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강

냉이로그 2010. 9. 15. 07:51

아이에게 보내주려다 내가 먼저 다 읽어버렸다. 글쎄, 녀석이 좋아할지는 모르겠는데, 딱 녀석의 이야기일 것만 같고, 고 나이 때 내 얘기들이기도 했다. 이 시집이 나왔다는 건 언제더라 고냉이 까페에서 아니 언니가 몇 편 올려 소개한 걸 본 거였는데, 고 몇 편을 보면서도 히야, 이것봐라, 싶었던 거였다. 그러나 뭐 올 해는 그 아무 것에도 마음을 띄울 여유를 갖지 못했으니, 나중에 꼭, 하면서 그저 마음 속에다가만 찜해 두고 있던 거였다.

동시도 아니고 청소년시라는 이름을 달고 나온 시집이라 했다. 청소년시라면아이들이 쓴 어린이시와나란한 개념으로중고등학생 나이 또래 아이들이 쓴 시들, 로만 알았고, '어린이시'와는또 다르게딱 그 나이 때의 감정이나 현실에 대한 실감으로 감동을 느낀 적이더러 있었더랬다. 멀게는오래전 이상석 선생님이 엮은 <<여울에서 바다로>>부터 하여가까이는 구자행 선생님을 비롯 글쓰기회 선생님들이엮은 요즘아이들의 그것들까지. 아, 요번에 <<동시마중>> 3호에 보니 거기에 실린 충주의 중고등학교 아이들이 쓴 시들도 꽤나 좋더라.

아, 그런데 박성우라는착한 이름을 가진 시인이 '시집'도 아니고 '동시집'도 아닌, '청소년시집'이라는 이름으로 시를 묶어낸 거였다.그 나이 때 아이들이 썼다고 하여 청소년시가 아니라그 나이 때 아이들보라고 시인이 쓴 청소년시. 일단 제목은 기가 막히다. <<난 빨강>>. 만약 빨강이 아니라초록이거나 푸름그 따위 빛깔을 말했더라면 보나마나 뻔해(니가 더 뻔해 ♪),얼마나 틀에 박힌 교과서 같은 냄새가 났을까. 물론 그 시집 안에는 <아직은 연두>라는시가 있기는 하지만, 솔직히 나는 그 시는 별로. 그건 이미 너무나도 상투적인 청소년기에 대한비유이거나 상징. 무릇 청소년 시기라면 무수한 금기와 경계들 사이에서 불안한 줄타기를 해야 그것이 온전한 것이라 할만 하지 않겠나. 맨날 엄마, 엄마만 찾던 어린 애들이 머리가 굵어지면서, 그렇게 반어른이 되어가면서 시민으로 교육받고(교육이라는 이름으로강요받고), 사회화 되어가는 그 과정에서,그 모든 약속과 금기들은 한 번도 나 스스로 합의하거나 약속한 것이 아니질 않았던가 말이다. 그런데 어른들은 그걸 지켜야 하는 거래, 원래 지켜야 하는 거래, 질문은 용납되지 않아, 학교는 왜 다녀야 되는데요, 나도 그냥 학교 안 다니고 지금부터 알바하면서 돈벌고 살래요,규칙은 누가 만드는 건데요, 왜 그걸 따라야 하는데요 나는 한 번도그거에 동의한 적 없는데,그러자고 약속한 적없는데, 자기들이 다 만들어논 거면서, 왜 나더러 지키기를 강요해.

시집 제목도 잘 뽑았구나 싶었는데, 막상표제으로 삼은 그 시는 제목만큼 좋지는 못했다. 제목은 빨강이로되 시는 여전히말랑말랑한 연두이거나 노랑. 그러나 좋았던 것들이 더 많았다.여기에 베껴 쓴 이런 것들.이 말고도 좋았던 게 몇 편더 있었으니,한 권의 시집 안에서 이렇게나 여러 편을 꼽을 수 있다는 건 여간괜찮은 게 아니고서는 어려운 일일 거다. 녀석도 흥미로워하며 읽게 되려나 모르겠네.

공원 담배

공원에 모여 담배를 피웠다 우리가 담배를 피웠다기보다는 담배가 우리를 피어오르게 했다 침을 찍찍 뱉어야만 할 것 같았고 수시로 어깨와 팔을 건들건들, 짝다리를 짚어야만 할 것 같았다 뻐끔 담배를 피우는 건 유치한 일이야, 연기를 목 깊이 빨아들이다 보면 몸이 어질어질해왔다 데이트하러 온 연인들도 슬슬 밤 공원을 뜨고 뜸하게 오가던 발길도 끊기면 담배를 피우는 일도 덩달아 시큰둥해져왔다 누군가 불쑥 시비라도 걸어오면 재밌겠지 그치? 우리는 침을 퉤퉤 뱉으며 담배를 비벼 껐다 어쩔 때는 엉뚱하게도 우리끼리 시비가 붙어 주먹다짐 직전까지 가기도 했지만 곧 싱겁게 헤어졌다 알짱알짱 시시껄렁하게 담배를 피우는 일도 점점 싱거워져갔다

너도 이러지? 하고 말하고 싶은 거. 응, 삼촌도 그랬어, 그러면서.

신나는 가출

쉬는 시간마다 가출 계획을 짰다

가출 계획서를 작성하기에는

야간 자율학습 시간은 너무도 짧았다

뭔가 특별한 일들이

뭔가 특별한 시간들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것만 같아서

우리 셋은 수업 시간조차 즐거워했다

판서는 물론 선생님의 설명도

놓치지 않고 노트에 옮겨 적었고

짝꿍이 말을 걸어와도 떠들지 않았다

선생님의 질문에 대답도 곧잘 했고

시키지 않은 예습 복습도 열심이었다

이제 곧 떠날 거니까

학교에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거니까

어쩌며 이 모든 것들은 추억이 될 테니까,

기꺼이 기쁜 마음으로 받아들였다

우리 셋은 각자 저금통을 털기로 했다

동수는 손바닥 위에 통장을 탁탁 치며

어깨를 으쓱해하기도 했다

가출을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우리가 튀기로 한 부산, 해운대의 갈매기 소리가

끼룩끼룩 들려올 것만 같았다

남녘 바다 냄새를 들이켜기 위해

우리는 눈을 지긋 감고 코를 벌름거렸던가,

드디어 일주일 앞으로 가출일이 다가왔다

그렇지만 우리는 아무 일 없는 듯

이 학년 일 학기 중간고사에 매달렸다

그러곤 아무도 가출에 대해 얘기하지 않았다

시험을 다 치른 우리는

학교 근처 중화요리 집으로 달려갔다

면발을 빠는 서로의 뒤통수를

손바닥 얼얼하게 때리면서 해죽해죽,

자장면 곱빼기 한 그릇씩을 말끔히 비웠다

나는 두 가지였던 거 같아. 정말 집이 미치게 싫어서 나가버리고 싶어 그런 거랑 그냥 친구들 사이에서 폼 좀 잡아보려고 가출이라는 거 해보는 거. 뭐 그런 거 있잖어. 나는 너네랑 달라, 찌질하게 맨날 학교, 집, 학교 집, 그거 아니면 큰일나는 줄 알고 그러는. 나는 이런 것도 한다, 이런 거였달까. 글쎄, 뭐래도 좋아. 만약에 그걸 하게 되거들랑 삼촌한테 와. 찾아오는 거 가르쳐줬잖아. 강릉까지 버스타고 내려와서 거기서 기차타고 영월역까지 오면 된다고.

보름달

엄마, 사다리를 내려줘

내가 빠진 우물은 너무 깊은 우물이야

차고 깜깜한 이 우물 밖 세상으로 나가고 싶어

이 시집 가운데 삼촌이 가장 좋았던 거. 그 때, 내가 너만했을 때 도무지 나갈 수 없는 우물 속에 갇혀 있는 것만 같던 그 때. 나도 그렇게 엄마를 부르곤 했어.

버스

학교에 갈 때마다

버스를 같이 타는 누나는 예쁘다

다리는 날씬하고 가슴은 빵빵하다

그 여고생 누나 옆에 가서 서면

상큼하고 야릇한 냄새가 난다

비누 냄새인지 샴푸 냄새인지,

눈을 살짝 감고 그 냄새 맡다가

학교를 두 정거장이나 더 지나친 적도 있다

버스정류장으로 나오는 누나만 봐도

가슴은 쿵쾅쿵쾅 뛰고 머릿속은

영어 숙어 하나 기억해낼 수 없을 만큼 깜깜해진다

한번은 밀린 버스에서 급히 내리다가

누나의 봉긋한 가슴을

팔꿈치로 툭, 부딪친 적이 있다

말랑말랑한 것 같기도 하고

좀 딱딱한 것 같기도 했는데

앞이 캄캄하고 어질어질하게 좋았다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닌데

며칠 동안은 누나를 볼 때마다

고개를 딴 쪽으로 돌려야 했다

누나 생각을 하다 보면 무심코

팔꿈치를 만져보는 새 버릇도 생겼다

오늘은 작정하고 용기를 내어

버스를 기다리는 누나한테 말을 걸었다

기껏해야 두 학년 차이니까

누나의 가슴을 만졌으니 책임져야 하니까

만일, 쥐방울만 한 게 까분다고 혼내면

그냥 한 대 쥐어 터지면 그만이니까 더욱 용기를 냈다

저어 누나 좋아하는데요,

하필이면 그때 딱 맞춰

버스가 정류장으로 막 들어오고 있었다

머리만 긁적긁적 얼굴이 일순간 일그러지는데

누나는 나부터 버스에 타라며 내 등을 밀어주었다

재미있지? 아니긴 뭘 아니야. 삼촌은 아직도 이러는데.

대체 왜 그러세요

쉬는 날 아침에 머리 좀 빗으면

- 넌, 아침부터 머리만 빗냐?

쉬는 날 오후에 머리 좀 빗으면

- 넌, 대낮에 그렇게 할 일이 없냐?

쉬는 날 저녁에 머리 좀 빗으면

- 넌, 오밤중에 무슨 머리를 빗냐?

이 장면도 어디서 많이 본 거 같으네. 니가 그랬다는 게 아니라. ㅎ

좀 놔둬요

성적이 이게 뭐냐?

- 뭐가 어때서요

복장이 이게 뭐냐?

- 뭐가 어때서요

지금 태도가 뭐냐?

- 뭐가 어때서요

뭐가 어때서요는 뭐냐?

- 뭐가 어때서요

나가!

아우, 정말. ㅎ

신나는 악몽

기말고사 보려고 학교에 갔는데

고릴라가 교실을 비스킷처럼 끊어 먹고 있다

고릴라 곁에 있던 염소가

기말고사 시험지를 깡그리 먹어치우고 있다

운동장에서는 능구렁이가

선생님들을 능글능글 가로막고 하품 중이다

쩔쩔매던 우리들은 어쩔 수 없이

삼삼오오 모여 실컷 놀다가 집으로 간다

요거 재미있다. 그거 그림책 <<지각대장 존>>에 나오는 존 어쩌구저쩌구 이름 길던 애 학교가는 길 얘기 같다. 생각나지, 그 그림책.

한 마리 곰이 되어

한 마리 곰이 되어 겨울잠에 들고 싶어 으음 나흘만 더 잘게요, 잠꼬대도 해대면서 코를 드르렁드르렁 지치도록 자고 싶어 음냐 음냐, 달콤한 꿈을 꾸는 동안 함박눈은 펑펑 내려 동굴 입구까지 쌓이겠지 정말이지 한 마리 곰이 되어 겨울잠에 들고 싶어 알람 시계 따위는 동굴에 가져가지 않을 거야 아침 잔소리도 절대 들어오지 못하게 할 거야 알람 소리도 잔소리도 없는 깊은 동굴에 들어 잠만 잘 거야 아무도 찾아올 수 없는 깊은 산속 동굴에 들어 곰곰 생각하지 않는 미려한 곰이 도어 실컷 잠만 잘 거야 자다가 자다가 지치면 기지개를 켤 거야 내가 쭈욱쭉 기지개를 켜며 울면 골짜기가 쩌렁쩌렁 울리겠지 푸릇푸릇한 봄이 성큼 와 있겠지

나두, 나두! 길고 긴 겨울잠이 필요.

몸부림

나의 지독한 몸부림이 누군가의 눈에는 그저 아름다운 풍경으로 비춰질 때가 있다 가령

물고기가 튈 땓, 해 질 무렵 물고기가 튀어 오르는 것은 붉고 고요한 풍경에 격정적인 아름다움을 더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그것은 비늘 안쪽으로 파고드는 기생충을 털어내기 위한 물고기의 필사적인 몸부림이다 농부가 해 지는 들판에서 땅에게 허리를 깊게 숙이는 것 또한 마찬가지, 농부는 엄숙하고도 가장 서정적인 아름다움을 더하기 위해 풍경으로 남아 있는 것이 아니다

깜깜한 어둠 속에서도 앞다투어 빛나는 학교와 도서관과 공부방 또한 마찬가지

요건 다시 읽어보니까 별로인 것도 같으네. 뭔가를가르치려는 것도 같고.그런데 아까 처음 읽었을 때는 어떤 거에 그랬는지, 좋았더랬거든. 글쎄, 몸부림 중이라 그런가, 그래서인가 보다. 누구긴 누구야, 임마. 내가 지금 그렇다니까.

심부름

누나는 고 삼이다

반에서 일이 등 하는 고 삼이다

그런 누나가 뜬금없이

만두가 먹고 싶다고 해서,

뒤에서 오 등 정도 하는 내가

밤늦게 만두 심부름을 갔다

너무 늦어서 이 골목 저 골목

문 닫지 않은 만두 집을 찾아 헤매다가

큰 사거리 근처까지 나가서 겨우 샀다

만두가 식을까 봐 뛰어서 집으로 갔다

심부름 가서 딴짓하다 늦게 왔다고

엄마한테 잔소리를 잔뜩 들었다

난 뒤에서 오등이니까,

말대꾸할 힘도 없어서 그냥 잤다

아, 존나 억울. 이런 기분 있잖아, 어른 되어서도 이럴 때 많다. 엄마한테서가 아니라 사람들 속에 있다가 보면 이럴 때가 많아. 정말 나빠.

I'm Yours / Jason Mraz

(아, 이 노래.전에 어떤 고등학생 같은 아이가 부르는 걸로 처음 들었더랬다. 일요일 강의를 들으러 올라갔다가, 마침 학교 환경반 아이들 데리고 서울에 올라와 있던 이동철을 만나 홍대 앞 놀이터에 맥주 한 깡씩을 들고 잠깐 들렀을 때, 거기에서한 떼의 아이들이 옹기종기 노래를 하고 연주를 하던 한 귀퉁이 거리 공연. 한참을 좀시끌벅적 까불며 노래를 하다가는 한 아이가 맨 마지막곡이라며 사뭇 진지하게 이 노래를 불렀는데, 노래를 다 부르고 자리를 뜨면서 한 말이 아주 인상에 남았다. 손뼉치는 사람들에게 마치 화답이라도 하듯 두 팔을 들어 올리면서 "음악은 공평합니다, 음악은 공평합니다"를 몇 번이고 거푸 말하는데, 공평이라는 그 말. 평등이 아니라 공평. 아, 그러고보면 나는 어느새 공평이라는 말보다 평등이라는 말에 더 익숙해 있었구나. 어렸을 때는 뭘 해도 공평하게 하자, 공평하게 나누자 그러면서 공평이란 말을 썼지, 그런 자리에서 어디 평등이라는 말을 썼나. 애들끼리 놀다가 "야, 우리 평등하게 해" 라는 말, 지금 하려 해도 살짝 어색하기가 여전하니. 그럴 땐 공평이라 해야 제격이지. 아무튼 그 때 놀이터에서 공연하던 그 아이들이 문득 생각나네. 공평합니다, 공평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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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냉이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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