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 부역
새벽에 눈이 일찍 뜨여 바로 풍욕을 할까 하다가 먹통 엉아 얼굴부터 보고 올라와야지 하고는 아랫집으로 내려갔다. 어젯 밤 너무 늦은 시간에 들어오느라 마을 식구들에게 인사를 못하고 있었으니. 이른 시간이었는데도 마당에 엉아 트럭이 없다. 벌써 샘골 논에 올라갔나 했더니 그게 아니라 마을 부역이 있어 이장님이랑 같이 천막을 싣고 개울에 내려갔다는 거다.내려가보니 트럭에서는 천막으로 쓸 철봉이랑 포장 따위를 내리고 있었고, 마을 아저씨 몇은 예초기를 등에 이고 골짜기 안으로 수북히 자란 풀들을 쳐내고 있었다. 오늘은 그렇게 골짜기 청소와 천막 치는 일로 마을 부역이 있었던 것이다. 나야 지난 꼭두 밤에 들어왔으니 알 턱이 없었지. 먹통 엉아 얼굴을 보러 내려가지 않았으면 아주 모르고만 있었는지 몰라.
그렇게 이른아침 나절에천막 칠 준비를 해 놓은 다음아침 밥을 먹고 아홉 시에 다시 모이기로 했다. 그거 조금 몸을 움직였다고 아침 밥이 아주 꿀맛이야. 개울로 다시 내려서니 아침을 드신 마을 아저씨들이 하나둘 해서예닐곱 분이 나오셨고, 머릿수건을 매고 집게와 자루를 든 아주머니들도 그 수만큼 내려오셨다. 남자들은 골짜기 옆 쪽으로 천막 하나씩 세우는 일을, 아주머니들은 개울을 따라쓰레기 치우는 일을 한 것이다. 그러니까 말하자면 내일부터 '유원지 입장료'라는 것을 받는 모양으로, 날마다 두 사람씩 돌아가며 천막을 지켜 골짜기로 놀러오는 이들에게 어른 이천 원, 어린이 천 원 돈을 받는다 했다. 해가 꼭대기에 오르려면 아직 멀었지만 날이 얼마나 뜨겁던지 다들 수도꼭지에서 물이 나오듯 땀을 흘려야 했다. 그런 속에서도 아저씨 한 분은 소주를 한 컵씩 들이키셔. 먼저 한 모금 정도는 골짜기에 뿌리면서 '고시레'도 하시네. 장사 잘 되게 해서 삼백 만원만 벌게 해 줍셔, 하면서. 얼추 천막을 세우고 나니 그 아래 그늘에 드는 것만으로도 고맙고 행복해. 포장 아래로 평상을 들여다 놓으면서 아까 그 아저씨 다시 또 술병을 드시네. "잠깐들 쉬다가 해, 이리 와 앉어 봐. 이래뵈두 상량식을 해야 아무 사고가 없는 거야……." 하하, 재미있다. 그래, 맞아, 상량식./ 열두 시가 다 되어서야 천막 둘을 다 세우고 정리하는 일까지 모두 마칠 수가 있었다. 이런 날은마을 돈으로 함께 밥을 먹기 마련인 것인지 다들 영광정으로 올라가 동치미 막국수 한 그릇씩을 먹었다. 트럭 짐칸에 올라타 식당으로 가는데 아저씨, 아주머니들이 이 젊은이는 누구냐 물어.마을 분들에게인사가 늦어도 너무 늦었다.이리 들어와 살면서 그동안 집을 짓느라 혹은 이러저러한 일들로바빴다는 핑계가 없지는 않지만, 워낙 이곳에는 어울려 지내는엉아들이 살고 있으니다른 이웃들에게 낯을 틔우는 일에 게으르기만 했던 거지. 그 전처럼 영 모르는 곳에 들어가 살았으면먼저 쫓아가 인사를 하려 하곤 했을 텐데.
봄에도 한 번 부역으로 나가 마을 공동으로 쓰는 지하수 물탱크 청소하는 일을 하기도 했는데, 그 날은 봄맞이 마을 청소 부역에 못나간 사람들만 따로 모여 하는 거였어서 이렇게까지 마을 아저씨 아주머니들이랑 한 데 뵙지는 못했지. 마을 부역이라는 거, 이 마을에 와서야 처음 해 보는, 정말 새로운 경험이다. 석고개에 살 때도, 죽변에 살 때도 이런 건 해 본 적이 없었거든. 나는 일을 하면서도 이 아저씨는 무슨 얘기를 하시나, 저 아저씨는 어떤가, 하고 아저씨들 보는 일에 더 마음을 두었던 것 같아. 얼굴이랑 잘 기억해 두었다가 다음에 길에서 만나면 몰라서 인사도 제대로 못한 채 지나치지는 말아야지, 하면서.
생각하면 할수록
들어와 씻고 책상에 앉아 있으니 이장님이 한 번 더 전화를 주셔. 거기 사람들 잘 놀다 가는 골짜기에 있는 이동식 변소를 비우느라 정화조 차를 불렀는데 여기 오두막 변소도 치울 거냐면서. 그래서 이 참에 같이 하면 좋겠다 싶어 오두막 변소에도 차가 올라왔다. 가까이 들어올 수는 없으니 구렁이처럼 굵은 호스를 길게 늘어뜨려야 했지. 정화조 차를 가지고 와 그 일을 하는 아저씨는 나이가 많아 보이는 분이셨는데 인상이 참 좋아. 무얼 어떻게 도와드려야 할지 몰라 호스 끄는 거나 도와드리는데 그러면서도 나 자신이 얼마나 몸을 아끼고 있는지, 스스로 그것이 느껴져 나라는 인간의 격이 얼마나 형편없는지 새삼 느끼게 되었다. 그 호스가 옷에라도 닿을까봐 힘을 제대로 쓰지 않는 거야. 장갑 낀 손으로나 겨우. 나중에 보니 그 아저씨는 변소 안으로 몸을 숙이고 호스 끝이 통 안 구석구석을 다 빨아들일 수 있게끔 애를 쓰고 계시는데……. 그 모습을 보고도 나는 나중에 호스를 다시 차에 감아야 할 때도역시 몸을 사리곤 한 것이다. 똥통 안으로 찔러 넣었던 호스 끝 부분에는 아예 가까이도 하지않으려 하면서.내가 싸 놓은 그것들인데도 말이다. 이건 아니잖아, 하면서도 자꾸만 한 발짝을 물러서,그부분으로는 손을 대려고도 하질 않아. 아저씨 얼굴이 내내 편안했다는 것에서 더 그 형편없음을 커다랗게 느꼈는지 모르겠다.
(일을 다 마쳐 얼마를 내야 하는지를 들었을 때는 또 한 번 놀라고 말았다. 골짜기 것들까지 다 해서 오만 원이라 하니 나더러 이만 원만 내라고 하는데 그렇게 적은 돈만 내도 되는 건지 몰라. 보통 뭐 하나 고장이 나서 기술자 한 번만다녀가달라 해도재료 값, 기술 값을 빼고라도 움직여 출장을 나왔다는 것만으로도 그보다 많이 내야 하곤 했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