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여정을하루하루 늘이다가오늘에야 넘어왔다. 오두막에 들어와 툇문을 열어 놓고 풀벌레 소리들, 모기장으로 달려드는 나방 날갯짓 소리를 듣고 있노라니 서울에서 머문 시간들이 벌써 아득하게만 느껴지는 것 같아. 나는 다시 이곳 설악 아랫자락 산 밑의 오두막에서 계획없는 하루하루와 싸우며, 타협하며, 화해하며, 버티며, 몸 부벼대며 지내게 되겠지. 어쨌든 지금으로서는 찌는 듯한 더위가 가장 겁날 뿐이다.

동서울에서 버스를 타고 넘어오는 길, 휴게소에 한 번 멈추는 바람에 잠이 깨었는데 인제를 지나 원통으로 가는 길 즈음이었나, 바지 주머니 안에서 지지지 문자 오는 떨림이 있어 전화기를 꺼내 보았는데, 왜 그런지 화면이 먹통이 되어 있었다. 그러더니 아주 돌아오지를 않아. 그 사이에도 몇 번 조짐이 있기는 했는데 이번에는 완전히 맛이 가 버린 모양이다. 이걸 어쩌나, 인터넷에서 백 원을 주고 산 거기는 한데 어디를 가져가 고쳐야 하는지 모르겠다. 다시 사, 말어 잠깐 갈등이 되기는 했는데 고칠 수 있다면야 고쳐야지. 언젠가 핸드폰 소비가 고릴라의 마지막 서식지를 파괴하고 있다는, 고릴라의 마지막 서식지인 콩고 지역 내전의 전쟁 자금이 되고 있다는 글(《고릴라는 핸드폰을 미워해》)을 읽고 나서 우리의 소비가 어떤 식으로 은폐된 과정을 거쳐나도 모르는 사이 생태계를 망치게 하고전쟁에 일조하고 있는지를 알게 되면서 무척 놀란 적이 있었으니.그게 어디 고릴라와 전화기 사이의 문제이기만 하겠냐만, 알면서도 그럴 수는 없는 거잖아.핸드폰 하나를 더 소비하는 것이 고릴라들 삶의 터전을 어떻게 망가뜨리게 되고, 그 서식지가 있는 나라의 내전을 어떻게 부추기는지를 알면서 '사는 게 더 싸다'라는 내 주머니 경제 논리만을 쫓아 그럴 수는 없는 일.

Better Together / Jack Johnson

고칠 수나 있는 건지는 잘 모르겠다. 요즘은 아예 새로운 것에 대한 소비를 부추기느라 부품 생산 같은 것도 하지 않는다 하니 말이다. 화면이 보이지 않아 불편한 것이 무엇인가 셈해 보니 일단 문자 메시지를 받을 수도 보낼 수도 없다는 거, 발신자 이름이 보인다 해서 뭐 골라 받는 거는 아니지만 그래도 누가 걸었는지 미리 알 수 있어서 나름 목소리도 가다듬고 할 수 있었는데 그걸 못하게 되었다는 거, 내가 아는 전화번호는 모두 이 기계에게 대신 기억해달라 하고 있었으니 앞으로는 외우는 번호 몇 개 말고는 아예 걸 수도 없다는 거, 혹시 못 받고 지나친다 해도 부재중 전화라는 것도 확인할 길이 없어, 시계라고는 전화기 귀퉁이에서 깜빡이는 이거 하나였으니 시간을 알아볼 수도 없겠네……. 오휴, 이거 못하게 된 게 한두 가지가 아닌 걸. 그나마 할 수 있는 걸 찾는 게 더 빠르겠다. 오는 전화 받는 거랑 겨우 몇 개 되는 외우는 번호에 걸 수 있는 거. 이거 빼고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전화기가 되어 버린 거다. 빨리 고쳐야겠다. 참 나, 재작년까지만 해도 손전화 없이 잘도 살았건만 두 해 사이에 이 녀석에게 아주 져 버리고 말았어.

별이 많이 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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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냉이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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