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동

냉이로그 2014. 12. 19. 03:38
 

 

  
 한라의 봄과 여름, 가을을 다 올랐지만 눈길을 걸어올라갈 때가 정말 장관이라는, 겨울산행을 아직 하질 못했다. 팔부능선을 지나면서부터는 자꾸만 뒤를 돌아다보게 하는 멋진 풍경에 좀처럼 걸음이 띄어지지 않던 관음사 코스도, 오르는 내내 숲을 지나다 마침내 백록을 만나게 하던 성판악 코스도, 오백장군 바위가 우뚝우뚝 절경을 보여주던 영실 코스도, 가을 억새를 한껏 느끼게 해주던 어리목 코스도 모두 다녀왔건만, 아직 한 곳만은 남겨두고 있어. 눈길을 걸어올라가야 한다던 돈내코 코스.

 

 한라를 오르는 등반로를 모두 올라봐야지 하고 말을 할 때마다, 제주의 지인들은 말을 하곤 했다. 돈내코에서 오르는 길은 봄이나 여름, 가을에는 아주 지루하기만 할 거라고. 하지만 발이 눈에 푹푹 빠지는 겨울만큼은 아주 좋을 거라고. 하여 돈내코 등반길은 겨울에 오르리라, 남겨두고 있어왔건만.

 

 

 

 

 날이 좋을 때는 이렇게 감자네 집 지붕 너머로도 한라 꼭대기가 보인다. 감자가 세상에 나오고, 정신없이 가을을 다 보내고 났을 때, 지붕 너머로는 하얗게 옷을 갈아입은 한라가 모습을 드러냈다. 어제그제 내려져 있던 한라산의 대설특보.

 

 

 

 병이 도졌다. 마당에 나가 지붕 위를 올려다볼 때마다 가슴이 두근두근해. 어서 저기를 올라봐야 할 텐데. 슬쩍 달래에게 하루만 산에 갔다 와도 될까, 하고 물었다가 본전도 못찾을 뻔 했다. 그런 말은 타이밍이 중요하다 ㅜㅜ 어쨌든 말을 꺼내버렸고, 어떻게 해야 하루라도 숨통을 쉬러 산이라도 다녀올 수 있을까, 싶어 다시 말을 이었다. 우리 조카 한 번씩 쓰자구, 젖만 짜놓으면 나는 하루종일이라도 혼자서 감자를 볼 수 있을 거 같다구, 그러니 서로 한 번씩 하루라도 휴가를 갖는 조카를 쓰자구, 일주일에 한 번두 아니구 한 달에 한 번씩이라도 조카 한 번씩 쓰자구 ºº 그 말에 달래가 웃었고, 이 때 잘 해야 된다 싶어 계속 레이스를 감았다. 너가 먼저 조카 써라, 그래야 나도 편하게 써먹지. 연말에는 제주에 공연도 많고 그런 데 콘서트장에 다녀와. 아니다, 너가 쪼카 두 번 쓸 때 나는 한 번만 쓸게, 너 두 번에 나 한 번. 하하하, 달래는 그거 좋다! 하면서 웃었고, 알았으니 조카 한 번 쓰게 해주겠다고, 한라산 한 번 다녀오라고 마지못해 허락을. (야호!)

 

 아무래도 엄마라 그럴 것이다. 너가 조카 먼저 써라, 너 두 번에 나 한 번 하자, 아니, 일박이일로 육지라도 갔다 와라, 굽신 버전을 써가며 별의별 카드를 다 날려 보았지만 아마도 달래는 쉽지가 않을 것이다. 그러고 싶지가 않대. 감자를 떼어놓고 혼자 다니고 싶지가 않대 ㅜㅜ  

 

 

 

 

 

 그렇다고 나두 모, 툭하면 그러자는 것두 아니고, 이 겨울에 딱 한 번, 딱 하루만 그러고 싶다는 거. 아무래도 마당에 나갈 때마다 지붕 너머로 보이는, 하얗게 눈이 덮힌 한라 꼭대기의 유혹은 너무 쎄단 말이지. 지난여름만 해도 일주일에 세 번을 백록담에 인사를 하고 내려오기도 했건만, 지금은 지척에 두고도 발만 동동 구른다. 해발 천구백오십의 하얀 뒷동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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