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뚜라미와 2

냉이로그 2015. 9. 5. 00:56

 

 

1. 귀뚜라미와 함께 보낸 밤

 

 

 귀뚜라미에 실어온 형의 옥중 편지를 읽고 난 다음부터 꼬박 이틀이 걸렸나 보다. 그날 밤을 꼬박, 그리고 어제 하루는 카페를 보면서도 짬이 날 때마다 카운터 컴퓨터를 앞에 놓고. 그리고 지난 밤, 잠깐 눈을 붙이고 난 오늘 아침까지.

 

 아마도 박래군석방촉구 대책위 일을 맡아보고 있을 인권운동사랑방의 미류에게 다 쓴 글을 메일로 보내면서, 나는 많이도 망설였다. 아니, 망설임이었다기보다는 부끄러움이었을까. 이렇게밖에 쓰지를 못하는구나, 싶은. 그러고는 미류에게 보내는 메일에 '마음만큼 글이 따르지를 못해요' 라고 한 줄을 썼네. 변명이라도 하고 싶었을까. 글은 이렇게밖에 쓰지 못했지만, 마음만큼은 이보다 훨씬, 이라는 걸.

 

 그러나 그게 아니란 걸 깨닫는 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아.

 

 다시 생각해보니 그게 아닌지도 모르겠어요.

 마음만큼 글이 따르지 못하는 게 아니라,

 제가 사는 삶이 그 정도일 뿐이라 이렇게밖에 쓰지 못한다는 걸.

 

 아무래도 이렇게 고백을 하고말아야 했던.

 

 

 

2. 끝이 나지 않을 질문

 

  

 스물네 해가 되어온 형과의 인연. 넉 쪽밖에 되지 않는 쓰면서 그 긴 시간들을 거슬렀다. 래군, 래전 두 형들과 이어온 날들. 어느덧 나는 오래 전 캠퍼스의 민주계단에도 가 있었고, 형의 영정이 걸린 학생회실에도, 래전 형의 추모비가 선 학생회관 앞에도, 그리고 포도농사를 짓던 서신의 시골집에도. 그리고 광화문 네 거리와 청계광장, 평택 대추리며 용산 남일당 분향소, 세월호가 잠겨드는 지난 봄의 팽목.

 

 형이 지켜오던 자리들, 그리고 거기에서 여러 발짝 물러서 있던 내 자리.

 

 문득 지금 내가 서있는 자리는 어디인지, 발등을 내려다보며 오래된 질문이 따라 붙어 . 나는 지금 어디에 서 있는 걸까, 또다시 나 자신에게 물을 차례. 아마도 언제까지고 끝이 나지 않을 질문이겠지만.

 

 오늘 밤도 창 너머 마당 귤밭에는 풀벌레들이 쉼없이 울려대고 있어. 가만히 들어보면 참 다양한 소리들. 저마다의 음색과 저마다의 호흡. 들으면 들을수록 어느 것 하나도 같은 소리를 내는 게 없다는 걸.

 

 

 

3. 곁을 지킨 죄

 

 

 

곁을 지킨 죄

                     - 박래군이 돌아가야할 그 자리 

 

박기범(동화작가)

 

옥중 편지

 

 저도 귀뚜라미 소리에 이끌려 마당에 나가 한참을 서성였어요. 신문으로 본 래군 형의 옥중 편지를 읽고 하루종일 망망해진 마음. 구치소에 가두어진 몸, 그 꽉 막힌 공간에서 귀뚜라미에 눈길을 주고, 거미와 공간을 나누는 모습으로 시작하는 형의 편지. 그리고 꿈에 찾아왔다는 아버지의 모습.

 

 그러나 형의 편지는 자신의 처지를 연민하거나 감상에 젖은 그것이 아니었습니다. 세월호 참사 오백일을 앞두고 더욱 절실해진 진실규명의 의지와 사람존중의 소망, 여전히 저 깊디깊은 바다에 잠긴 채 짓이겨진 가슴을 위로받지 못하는 세월호 유가족들의 슬픔을 안타까워하는 헐벗은 마음이었습니다. 아픈 이들이 있으면 찾아가 손을 보듬고, 목이 메어 차마 소리치지도 못하는 이들을 대신해 누구보다 당당한 외침을 하던 형의 목소리가 감방 안 귀뚜라미 소리처럼 밤의 적막을 울리듯 고요하고 절절하게 들려와.

 

 그래서 아마 그랬던 모양입니다. 몇 번이고 거듭해서 읽은 형의 옥중 편지. 마당에서 울려대는 귀뚜라미 소리가 마치 형이 옥중에서 보내온 그 간절한 마음이기라도 한 양. 그 소리에 이끌려 바깥으로 나갔고, 저도 모르게 검은 하늘만을 망연히 올려다 보았습니다. 검은 하늘, 더 검은 바다 밑.

 

 

심해의 어둠

 

 저는 그 깊은 바닷속을 감히 상상하지 못합니다. 빛이 없고, 숨을 쉴 수 없는 곳. 그 엄청난 수압으로 꿈쩍조차 하기 힘든 물무덤 같을 그곳. 그 속으로 아이들이, 사람들이, 사랑하는 이들이, 살과 피를 나눈 이들이, 또다른 나일지 모르는 누군가가 한꺼번에 그 깊은 무덤 속에 잠겨들었습니다. 그 끔찍한 일이 벌어지고난 뒤, 해와 달이 기울고 차기를 오백 번도 더하고 있는 지금껏 끝내 우리가 알 수 있는 진실이란 고작 그 사실 하나 밖에 없습니다. 그 말고는 모든 것이 미궁 속. 살려달라고 소리치는 그 어린 눈망울들을 왜 외면해야 했는지, 배가 기울어 가라앉는 짧지 않은 시간동안 왜 보고있어야만 했는지, 아직 살아있었을 그 귀한 목숨들을 왜 그대로 내버려 두었는지.

 

 누군가의 말처럼 세월호의 침몰은 우리 사회의 침몰이었고, 그날 뒤로 온 나라는 그렇게 바다에 잠겼습니다. 아니, 우리가 잠긴 곳은 바다가 아닌지도 모릅니다. 우리를 삼킨 건 바다가 아니라 돈과 권력에 눈이 먼 이 천박한 자본의 깊은 뱃속. 그 깊은 뱃속으로 배가 가라앉았고, 우리가 사는 곳은 앞도 뒤도 알아볼 수 없는 심해의 어둠 속이 되고말아.

 

 슬픔이며 절망이며 분노, 그리고 이렇게까지 막되먹은 세상에 한 구성원으로 살고있다는 치욕스러움까지. 저마다 눈물의 무게만큼, 슬픔의 두께만큼 이 땅에 사는 이들은 저 바다 밑 막막어둠 속 같은 시간을 오백 일이 넘도록 지나고 있어.

 

 

감옥의 안과 밖

 

 새벽을 지나고 있는 이 시각, 귀뚜라미들은 계속 울어대고 있습니다. 형의 목소리인가 싶어 귀를 기울여보았습니다. 법정에서의 재판 과정을 세월호 참사의 진상규명을 위한 장으로 만들겠다는 편지 말미의 약속과 당부.

 

 솔직히 저는 래군 형에게 영장이 발부되고 구속이 되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그저 형의 안부만을 걱정스러워하는 조그만 마음이었습니다. 형이 잡혀들어가고 한 달 남짓 지나던 즈음, 형수와 아이들이 제주에 살고 있는 저희 집에 다녀갈 때도 역시 그 마음 하나로 누이와 아이들의 손을 잡았습니다.

 

 하지만 옥중 래군 형이 오히려 바깥 사람들을 걱정하고 용기를 주려하고 있듯이, 형수 또한 그러했습니다. 형이 잡혀간 뒤로 많은 분들이 석방 촉구를 위해 목소리를 모아주고 있는 게 너무나도 고맙지만, 자칫하다가는 박래군 이름 뒤로 세월호가 가려질까 걱정이라며 말이지요. 아직도 유가족들은 슬픔 한 조각 덜어내지 못하고 있고, 진실의 한꺼풀도 밝혀내지 못하고 있는데, 정작 이 싸움의 중심이어야 할 그 일들이 혹여라도 뒷전으로 놓여지게 되어서는 안 될 거라면서요.

 

 대학을 다니고 있는 두 아이 또한 아빠 엄마를 닮아 밝고 씩씩했습니다. 아빠가 옳은 일을 하다 잡혀갔음을 알기에 안타깝지만 떳떳한 마음으로 아빠를 응원했습니다. 오랜만에 만난 삼촌 앞에서 어서 나와야죠, 그치만 잘 이겨낼 수 있어요!” 하고 환하게 웃음을 지어보였어요. 그러나 형수와 두 아이의 마음이 어디 그렇기만 하겠는지. 삼키고 삭혔을 수많은 밤의 속울음을 짐작하기에는 그리 커다란 상상력이 필요하진 않겠지요.

 

 

곁을 지킨 죄

 

 형이 잡혀갔습니다. 2006년에는 <평택미군기지확장저지 범국민대책위원회의 공동집행위원장> 박래군이 잡혀갔고, 2009년에는 <용산철거민살인진압 범국민대책위원회 공동집행위원장> 박래군이, 그리고 이번에는 <416일의약속 국민연대 상임운영위원장>의 이름으로 또다시 구속이 되어.

 

 저들이 내세우는 근거는 집회와시위에관한 법률이거나 공무집행을 방해했다는 명목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단 한 번도 자신들이 자행한 대추리에서의 군사작전이나 용산의 살인진압, 저 깊은 바닷속으로 수장되는 목숨들에 대한 책임 방기에 대해서는 같은 잣대로 법전을 펼치지도, 적용하지도 않았습니다. 평화로운 시위를 보장하지 않는 경찰의 차벽과 물대포, 캡사이신 따위 국가 폭력에도 어떤 책임을 묻는 일이 없었습니다.

 

 하기에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평택범대위 박래군을, 용산대책위 박래군을, 416연대 박래군을 가두려는 건 다름아닌 평택 들녘의 평화와 용산 철거민의 존엄과 세월호 참사의 진실을 철장 안에 묶어두려는 거라는 걸 말입니다. 한진중공업 희망버스와 강정 해군기지건설을 막기 위한 몸부림에서 벌금형을 받은 것 또한 다르지가 않아. 그 안에서 박래군의 죄가 있었다면 오로지 그 아픈 현장을 외면하지 못하고, 그곳에서 눈물짓는 이들의 곁을 지켰다는 것 뿐.

 

 

박래군의 자리

 

 옥방에서 전하는 귀뚜라미 소리를 저는 스무 해 전 경기도 화성의 어느 시골집에서 밤마다 듣곤 하였습니다. 죽은 박래전과 산 박래군이 함께 자란 그 시골집.

 

 제가 입학한 대학의 학과에는 88년 독재정권에 온몸으로 저항해 몸에 불을 사른 선배가 있었습니다. 민중해방열사 박래전. 저의 대학시절은 온통 그 선배와 대화를 나누는 것이었다 해도 다름이 아니었습니다. 래군 형을 만난 건 두 형의 고향집을 다니면서부터였고, 대학 졸업을 목전에 둔 저는 보따리를 싸들고 무작정 그 시골집으로 들어갔습니다. 밥만 먹여주시면 된다고, 아버지 어머니를 따라 새벽녘부터 해질 때까지 밭에 나가 아무 일이라도 하며 지내겠다고. 스스로의 몸에 불을 사른 막내를 가슴에 묻은 어머니, 둘째마저도 인권운동이라는 가시밭길을 걷는 것을 못내 외면하고 싶어하시던 아버지는 고맙게도 저를 거둬주셨습니다.

 

 시골집의 그 방에서 보내던 저는 늘 혼자가 아니었습니다. 거기에는 살아있는 래군 형도, 죽은 래전 형도 함께였습니다. 죽은 래전에게 질문을 던지면 산 래군이 바깥의 활동 이야기로 대답해주곤 하였습니다. 제게는 산 박래군과 죽은 박래전이 둘 아닌 하나였고, 박래군을 통해 박래전을, 그리고 세상의 아픈 곁들을 함께 만나곤 했습니다.

 

 당시 유가협과 인권운동사랑방에서 활동하던 래군 형은 그 운동가의 그 고단한 날들 속에서도 주말이면 시골집에 내려와 밭둑에 로타리를 치고, 고랑 끝에 말뚝을 박고, 움막을 손보는 일에 게으르지 않았지요. 그 시골집에 지내던 저는 래군 형이 다녀갈 주말을 못내 기다리곤 했어요. 급박한 일정들로 해서 혹시라도 형이 다녀가지 못하는 날에는 얼마나 서운하던지. 그러다가 찾아오는 주말 저녁, 래군 형에게 듣던, 당시만 해도 생소하던 인권운동이라는 이름. 래군 형은 인권운동사랑방에서 날마다 팩스로 보내는 <인권하루소식>이란 것을 알게 해주었고, 조악한 편집의 그 소식지는 세상을 향한 시선을 더 아래로, 삶의 구체 현장으로 가까이 할 수 있게끔 당겨주었습니다. 그렇게 이어진 스물세 해의 인연. 돌이켜보면 래군 형은 이미 그때부터 당신의 자리를 끝끝내 지키고 있었습니다.

 

 저는 형의 시골집에서 나와 동화작가라는 이름으로 다소 먼 발치에서 살아오게 되었지만, 부러 연락하고 찾지 않더라도 래군 형은 언제나 그 자리에 있었습니다. 이 땅에 살면서 끝내 외면할 수 없어 조그만 촛불 하나 밝히며 찾아간 자리들. 구석진 곳, 그늘진 곳, 빼앗기고 쫓겨나고 차별받거나 억눌린 이들이 마지막 생을 걸어 싸우는 그 자리에는 어김없이 래군 형이, 그 시골 밭고랑에서 로터리를 치던 얼굴로 그이들 곁에 있었습니다. 그이들을 먼저 찾아가 귀를 열어 들어주고, 기댈 수 있는 등을 내어주고, 손을 잡아 함께 걸었습니다.

 

 제가 아는 래군 형은 그런 사람입니다. 언제나 가장 낮은 자리를 찾아, 가장 궂은 일을 도맡아 하며, 가장 고단한 삶을 마다하지 않는, 그저 그 일이 좋았던 어느 털털한 아저씨. 형의 소탈함과 수더분함에 대해서야 얼마나 많은 이들이 얘기하던가요. 그러나 당신이라고 왜 외롭지 않고 고단하지 않았겠어요. 사는 일로 겪어야 했을 불안함이나 두려움은 또 어땠을까요. 머슴살이에서 시작해 장애를 지닌 몸이 되어서도 엉덩이를 끌며 밭고랑을 기는 아버지를 보던 당신 눈빛을 나는 잊지 못합니다. 해마다 모란공원을 찾아 너무 일찍 흙이 되어버린 동생의 무덤을 매만지던 당신의 손길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떠나지 못하는 건

 그래도 꽃을 피워야 하는 건

 

 동화(冬花)라는 필명으로 남긴 동생 박래전의 유고시 가운데 한 대목. 저는 래군 형을 볼 때마다 언제나 저 싯귀가 떠오르곤 했어요.

 

 

사람 곁, 눈물 곁, 진실 곁

 

 아마도 감옥에서 나오면 당장이라도 세월호 유가족들 곁으로 돌아갈 것입니다. 형량을 판결받을 법정마저도 세월호 진실을 밝히는 장으로 만들겠다고 하고 있으니 더 말할 필요가 없겠지요. 래군 형은 끝내 사람 곁으로 돌아갈 것이고, 눈물 곁으로, 진실 곁으로 돌아갈 것입니다. 저들이 두려워하는 것도 바로 그런 것이겠지요. 사람과 사람이, 눈물과 눈물이, 진실의 향한 간절함들이 서로의 곁이 되는 것.

 

 밤을 꼬박 새우고 새벽이 밝아오는 사이 귀뚜라미 소리는 마당 가득 울려댑니다. 옥중 편지의 새끼 귀뚜라미 소리가 형의 목소리로 들려온 것처럼, 지금은 저 귀뚜라미며 풀벌레들 울음이 온통 그 메아리로 들리는 것 같아요. 세월호 참사의 진실을 알게 해 달라고, 유가족들의 눈물을 닦아달라고, 가녀린 목숨들을 지켜달라고, 박래군을 내놓으라고.

 

 하나의 귀뚜라미 울음이 수백수천 풀벌레의 울음으로 전해진 것처럼, 눈물이 눈물을 부르고, 진실을 향한 간절함이 또다른 간절함을 부를 때, 끝내 저들도 거스를 수는 없을 겁니다. 저 풀숲의 풀벌레들 울음을 어찌 다 덮을 수가 있을까요. (2015.0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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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냉이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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