누이들, 언니들이 수백만이나 굶주려 나가는 동안에도,
조선반도의 반 너머 땅덩어리가 어디에도 손을 잡지 못하고 그토록이나 고립되어 혹독한 겨울을 살아내고 있는데,
나, 얼마나 그 누이들을 마음으로 아파했는지.
우리, 얼마나 그 혹독한 삶을 견디는 언니들에게 손잡아 보려 했는지.
북쪽에서 핵무기를 만들고, 그것으로 이 모두를 파국으로 몰아가게 할 것을 추호도 두둔할 마음이 없지만,
그러나 남쪽에서 쌓아올려온 자본의 금자탑들은 이미, 북쪽에서 만든 핵무기의 또다른 모습은 아니었는지.
우리 아이들에게도 역시,
다른 아이보다 앞서기를, 다른 아이보다 잘 하기를, 다른 아이를 이기기만을
가르쳐 온 것이 우리의 학교였고, 사회였고,
소박하게 살아가는 우리네 아빠엄마들이 아니었는지.
서울 가까이에도 이제쯤은 꽃이 많이 피었나요?
저는 올해 들어서는 경북 영주에서 지내며 일을 하고 있어요.
이쪽 경북 산간에서도 이제나 저제나 꽃이 피는가 했는데
이번 주부터는 꽃들이 얼마나 예쁘게 얼굴을 내밀고 있는지 몰라요.
이제 이 꽃들 점점 더 위로 올라가, 군사분계선도 넘고,
더, 더 위로 올라가 미사일을 배치하고 있다는 원산에도, 함북에도 곱게 물들이겠죠.
이 조선반도에
남쪽의 복사꽃이 북쪽의 진달래를 의심하지 않고,
남녘 소 울음소리와 북녘 염소 우는 소리는 한 데 어울려도 평온하기만 할 텐데,
오로지 우리만은 나자마자 서로를 두려워하고, 나자마자 서로를 의심하고,
내 옆 자리 아이를 이겨야만 하도록 배운 것처럼
분계선 너머 저 곳 사람들을 이기려들려고만 하게 되어버렸다는 게,
아무리 생각해도 억울하기만 하고 그래요.
저 꽃들과, 저 살아움직이는 다른 모든 목숨들과
우리가 다른 게 도무지 무엇인지,
무얼 내려놓지 못해 수십 년 너머 그래야만 하는지.
점심시간에 잠깐 인터넷 열어보니 긴박하게 돌아가는 상황은 여전하네요.
달력에는 다음 주 월요일이 세계군축행동의 날이라던데,
북녘에서 미사일 발사대를 움직이는 손이 바빠질수록
우리는 더 많은 무기를 녹여 꽃받침을 만들고,
그 어느 쪽에서 핵무기를 만들어 겁을 줄수록
우리는 더 깨끗한 맨살로 두 팔 벌리고 심장을 내미는 수밖에요.
더 많은 쌀을, 더 많은 약을, 더 많은 꽃을, 더 많은 사랑을
전진 배치한 미사일 발사대 앞으로 가지고 가는 것,
그것만이 이 전쟁을 막을 수 있게 하는 것 아닐까요.
수 년 간의 굶주림을 진작 내 식구의 굶주림처럼 나누지 못해 미안했다고,
남쪽 반토막 땅 안에서도 내내 서로를 이기려고나 들었으니
북녘의 아픔을 함께 나누지 못한 건, 어쩜 당연한 일이었는지 모르겠다고.
어서 그 미사일 발사대를 거두어 달라고,
이미 남쪽에선 진달래 개나리가 군사분계선 가까이 다 올라와 있다고,
이 꽃들이 더 올라갈 수 있게 무기를 거두어달라고,
우리가 먼저 무기를 버리고, 미움을 버리고, 움켜쥔 것들 내려놓고 맨 몸이 되겠다고.
.
.
잠깐 짬을 내어 사무실에 들어와 편지를 쓴다는 게
저도 모르게 이리 길어져버렸네요.
아마 어젯밤, 아니, 지난 주 못받은 전화 때부터 선생님 문자를 받아 생각이 많았더랬나봐요.
다시 성명서 얘기로 돌아가면,
그냥 그랬으면 좋겠어요.
특히나 어린이책이며 문화와 관련한 모임에서 내는 거라면
굳이 그 어떤 선명한 목소리나 간명한 구호 같은 것들로 당국에 목소리를 전하는 것보다는,
아이들이 보아도 충분히 느낄 수 있는,
아이를 키우는 엄마아빠 누구라도 함께 우리가 살고 있는 모습을 되돌아보며
내 삶, 우리 삶에서부터 전쟁도, 평화도 모두 비롯한다는 걸,
마음으로 나눌 수 있는, 그런 낮은 목소리라면 좋지 않은지.
소리쳐 울부짖는 외침만큼이나 낮고 고요하게 떨리는 목소리에
그 간절함이 더하지 않을까, 하는.
그래서 어떤 입장과 요구를 담은 성명서의 형식을 대신하여
평화를 위한 기도 같은 것,
전쟁을 낳게 한 우리 삶에 대한 어떤 반성문 같은 것,
그런 것으로 우리 아이들과, 아이들 곁에 있는 어른들에게 전하고 함께 나눌 수 있다면 좋겠다 하는 마음..
그런 마음이요.
어젯 밤 선생님께 문자로 받은 제안을 듣고,
그에 대해 답을 드린다 했다는 게, 요사이 들어오던 생각들까지 이 편지에 다 담고 말았네요.
아마 저도 이와 같은 이야기들 누군가와 나누고 싶다는, 목마름이 있던 참이라 그랬나 봐요.
두서없는 편지가 되어버렸는데,
아무래도 저는 성명서를 쓰기에는 어려울 것 같아요.
오늘 저녁 몇 개의 모임이 만나 회의를 하신다고 했는데,
그렇게 앞서 움직이시는 분들이 계셔서 정말 고마운 마음이에요.
선생님이 얼마나 절실한 마음에 그렇게 연락해오셨는지도 충분히 느껴, 깊이 고마웠고요.
모쪼록 이러한 간절한 마음들, 작은 목소리들이 모여
상상하기도 어려운 그 끔찍한 전쟁을 막아낼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끝내 저마다 우리의 몸과 삶이 평화가 흐르는 길이 될 수 있기를.
그럼 선생님, 힘내세요.
이쪽에는 어제오늘 바람이 몹시 불고 있는데,
그 속에서 작은 꽃송이들이 온 몸을 떨면서도 가지 끝을 안간힘으로 붙잡고 있어요.
저 간절함과 안간힘으로. (2013.04.11 14: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