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십오 크레인 위 진숙 언니
김정남
『글과그림』2011.8월
희망버스를 꼭 타야 언니에 대한 예의인 것 같았다.
빚진 마음이 풀어질 것 같았다.
1차와 2차를 못 가서 발만 동동
이런 마음들이 모여 희망 3차 버스를 타는 계기가 되었다.
나는 언니에 대한 기억이 각별하다.
사슬이 퍼런 군부 독재 시대에
우리에게 특별히 애틋하게 대해주던 언니다.
대안고무에 다니기 전 나는 열여섯의 어린 미싱공이었다.
아침 8시에 출근
나에게 주어진 쉬는 시간은 단 10분
점심시간은 12시 정각부터 12시 30분까지 단 30분
점심 식사로는 국수 한 그릇
하지만 그나마도 줄 서다 먹지 못하는 날이 많았다.
그렇게 쉴 틈 없이 미싱을 밟았다.
그러다 이 공장의 모든 노동자들이 일어났다.
‘배고파 못 살겠다’ ‘밥을 달라’ ‘쉬는 시간을 달라’ ‘노동법을 지켜라’ ‘우리도 인간이다’ 라 외치며 일어났다.
그때 나는 유인물을 들고 선동을 했다.
그와 동시에 경찰에게 머리채를 잡히고, 군홧발에 얼굴을 짓밟혔다.
그리고는 나를 “빨갱이 같은 년”
“배운 것도 없는 것들이 대학생들한테 못된 것만 배운 년”이라 했다.
그 당시 노동운동 활동으로 수배 중이었던 내 남편도 잡혀갔다.
해원이를 집에서 젖을 물리고 있던 밤
열시쯤 되었던가,
경찰이 들이닥쳐 남편을 잡아갔다.
나는 어떻게 반항도 못 하고 눈물을 흘렸다.
이 소식을 진숙 언니가 듣고 해원이 분유값을 모아 줬다.
그도 해고자였는데…….
많은 노동자들이 해고되고
부당하게 잡혀가던 그 시대에 김진숙 언니를 만났다.
언니는 껌팔이, 미싱, 용접공 등 안 해 본 일이 없다.
밑바닥 생활에서 자신의 삶을 놓치지 않고 살아 온 사람이다.
나는 이런 언니를 잊을 수가 없다.
그래서 언니를 만나러 3차 희망 버스를 탔다.
뜻을 같이하고자 버스에 오른 사람들
외롭고 그리운 언니를 위해 간다.
부산에 도착했다.
청학 성당 마당에서 언니한테
지인의 도움을 받아 트위터에 글을 올렸다.
‘언니 대안 고무 해고자 김정남입니다. 강화에서 왔어요. 힘내세요’
답글이 올라 왔다
‘우리 정남이가 왔구나. 해원이 잘 크나’
아, 언니 살아 있군요!
가슴이 뭉클 눈물이 나왔다.
미안해요, 이제야 와서. 산다고 바빴네요.
철통같이 막아 놓은 경찰의 방패에
결국 언니를 보지 못하고
육성으로 김진숙 언니의 목소리를 듣는다.
“동지 여러분 고맙습니다. 감사 합니다. 비정규직 정리해고 이런 것이 잘 해결 되면 살아서 내려가겠습니다.”
언니 목소리를 들으니 기력이 많이 떨어진 것 같다.
그래도 사력을 다해 외친다.
듣는 내내 눈물이 났다.
‘언니, 언니 살아서 돌아와야 합니다. 우리 모든 노동자들의 삶의 희망이 되어야 합니다.’
희망버스가 언니를 보지도 못한 채 출발한다.
시내버스를 탔다.
경찰이 또 막는다.
한참 후에 버스가 출발 한다.
85크레인 그 옆을 버스가 지나간다.
밤새 보지 못했던 언니를 그 옆을 지나가며 잠깐 봤다.
언니를 지켜주는 네 명의 해고자들이 밑에 있고
85크레인 꼭대기에 언니가 있다.
차 안에서 눈물만 흘리고 그 옆을 지나갔다.
가슴이 울린다, 아린다.
나는 울면서 간다.
해고 되어보지 못하는 사람은 그 삶을 모르듯이
정리해고, 그 쪼여오는 삶을 모르듯이
김진숙. 나는 그의 처절한 그 삶을 안다.
얼마나 사람이 그리울까.
얼마나 외로울까.
얼마나 고통스러웠을까.
얼마나 힘겨울까.
85크레인 위에서 어두워지면 밀려오는 외로움과 공포
그 마음, 아는 사람은 안다.
그래서 언니는 싸운다.
뻔뻔한 관료들 앞에서 한 번 고개 숙이면
평생 안일함을, 편안한 삶을 살 것을
언니는 그런 치졸함을 버린다.
당당하게 굴하지 않고
마지막 사력을 다해 싸운다.
정리해고 반대, 비정규직 철폐를 외치며
네 명의 해고자들과 함께 85 크레인 꼭대기에서 싸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