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 사진
방명록에 보니 이름없는 공연팀의 예기 님이 사진 하나 올려 주셨다. 지난 주 토요일 시청 광장에서 '촛불승리 선언' 집회가 있던 날 모습데 어느 사이 찍어두셨나 보다. 아직 초를 밝히 기 전 날이 어둡지 않던 때. 조카랑 함께 광장으로 나가면서 뭔가 작은 거라도 준비해 갈까 하는 마음이 들어 급하게 상자를 조그맣게 잘라 목걸이 피켓을 만들었댔다. 처음에는 조카 것이랑 내 것 두 개를 만들어서 조카 목에는 "삼촌, 여기에는왜 이렇게 사람들이 많이 모인 거야?" 라 써서 걸고, 내 목에는 "으응, 나라에서 백성들 마음을 자꾸만 모른 척 하려 해서 그래." 라고 써서 짝 맞추어 걸고 다니면 재미있겠다생각했는데 그냥조카 것 하나만 만들어 나갔다.그 물음에 대한 대답이야 굳이 없어도 되겠다싶었던 거다.조카의 그 물음만으로도 충분하지 않겠나, 그 물음에 대한 대답이야 빈 자리로 남겨두는 것이 저마다 나름의 대답을해 볼 수 있게 하는 것도 되겠지 하면서. (아, 솔직히 말하면 좀 쑥스럽고 창피한 기분이 들어 그러기도 했다.괜히 사람들이 쳐다 볼 것 같고(봐 달라고만드는 거면서도)그러니 말이다.)조카는 어쩐지 자꾸만 내 앞으로 와서는 마치 제가 나를 업어주는 듯이 등을 내 가슴에 붙이고 내 팔을 제 몸에 감았다. 이 녀석이 왜 그런가 싶었더니, 얘도 그 목걸이를 하고 있는 게 자꾸만마음이 쓰였나 봐. 그러고는 몇 번을 "삼촌, 나 이거안 하고 있으면 안 돼?" 하고 묻는 거다.처음에는줄이 목에 걸려서 불편하다 하기에 그런 거면조금만 참아 보자고, 있다 보면 괜찮아 질 거라고말을 하며 넘어가곤 했는데, 실은 저도 그게 창피한 거였다.에휴, 부끄럼 많은 성격은 그대로 닮아가지고는…….하긴 나도 창피한 마음이 들어 두 개 만들까 하다가 하나만 만든거였는걸 뭐.아이라 해도 느낄 것은똑같이 느끼는 것이다./ 아무튼 방명록에 올라 있는 이 사진을 보니 반가워라. 사진을 눌러 보니 큰 그림으로 볼 수도 있어 아예 파일을 받았다가 여기에다 다시 올려 본다.
일주일이 지나
그리고 일주일 뒤인 어제, 꽉 막힌 서울시청 광장에서는 다시 한 번 주말 집회가 있다고 했다.마을에서는 오전부터 샘골 논으로 올라가 풋사과 엉아랑 풀깎는 기계를 등에 하나씩 메고 가슴까지 자란 논둑 풀들을 깎았다. 다행히 하늘이 흐려 지난 며칠처럼 푹푹 찌는 날은 아니었지만 이게 장난이 아니야. 어제 그 기계를 내려 놓을 때는 아예 팔꿈치가 굽혀지지 않을 정도이더니 하루가 지난 오늘까지 욱씬욱씬 하다. 게다가 그 전날 밤날이 거의 샐 무렵에나 잠들었으니 잠이 한참이나 모자란 터라나중에는 풀깎기를 돌리면서도 꾸벅 졸기까지 해. 한 번씩 날이 흙바닥을 퍽퍽치곤 했는데 그 때마다팔뚝이 놀라기도 한 것 같아.오후 나절이 되어 내려와 잠깐 잠이 들었다가는일간 앞 밭에서 감자를 캤고, 그러고나서야 부리나케 씻고 촛불 집회가 있다는 속초로 나갔다. 허참,요즘은 일을 마치고 나면 때마침 비가내려.매번 촛불을 밝히던 자리에사람들이 없기에 이거 어떻게 된일인가 하는데 오늘은 비도 내리고하니 모여 앉아 있을 수는 없고, 길에서 선전전을 한다며 자리를 옮겼다지. 그리로 가니까 비옷을 입은 사람들, 우산을 받친 이들이초와 손피켓을 들고길 양 편으로 서 있다. 함께 나간 풋사과 엉아랑 그끝에 함께서 있었고,여느 날과 달리자리는 일찍 정리되었다. 거기에서 만난사잇골의 또다른 선생님 한 분은 비가 오니 좋아 자꾸만 웃음이 나온다고, 아직 깨를 못심어 내일 심으려 하는데 이렇게 비가 내려주니 얼마나 좋은지 모른다며, 아 이거(피켓팅)하고 있으면서 이렇게 웃으면 안 될 거 같은데자꾸만 웃음이 나와 참아지지가 않는다 하며 웃으신다. 에이 뭐, 촛불은촛불이고 밭일은 밭일인 걸.그 말씀을 하시며 계속해웃으시는 모습은 정말 좋기만 했다.그거야 말로 평화라는 생각이 들면서.
즐거운 반란
서울에머물면서시청 앞으로 촛불집회에 나갈 때와 이곳에서 속초 시내나 양양 시장으로나가 촛불을 들 때는사뭇 기분이 다르다. 서울서는 자꾸만그 어떤 모습을 살피려 해,이를 테면 지금 이 촛불의 정세랄지, 이 싸움을 해석하는 문제, 혹은 논쟁이 중심에 선 어떤 문제들에 대해서 말이다. 하지만 이리로 돌아와 촛불을 든다거나 할 때에는 아주 그런 문제는 잊고 만다. 그저 촛불하나 더 밝힌다는 마음일 뿐./ 지나고 나 기사들을 보니이번 주말 서울에서는이만에서 오만 되는 사람들이 모였다던가.안티엠비 까페에서 오는 메일에 '오백만 실천 대행진'이라던가 하는 이름으로 열겠다고 써 있는 걸 보면서 피식 웃음이 나기도 했는데. 왜 그리도 관념에 찬 주관적 희망만을 앞세워 정세에 정직하려 하지 않는 것인지.물론 이만이 넘는 수라 해도 엄청나게많은 이들이 모인 거기는 하지만 육십의 백만, 칠오의 오십만에 대면그 수로만 보면 크게 떨어지고 있음은 분명하다. 다른 상상력들을 끌어안지 않은 채 똑같은 방식의 징검다리 집회만을 되풀이하려 한다면 그 끝은 이전의 경험들과 그리 다르지 않을 거야. 하지만 어제 그 빗속의 촛불들은 '대책없는' 대책위의 조계사 앞 문화행사 계획을 바꾸어내 '막히면 돌아가고, 다시 막히면 새 길을 뚫어내는 행진'을 이뤄냈다지. 그래,애초 이 싸움의 동력은 광장에 얼마나 많은 시민들이 모였는가를 확인하는 것에 있지 않았다. 얼마나 살아있는 광장인가 하는 생명력과 역동성, 해방감의 정도가 바로 이 촛불 싸움의 동력이었고 성패의 관건이 되기도 할 것이다. 이른바 대책위라는 곳에역할이 있다면 그것은 그 스스로가 '분노를 조직해 당국을 압박, 협상을 통한 소기의 성과'를 만들어내는 일이 아니라 시민들이 알아서 놀 수 있게 받쳐주는 일 뿐이다. 자칫 광장은 안팎으로 막혀 있는 듯 하기까지 했다.바깥에는 당국의 전경 버스들로 둘러쳐져 있고, 안으로는 대책위의계획표에가둬지는 듯 해. 촛불을 든 시민들이 스스로 놀아 저들을 비꼬고 조롱하며 그 속에서 자유롭게 꿈틀거리는 상상을 펼칠 수 있게 하지 않는 한,언젠가부터처럼 무대 단상에서 선동하는 이들의 구호 선창만을 따라하는 앵무새 노릇으로 자신들 삶의 구체적 요구들을 접어 놓게 하는 한 광장은 더이상 광장의 기능을 잃고 말지도. 그래놓고는 '시민들이 지쳐 있다'는 말로 그 탓을 시민들에게 돌려하거나 당국의 강경 진압만을 탓하고 말겠지. 결국 이 싸움은 '관념주의', '주관주의', '승리주의'라 말할 수 있는 낡은 운동의 틀을 얼마나 넘어설 수 있는지에 달려 있는지 몰라. 청계 광장에서 시작해온 아이들의 모습에서, 당국은 물론 운동세력마저도 당혹스럽게 하던 그 모습에서 그 어떤 넘어섬을 보는 것만 같아 그렇게나 기쁘고 반가울 수가없었는데……. 관건은그 힘을 이어가는가,아니면 그렇게 만들어낸 힘을 또다시 어떤 틀 안으로 가두면서 가는가 하는 것일 것이다.저들을 봐,어제던가 진보넷 블로그를 보다가 어떤 이의 글을 보니 대통령실 소통국민비서관으로 다음 부사장이,대통령 자문위원으로는 다음 대표가 각각 위촉(6월 19일), 임명(7월 2일)되었다 한다. '다음'이라면 아고라가 둥지를 틀어 당국에서는 눈엣 가시 같은 존재일 텐데 그들은 탄압이 아니라 포섭의 방식으로 이렇게 하나둘 무너뜨리려 하고있어.이제 촛불의 광장은 3라운드로접어들고 있다. 벌써수 년 전부터 틈새를 찾아, 계속해서 자기 부정을 멈추지 않고, 운동을새롭게 구성해가고자 하는길바닥에서 만나온, 진보넷 블로그로 소통을 하는,인권에 상상력을 불어넣어온이들의가난한 실천들이어떻게든 시민들의 촛불과 만나 즐거운 반란으로 나아갈 수 있기를, 그저고대할 뿐이다.
명태 / 강산에
일요일
일요일, 밤 사이 비가 내리기는 했지만 날은 다시 뜨거웠고 돌다리 아래부터 따라 올라오는 사이 골짜기에는 벌써부터 놀러와 물놀이를 하는 사람들이 많다. 일요일은 속초 도서관이 문을 닫는다 해서 양양 도서관을 알아보니 거기는 월요일마다 문을 닫는다 해. 문닫는 날이 엇갈려 있어 다행이었다. 책을 보는데 눈에 잘 들어오지가 않았다. 며칠 잠을 잘 못 자 그랬는지 이상하게 몸에 기운이 달렸고, 초저녁 잠을 자고 일어나니 어느 새 시커매져 있었다. 만만하게, 아무나랑 같이 언쟁도 벌여가며, 가릴 것 없이 털어놓아가며, 가까운 바닷가에라도 나가 술이라도 마셨으면 하는 생각이 불쑥 들면서 그 때부터 괜히 마음이 싱숭생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