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
- 기범이와 현선이에게
조용명
결혼은 놀라운 것이다.
서로 다른 우주가
항거할 수 없는 힘에 이끌려
충돌하고 폭발한다.
해일보다 더한 폭발은
그동안 가치있다 여겼던
저만의 사상을 쓸어간다.
한줌 자존심도 남기지 않는다.
자비 같은 건 없다.
그동안 알뜰히 가꿔왔던
아름다운 꽃들 가득한 정원
높고 튼튼했던 울타리
모두 황폐한 사막처럼 만든다.
아, 그런 것은 우스운 것이다.
날마다 쌓아도
날마다 무너지는 울타리.
날마다 무너지는 사상.
폭력처럼 밀려드는
무서운 사랑은
우리 가슴을 헐벗게 만든다.
그리고 황량한 벌판에
날마다 물주지 앟아도
마구 자라는
제멋대로 생긴 꽃과 풀.
조금씩 조금씩
그래서 모든 걸 포기했을 때
새로운 질서가
시작되고 있음을 안다.
결혼이란 고통스러운 것이다.
새로운 세상이 열리는 창조란
대폭발만큼 위험한 일이다.
혼례식 전 날, 남산유스호스텔에 글과그림 식구들이 모였을 때, 조용명 선생님이 쓰신 축시가 있다고, 최교진 선생님 낭독으로 들었던 시. 낭독이 끝나고 박재동 선생님이 이 시를 듣고 감상을 얘기해보라 하시는데, 나는 벌벌벌 떨며 일어나 우물쭈물 하기만 했다. 무어라 말을 해야 할지 몰라,시를 들으니 겁이 난다고, 우주니 폭발이니황폐, 창조, 잘 생각지도 않는 그런 말들이 나오니 이거 뭔가무섭고 겁이 난다고, 아, 왜 이렇게 어렵게 쓰셨냐고, 저 같은 애도 알아듣게 쉽게 써주시잖구…… 하면서 얼버무리기만 했는데.
이제 다시 가만히 읽어보니참 예쁘다.그날은 사실 낭독을 들을 때 가슴이 쿵쾅거려 제대로 듣지를 못했고, 일어나 느낌을 얘기해보라 하니 두 배로 더 쿵쾅거려 머릿속이 하얗기만 했더랬다. 그런데 지금 글을 열어놓고 읽는데,여러 번을 다시 읽을수록시가 참 예쁘다. 특히 그 가운데에서도 다섯째 연을 읽을 때는 숲이 새로 열리고 펼쳐지는 것처럼, 언 들판에서 파란 것들이 하나둘 피어나는 요즘 들판을 보는 것처럼, 제멋대로의 연둣빛들이 환하게 열리는 것처럼 좋아. 내가 곡을 붙일 줄 안다면은 그 다섯째 연을 그대로 따다 아주 곱고 아름다운 노래를 만들 수 있을 것만 같아.
그리고 황량한 벌판에 / 날마다 물주지 않아도 마구 자라는 / 제멋대로 생긴 꽃과 풀 / 조금씩 조금씩 / 그래서 모든 걸 포기했을 때 / 새로운 질서가 시작되고 있음을 ♪
아, 자꾸만 자꾸만 되뇌이게 되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