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한 주일, 시내에 있는 제주영화문화예술센터에서 여성영화제가 열려. 마지막 날이던 일요일 아침, 영화관을 찾아.
프로그램 표를 보면서 동그라미를 쳐놓았던 건 서너 편이었지만, 다른 건 놓치고 놓치다 이것 한 편을 볼 수 있었는데, 이 영화만큼은 놓치지 않길 정말 잘한 일. 달래와 함께 둘이서 (아니, 이제는 감자까지 셋) 얼마만에 영화관엘 함께 갔는지도 모를 정도이지만, 영화를 보고나서 이렇게 커다란 감동을 하고 나오기란 실로 얼마만인지 몰라. 여성으로 살아가기에는 너무도 힘든 그곳의 현실은 그 경쾌한 화면 속에서도 숨이 막힐 정도였지만, 그 숨막힘을 넘어서는 경쾌함과 싱그러움. 영화를 보는 내내 이 아이를 응원하지 않을 수가 없어. 와즈다, 너는 나. 물론 이 영화는 그 어떤 사회의 구체적인 억압과 그 억압을 이겨내는 한 아이의 이야기이지만, 그 아이는 작고도 약한 우리 모두의 판타지가 되기에 충분하였다.
집에 돌아와 이 작품과 관련한 해설들을 살펴보니, 이 영화를 만든 사우디에서는 장편영화를 만드는 것조차 금지가 된 나라였다지. 게다가 여성들은 자전거도, 자동차 운전도 금지되어, 심지어는 바깥에선 목소리가 들리게 하는 것도 조심스러워해야 한다던. 그런 나라에서 여성 감독이 찍은 영화라 했다. 영화를 찍는 동안 감독은 살해 위협과 협박을 받기까지 했다던가. 그래서 촬영을 하는 동안 감독은 자동차 안에서 숨어 무전기로 배우들과 소통하는 식으로 메가폰을 잡을 수밖에 없었다는……. 아, 그렇게 다섯 해가 걸려 이 영화를 완성시켰고, 이 작품이 상영된 뒤로 그 금지된 사회의 여성들도 자전거를 탈 수 있게 되었다고.
그 어떤 사회적 의미를 떠나, 무엇보다 이 영화가 좋은 건 무지하게 재미있기 때문이었다. 재미있고 즐겁다, 누구라도 와즈다가 되어 가슴을 졸이게 되고, 누구라도 와즈다를 응원하는 마음이 들 거라는 거. 그리고 끝내, 아버지의 또다른 결혼식이 있던 날, 그 폭죽을 뒤로 하고 그 슬픈 엄마와 함께 끌어안는 마지막 장면은, 보는 이들의 가슴에 진정으로 소중한 어떤 것을 발견하게 해준다. 이럴 때 쓰는 말, 뭉클.
<내 친구의 집은 어디인가>가 생각나고, <천국의 아이들>이, <하얀 풍선>을 볼 때의 그 감동들이 떠올랐다. 굳이 동심을 들먹이지 않더라도, 아이들의 시선, 아이들의 생동, 그 정직함과 자연스러움은 무엇보다 힘이 세다. 세상이 만들어놓은 틀은, 그 틀을 강요하고, 그 틀을 내면화시키고, 끝내는 우리 스스로를 그 틀의 수호자로 만들어버리는 자기완결의 시스템을 가지고 있기에, 이미 내면화되어버린 이들의 눈에는 쉽게 보이지 않는 것, 쉽게 넘어설 수 없는 것. 그러나 아이들 안에 있는 자연과 정직은 아주용감하고도 과감하다. 아니, 아이들에게는 그저 자연스러운 것일 뿐, 세상의 틀이 내면화되어버린 어른들에게나 그것이 과감해보이거나 무모해보이는 것일 테지만.
어린이문학이 있어야 한다면 마땅히 그 자리일 것이다. 어른들이 두려움을 심지 않는다면, 적어도 아이들은 두려워하지 않는다. 있는 그대로를 볼 뿐이고, 있는 그대로를 말할 뿐. 그리고 느낀 그대로를, 욕구 그대로를 살아가는 것. 이것이 어떤 도전으로 여겨지거나 혁명과도 같은 위협으로 여겨진다면, 그건 단지 그것을 용납하지 못하는 세상의 시선, 그것에 길들여진 어른들의 자기방어일 뿐.
실로 오랜만에, 가슴뛰는 영화를 보았다. 꼬맹이 아이들부터 꼬부랑 어른들까지 모두 다 함께 보았으면 하는, 그런 영화. 누구라도 우리 안에는 다 이 맹랑한 소녀가 살고 있을 거. 내 안에 있는 와즈다를 되찾고 살아가는 삶과, 끝내 내 안의 이 아이를 꾹꾹 눌러둔 채 살아가는 삶이란 얼마나 다르겠는지.
프로그램 표를 보면서 동그라미를 쳐놓았던 건 서너 편이었지만, 다른 건 놓치고 놓치다 이것 한 편을 볼 수 있었는데, 이 영화만큼은 놓치지 않길 정말 잘한 일. 달래와 함께 둘이서 (아니, 이제는 감자까지 셋) 얼마만에 영화관엘 함께 갔는지도 모를 정도이지만, 영화를 보고나서 이렇게 커다란 감동을 하고 나오기란 실로 얼마만인지 몰라. 여성으로 살아가기에는 너무도 힘든 그곳의 현실은 그 경쾌한 화면 속에서도 숨이 막힐 정도였지만, 그 숨막힘을 넘어서는 경쾌함과 싱그러움. 영화를 보는 내내 이 아이를 응원하지 않을 수가 없어. 와즈다, 너는 나. 물론 이 영화는 그 어떤 사회의 구체적인 억압과 그 억압을 이겨내는 한 아이의 이야기이지만, 그 아이는 작고도 약한 우리 모두의 판타지가 되기에 충분하였다.
집에 돌아와 이 작품과 관련한 해설들을 살펴보니, 이 영화를 만든 사우디에서는 장편영화를 만드는 것조차 금지가 된 나라였다지. 게다가 여성들은 자전거도, 자동차 운전도 금지되어, 심지어는 바깥에선 목소리가 들리게 하는 것도 조심스러워해야 한다던. 그런 나라에서 여성 감독이 찍은 영화라 했다. 영화를 찍는 동안 감독은 살해 위협과 협박을 받기까지 했다던가. 그래서 촬영을 하는 동안 감독은 자동차 안에서 숨어 무전기로 배우들과 소통하는 식으로 메가폰을 잡을 수밖에 없었다는……. 아, 그렇게 다섯 해가 걸려 이 영화를 완성시켰고, 이 작품이 상영된 뒤로 그 금지된 사회의 여성들도 자전거를 탈 수 있게 되었다고.
그 어떤 사회적 의미를 떠나, 무엇보다 이 영화가 좋은 건 무지하게 재미있기 때문이었다. 재미있고 즐겁다, 누구라도 와즈다가 되어 가슴을 졸이게 되고, 누구라도 와즈다를 응원하는 마음이 들 거라는 거. 그리고 끝내, 아버지의 또다른 결혼식이 있던 날, 그 폭죽을 뒤로 하고 그 슬픈 엄마와 함께 끌어안는 마지막 장면은, 보는 이들의 가슴에 진정으로 소중한 어떤 것을 발견하게 해준다. 이럴 때 쓰는 말, 뭉클.
<내 친구의 집은 어디인가>가 생각나고, <천국의 아이들>이, <하얀 풍선>을 볼 때의 그 감동들이 떠올랐다. 굳이 동심을 들먹이지 않더라도, 아이들의 시선, 아이들의 생동, 그 정직함과 자연스러움은 무엇보다 힘이 세다. 세상이 만들어놓은 틀은, 그 틀을 강요하고, 그 틀을 내면화시키고, 끝내는 우리 스스로를 그 틀의 수호자로 만들어버리는 자기완결의 시스템을 가지고 있기에, 이미 내면화되어버린 이들의 눈에는 쉽게 보이지 않는 것, 쉽게 넘어설 수 없는 것. 그러나 아이들 안에 있는 자연과 정직은 아주용감하고도 과감하다. 아니, 아이들에게는 그저 자연스러운 것일 뿐, 세상의 틀이 내면화되어버린 어른들에게나 그것이 과감해보이거나 무모해보이는 것일 테지만.
어린이문학이 있어야 한다면 마땅히 그 자리일 것이다. 어른들이 두려움을 심지 않는다면, 적어도 아이들은 두려워하지 않는다. 있는 그대로를 볼 뿐이고, 있는 그대로를 말할 뿐. 그리고 느낀 그대로를, 욕구 그대로를 살아가는 것. 이것이 어떤 도전으로 여겨지거나 혁명과도 같은 위협으로 여겨진다면, 그건 단지 그것을 용납하지 못하는 세상의 시선, 그것에 길들여진 어른들의 자기방어일 뿐.
실로 오랜만에, 가슴뛰는 영화를 보았다. 꼬맹이 아이들부터 꼬부랑 어른들까지 모두 다 함께 보았으면 하는, 그런 영화. 누구라도 우리 안에는 다 이 맹랑한 소녀가 살고 있을 거. 내 안에 있는 와즈다를 되찾고 살아가는 삶과, 끝내 내 안의 이 아이를 꾹꾹 눌러둔 채 살아가는 삶이란 얼마나 다르겠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