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수업 / 8월 17일




다시 밤도깨비, 올빼미로 돌아갔다. 며칠을 새벽 늦도록 연습을 하고 돌아가 버릇이 되니 날이 밝을 때는 도무지 맥을 추지 못한다. 안되겠다 싶어 점심을 먹고 누운 것이 세 시 반 일과를 다 마칠 때까지 잠이 들어버렸다. 해 저물녘이 되어 자다 일어나 다시 실습장으로 들어가니 친구들이 그런다. 그러니까 왜 밤을 새워 그걸 하고는 낮에는 맥 없이 떨어지냐고, 괜히 밤에 한다 개기지 말고 수업 시간에나 열심히 하라고. 하긴 그 말이 맞다. 내 모습이 꼭 중고딩들 밤에 공부한답시고 독서실에서 밤 새우고는 다음 날 학교에 가 엎드려 잠만 자는 그것과 다를 게 하나 없네. 공부 못하는 애들이 꼭 그런다더니, 내가 그 꼴이다.


아직 도면 그리기가 완벽하게 되지는 않았지만 도면만 붙잡고 있어서는 안 되겠다 싶어 오늘은 하나하나 더듬어가면서라도 나무를 깎아 부재를 만들어 조립하는 걸 해 봐야겠다는 생각이었다. 그래서 어제 깨끗이 그려 놓고 온 6번 도면을 펼치고 먹선 놓는 것부터 해야겠다 했는데 아무 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혼자 힘으로는 도무지 할 수 없는 일, 그래서 김 교수님을 불러 한 번만 더 가르쳐 달라 했다. 교수님이 내 자리로 와 도면 위에 나무를 대가면서 솔직히 말해 나는 설명을 들어도 답답하기만 했다. 내가 이해하는 속도보다 설명해 시범을 보이는 속도가 너무 빨라. 그 설명을 들으니 곧 점심 시간이었고, 밥을 먹고는 두 시간이나 자고 일어났다. 다시 실습장으로 가, 그 다음부터는 잘하는 동기(같은 방 동생, 우리 학교 막내)에게 물어가며 먹선 놓는 것부터 배웠다. 아까 교수님 설명을 잘 알아듣지 못했다고는 했지만 그래도 흐릿하게나마 남는 기억은 있어, 그 기억 위에서 동생이 한 번 더 가르쳐 주니 어느 정도 알 것 같았다. 대충 길이에 맞게 깎은 나무의 세로면은 평면도의 그림을 그대로 따라, 그런 다음 옆면에 선을 놓는 것은 먹선의 차례를 잘 살펴가며 그대로 대응시키면 되는 일, 결구 부분 따낼 때는 아랫면에 그려지는 삼각형을 보면 되는 것…… 아하, 그제야 비로소 어느 정도 부재와 그것을 조립했을 때 모양이 머리에 들어오는 것 같았다.


점심 밥을 먹고 누워 잔 것이 잠이 모자라여서기도 하지만 실은 걱정이 되고 마음이 답답해 일부러 눈을 감아버린 것인지도 모른다. 도면 그리기가 얼마 정도 되고 났을 때 이제 큰 고비 하나는 넘었다 싶었는데 막상 나무를 잘라 도면 위에 얹고 보니 그렇지가 않아. 나무에 먹선을 놓는 일은 도면을 그리는 것만큼이나 갑갑하게 느껴졌다. 게다가 이미 나무를 깎고 조립해 완성품을 만달어본 분들 얘기를 들으니 도면이나 먹선 놓기는 일도 아니라 하네, 빗각으로 들어가는 톱질을 제대로 하는 게 제일 어렵다면서. 어휴, 이건 완전히 산 넘어 산이구나, 그 머리 아픈 도면만 끝내 놓으면 어느 정도 수월히 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야.


몇 시간이나 걸렸는지 모른다. 다시 저녁이 되어 해가 저물었고, 곧 둘레가 캄캄어둠 밤이 되었다. 나는 이제 겨우 나무 자른 것에 먹선을 놓은 정도. 오늘은 어떤 일이 있어도 부재마다 톱질 끌질을 다 해 조립까지 마쳐야겠다 생각하고 있었기에 아무리 시간이 늦어도 작업장으로 가 다 만들어 보고 싶었다. 그런데 그 때까지 작업장에서 깎고, 자르고, 못을 쳐 만들던 사람들이 하나 둘 공구를 챙겨 나오더니 모기가 너무 많아 도무지 일을 할 수가 없다는 거다. 그래도 나는 새벽까지 혼자라도 가서 해 보겠다 하니 모기들 때문에 그건 안 된대. 그러면 어떻게 하지? 강의실에서라도 작업을 하고 싶다고 교수님께 억지로 허락을 얻었다. 톱밥이나 대팻밥, 나무 조각 같은 것은 나가면서 다 치울 거라 약속을 하고.


6번 도면을 다 만들지는 못했다. 부재들에 먹선을 놓고 자를 부분에 표시까지 해 놓고 나서 암수 장부로 끼워 맞출 도리와 추녀까지만.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얼마나 긴 시간이 지났는지 모른다. 옆 방 동기에게 부탁해 작업장에 있는 바이스(깎거나 자를 것을 단단히 물어주는 기구)를 떼어다 강의실 책상에 옮겨 놓았고, 그 때부터는 강의실에서 혼자 톱질에 끌질, 대패질을 시작했다. 아니, 혼자는 아니었지. 내가 잘 못한다고, 하는 걸 도와준다고 옆에서 지켜봐준 동기 분들이 적을 때는 하나 많을 때는 너댓 명씩 함께 했으니까. 어쨌든 빈 강의실에서 밤늦도록 그렇게 톱질을 했다.


아, 고마워라. 내가 처음 도면 위로 나무를 놓고 먹선을 놓을 때부터 하나하나 차분히 가르쳐 주던 같은 방 막내 종성이, 피곤해 눈이 시뻘개져서도 강의실 불 끄고 나올 때까지 내가 하는 걸 봐주면서 가르쳐 주던 범석 씨, 그리고 나름으로 터득해 이해하기 쉬운 방법과 요점을 짚어주던 지웅이 형…… 밤늦은 강의실에서 나는 이들을 각각 오교수님, 정교수님, 팽교수님 하고 부르며 모르는 것을 하나 하나 배웠다.


나무를 바이스에 물리는 방법부터 톱을 처음 댈 때 하는 요령, 톱질이 어긋났을 때 다시 바로 잡는 방법에 설령 톱질이 잘못되더라도 그것을 교정할 수 있는 방법까지. 누가 농삼아 말한 것처럼 과외 선생이 셋이나 붙어 도와준 것이었다. 정말로 고마워, 그 분들 설명을 듣고 배워 따라 하다가도 문득문득 그 강의실 풍경이 너무나도 눈물겨워 뭉클해지곤 했다. (그런 감상에 젖을 때면 여지 없이 “박 작가, 설명 안 듣고 뭐 해? 똑바로 보라고!” 하는 소리에 정신을 바로 차리기도 했고.) 그 세 사람만이 아니었다. 강의실 저 쪽 책상에서 도면을 그리던 환곤이 형도, 지나가다 불켜진 강의실에 들른 작업반장님도, 명일이, 보라, 재영이 형…… 아이고, 부진아 하나 가능사 시험 합격 시키려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곁에 붙어서서, 오며가며 챙겨줬는지 모른다.


졸업식이 있는 월요일을 빼고는 정식 교육 일로는 마지막 날, 다들 시험 준비로 바쁘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자신이 있거나, 낮 동안 열심히 한 분들이거나, 아님 졸업 뒤 일주일 연습 계획을 가진 분들은 어느 정도 여유가 있어 삼삼오오 술자리를 갖곤 했다. 왜 그런 자리에 아니 가고 싶겠어, 게다가 술자리로 오라고 몇 번이나 찾아와 부르기도 하지, 주머니 안 전화기가 울려대지, 참느라 무진장 힘이 들었다. 연습할 시간이 없어 이렇게 밤늦게까지 하지 않으면 아주 시험을 못 볼 것 같아 그렇기도 했지만, 그 늦은 시간까지 옆에 붙어 서서 하나 하나 가르쳐 주는 ‘교수님’들을 생각하면 도저히 술 먹으러 가고 싶다는 말을 할 수가 없기도 했다.




Good Bye / Naomi & Goro


내일, 토요일에도 시험 준비 교육이 있기는 하지만 정규 교육과정으로는 모든 시간이 다 끝났다. 몇몇 분들은 벌써 숙소 짐을 빼 짐으로 싣고 갔고, 하나 둘 짐을 챙기는 모습들이 보이고 했다. 나도 이제는 짐을 싸야 할 때. 마지막 일주일은 기능사 시험 준비를 하느라 요 며칠 이 교수님을 못 뵌 것 같은데, 나무를 자르러 치목장에 갔다가 여전히 그 자리에 앉아 계신 교수님을 뵈었다. 가까이 다가오시더니 "한 번 깎아 봤어?" 하고 말을 붙이시는데교수님 손이라도 한 번 잡아 보고 싶어,이제는 떨려 먹금이 잘 놓아지지 않는다던 그 손.전기대패, 홈대패, 엔진톱이 돌아가지 않는 치목장은 사람들이 많아도 낯설만큼 조용했다.시험 준비 때문에 어쩔 수 없는 형편이기는 하지만 아쉬움은 여전히 남아. 그래도 여섯 달 함께 배워 일하며 지낸 사람들과 약속한 날들이 다 된 것인데 함께 마음을 푸는 시간이라도 가졌으면. 학예회 같은 것도 좋고, 장기자랑도 좋고, 종강 파티가 되었건졸업잔치가 되었건, 책거리를 대신해 대패거리, 끌거리 같은 거라도 좋고, 교수님들 모시고 하는 사은회를 하거나 아님 학교 앞 골짜기로 나가 천렵에 모닥불을 피우고 놀아도 좋겠고……. 밤 열두 시가 다 되어 내가 나무 깎는 것을 도와주던 동기 한 분과 함께 삼척 시내로 나갔다 왔다. 나 혼자 하는 것 같으면야 아직 하던 일을 정리하기 이른 시간이었지만 옆에서 봐주던 친구가 너무 피곤해 보여. 나야 더 하고 싶었지만 그렇게 하는 게 꼭 그 친구를 못 자게 붙잡는 것만 같아 그만 강의실을 정리할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는 그 친구와 같이 나가 곱창순대에 소주 한 병. “기범이 형, 내가 형 처음 봤을 때 어땠는 줄 알어?”로 시작해 꼬리를 물고 이어지던 얘기들. “형, 아마 졸업하고 나면 내가 갈구는 게 그리워질 거야.” 맞아, 그리워질 거다.그 앞의 친구뿐 아니라 모두들, 형님들, 친구들, 동생들, 그리고 교수님이랑, 활기리 목수학교의 구석구석 정든 곳들.


휴우, 다 했다.

Posted by 냉이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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