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것도

냉이로그 2010. 9. 1. 22:21

인터넷은 멀리해야겠다 하면서도, 아무래도 동영상 강의를 듣는 일이 있으니 짬짬이 바끼통에 들어가 프랭스가 모아놓은 기사들을 읽는다. 비전투병력 오만 명이 아직 남아 있기는 하지만, 그리고 이미 휘저을 대로 휘저어놓고, 주무를대로 주물러대기는 했지만, 어쨌든 형식적으로나마 이라크 내에 있는 미국의 점령 병력은 모두 그 땅을 떠났다. 이천삼년 삼월, 그리고 이천십년 구월. 길고도 긴 칠년 반의 시간이었다.

글쎄, 그러한 사실들에 대한 보도 말고는 아직 어떠한 논평이나 전망을 다룬 기사를 보지는 못했다. 이미 너무 먼 얘기가 됐기 때문일까, 다들 잊었기 때문일까. 아니, 누구도 쉽게 그 어떤 말을 꺼내기 어렵기 때문인지 모른다. 수만 번은 외쳤던 구호이다. 점령군은 떠나라. 또한 수만 번은 외친 구호였다. 자이툰은 돌아와라. 물론 자이툰은 그보다 일찍 이천팔년 말에 돌아왔다. 그랬으니, 다 된 것인가, 그렇담 손뼉이라도 쳐야 할 일인가. 아니, 아무 것도 되돌린 것은 없다. 기쁨은커녕 자그마한 안도의 숨조차 나오지가 않는다. 이미 돌아왔는데, 왜, 이제는 다 돌아간다는데, 왜…….

아니, 아르빌에서 돌아온 태극마크의 병력은 지역만 달리해 지금은 파르완주에 가 있을 뿐이다. 바그다드에서 병력 이동을 하는 제국의 기갑여단은 카불을 향해 전차를 움직이고 있을 뿐이다.이라크종전 약속을 하고 평화의 수호자이기라도한 양 노벨평화상까지 받은 블랙 부씨는 애초부터 아프간전의 확대를 준비하고 있었다. 진창에 빠진 이라크 전에서는 발을빼겠다 하지만, 그건 그가전쟁으로 죽어가는 무고한 목숨을 안타까이 여겼기 때문은 아니다.더는 빨아먹을 것도 없는 그 진창에서 빠져나와아직 단물이 충분히 남아 있는 곳으로 빨대를 꼽겠다는 것. 태극마크의'자이툰'은 돌아왔으나 이제는 '오쉬노'라는 이름으로 부대명을 바꾸어 또다른 피비린내의 침략지에서 그 깃발을 흔들고 있다.

사실 내게는 아르빌과 파르완주가 크게 다르지 않다. 바그다드에서의 그 순간들이 있지 않았다면 그곳과 카불 역시 그러할 것이다.팔레스타인의 가자와 레바논의 베이루트가 다르지 않듯, 그곳이어떤 국가 정부를 가졌는가는 큰 의미가 없다. 솔직히아무설명 없이 사진으로만보게 된다면거기가 바그다드인지, 카불인지, 가자인지 나로서는 가려낼 수 없기도 할 테고 말이다.이라크에서 미군의 마지막 전투여단이 철수하고 있다는 기사를 봄과 동시에 아프간에서 미군 병사가 장난으로 민간인을 죽였다는 기사를 보았다. 어디가 이라크이고, 어디가 아프간인가. 무엇이 끝난 것이고, 무엇이 계속되는 것인가.

칠년 반을 끌어온 이라크 전의 종식, 어쨌거나 형식적 그 점령의 종식을 보면서 하나도 기뻐할 수 없는 까닭은 그 때문이다.

[한겨레신문]아프간 미군 장난삼아 민간인 살해 ‘충격’, 2010.8.26

[한겨레신문]이라크 주둔 미군 ‘마지막 전투여단’ 철수, 2010.08.19.

[한겨레신문]이라크엔 ‘혼란’ 미국엔 ‘상처’만 남긴 7년, 2010.08.03.

[한겨레신문] 굿바이, 바그다드, 2010.07,27.

[한겨레신문]아프간 향하는 군인…재파병 반대 시민단체, 2010.06.30.

[한겨레신문]잘못된 파병, 다시는 없어야, 2008.12.19.

그런 얘기를 한 것도 거의 그 만큼의 시간은 된 것 같다. 바끼통 모임을 하면서 그걸 언제까지 할 것인지, 한시적 모임이라면 그 기한이 언제가 될는지. 아마 그 때는 내가 먼저 그 모임에 부담을 느껴 빨리 정리했으면 하는 마음에, 그런 얘기를 꺼낸 것 같아. 이라크 현지 활동을 위해 임시로 꾸려진 모임 정도로 보고자 하기도 했었고, 적당한 시기에 매듭을 짓는 게 좋지 않을까 하는, 저마다 자신의 공간들, 일상에서 이어나가는 것으로 하자는 말 따위를 뒤에다 붙이면서 말이다. 아마 당시 나는 무척이나 지쳤고, 두려웠고, 무거웠고, 그 어떠한 자타의 규정으로부터도 달아나고 싶기만 했다. 그러나 당시 함께 의논을 하던 이들은 그와 다른 생각으로 좀 더 본질로, 길게, 비겁하지 않은 방식으로 모임을 이어가는 쪽의 의견이 더 많았다. 그러면서도, 그렇다면 언제를 그 시점으로 보는 것이 좋겠느냐고 할 때 여러 의견이 있었지만, 이라크에서 한국군 완전 철수를 그 시점으로 잡았던 듯하다. (그 말에도 나는 혀를 내둘렀더랬다. 당시만 해도 나는 그만 접자는 입장이었는데, 도무지 그게 언제가 될지 까마득하기만 한 것 같았으니 말이다.)

자이툰과 다이만은 이미 돌아온지 두 해 가까이가 되어간다. 그리고 이제는 그곳의 미군 병력까지 모두 빠지고 있다.그러한 기사를 보면서 문득 그 때 얘기들이 다시 떠오른다. 글쎄, 아직 바끼통에서는 이와 관련하여 아무런 이야기가 없지만,얘기를 하게 된다면뭐라고들 얘기를 할까……이라크에서의 철군이, 점령군 철수가 이뤄진 것은 맞는데, 이라크 전쟁에 반대하는 모임이 더 이상 어떤 의미를 가질까? 그런데왜 이렇게 아무 것도 이뤄진 것 같지가 않을까.마지막 전투여단의 철수를 알리는 기사를 보면서도 왜 이렇게 아무런 감흥이 일지를 않을까.그 자체로는 아무런결정적 계기도 되지 못하는 것만 같은.

미군의 병력 철수에 대한 기사들이 줄줄이 있는 사이사이로 그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총격과 폭탄 테러에 대한 기사들은 또한 여전하다. 무엇이 나갔다는 말인가, 어디로 나갔다는 말인가.

살람 아저씨에게는 답장이 오지 않고 있다. 설마 하면서 그런 생각은 말아야지 하지만, 혹여나 너무 늦은 편지를 보낸 건 아니었을까 싶어 팔뚝에 소름이 돋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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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냉이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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