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주시 화서면. 처음 맡아 나간 현장이 있는 곳이다. 풍기에서 상주로 현장을 오갈 때마다 이 어디쯤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 잠깐씩 들곤 했는데, 현장에 다다를 즈음 외서면이라는 이정표가 보이는데, 가물 기억이 나는 것도 같아. 언젠가 은이네 학교로 주소를 써서 부칠 때 우편번호를 찾던 기억. 문경 어디쯤이라 했다가 상주로 옮겼다고 그랬던가. 아, 그럼 여기가 맞나보다. 녀석과 이렇게 또 가까이에서 지내게 될 줄이야.
월요일, 작업을 마치고 전에 적어두었던 그 주소대로 길을 찾아나섰다. 두근두근 설레는 맘으로 그곳엘 닿았는데, 아뿔싸, 그 사이에 학교가 원래 있던 문경으로 돌아갔다는 거다. 설렘과 반가움의 포텐이 터지기 직전이었으니 김이 픽 새버리기는 했어. 다시 주소를 물어 거리를 살폈더니 문경이라지만, 거기도 화서 현장에서는 그리 멀지가 않아. 문경시 농암면 농암리.
샨티라는 이름의 작고 조그만 학교. 산스크리스티어로 평화라는 뜻을 가진 말. 학교에 닿으니 아직 일과시간을 마치기 전. 옹기종기 모여있는 아이들 사이에서 은이의 얼굴을 찾는데, 미처 얼굴을 찾아내기도 전에, 누군가 부르는 소리가 들려.
"하은아, 우리 배드민턴 치자."
"그래."
이 어딘가에 있나 보다. 아이들 사이를 더 빠르게 살펴보고 있는데, 모여선 아이들 틈에서 배드민턴 채를 들고 풀썩 뛰어나와. 아! 정말! 저기! 있네! 녀석의 얼굴을 알아보는 순간 마음에 불이 환하게, 어두워지던 학교 운동장도 하얗게 밝아지는 듯했다. 동무들끼리 콧노래를 흥얼거리고 있었는지, 손에 든 배드민턴 채를 허공에 휘저으며 꽃송이가, 꽃송이가 노래를 소리질러 부르면서. 녀석이 날 알아보기 전, 멀리서 몰래 찍어봐야지 생각에 주머니에서 사진기를 꺼내드는데, 아깝게도 그건 실패. 녀석도 날 알아보고는 눈이 동그래지면서 달려드는 거라.
아직 일과시간인 것 같은데 어느 한 켠에서 종 울리기를 기다려야 할까, 주춤하고 있었더니 요녀석 어린애처럼 손을 잡아 끈다. 그러곤 손잡고 학교 운동장을 같이 걷쟤. 그렇게 운동장 한 바퀴를 돌아와, 목련나무 밑 벤치에 앉아, 쉴새없이 조잘조잘 조잘조잘. 학교 얘기, 수업 얘기, 필수과목, 선택과목, 학교가 있는 마을 얘기, 산티아고에 다녀온 얘기, 얼마 전 홍대 앞 클럽 드럭에서 락밴드 공연을 했다던 얘기. 삼촌 일하는 데는 어디야, 뭐 짓고 있어, 화서면이면 나도 아는데, 여기서 어떻게 가냐면은.
저녁을 먹으러 나가자, 하니까 그 전에 학교 건물 안도 보여주겠다고. 앉은 자리에서 엉덩이를 떼자마자 다시 손을 잡아. 서로 걸음박이 맞질 않아 손이 풀리거나 하면 왜 자꾸 손을 놓느냐며 다시 나꿔채고, 왜 손을 놓냐며 또 나꿔채고. 뭔가 좋아보이는 그림 앞에서 사진이라도 찍어보겠다고 손을 놓으면, 기다리고 있다가 다시 손을 꼭. 사춘기를 일찍 겪어, 일찍도 너무 일찍 겪어, 열세 살 육학년 때는 반항의 아이콘이라 할만하던 녀석이 열일곱 살, 덩치는 멧송아지만해져서는 처음 만나던 때 꼬맹이적 귀요미로 돌아왔다. 어라, 요것봐라.
자기는 꼭 한 번 이렇게 누굴 데리고 다니면서 학교 소개를 해보고 싶었다나. 잡은 손 풀리기가 무섭게 제 옆구리로 나꿔채면서 건물 두 동의 1, 2층을 방마다 데리고 들어갔다. 일과 후에는 주로 밴드 연습을 하러 와 있다는 강당의무대며, 아이들이 빵을 굽고 커피를 내려 운영하는 까페, 아늑하게 꾸며놓은 상담 교실, 합창 시간의 합주실, 자기넨 시시한 건 안 배운다는 성교육방……. 그러고는 손을 잡아끌어 도서관으로 들어가는데, 여기, 삼촌 책! 하고는 꺼내어 씨익 웃는 거지. 하여간, 이 애교를 누가 말려.
마을엔 식당이 돼지국밥집이랑 삼겹살집밖엔 없다고. 그런데 삼겹살은 돈이 없어 한 번도 사먹어보질 못했다나. 삼겹살이 너무 먹고싶다고. 삼촌은 이제 풀 좋아하지? 그래도 오늘은 삼겸살, 삼겹살 먹으러 가! 그래, 가자. 불판 위로 살점들이 익어가자 침 꿀꺽 소리를 내며 앉은 채로 춤을 추며 호들갑. 너도 생각 나? 양양 읍내로 엄마랑 아빠랑 넷이서 삼겹살 먹으러 갔을 때. 엄마가 너보구 그만 좀 먹으라고 막 못먹게 하고, 너는 더 먹겠다고 덤벼들고. 옛날엔 맨날 그딴 걸로 싸우고 그랬는데 ㅋㅋ 그때 생각이 나 사이다 한 병을 시키면서 잔은 소주잔으로 부탁했다. 건배하면서 먹어야지. 은이가 먼저 사이다병을 두손으로 잡고 기울여주는데, 그냥 따라주면 어떡하냐 그랬더니, 처음에는 무슨 말인지 몰라 하다가, 눈에 별빛이 반짝 빛나면서 사랑해, 삼촌! 그런다. 나도 병을 받아 녀석에게 따라주며 은아, 사랑해!
전에도 늘 그랬더랬다. 엄마아빠랑 넷이서 밥을 먹다가 반주를 할 때면 따라주는 건 자기도 해보겠다며 재미있어 해. 그때마다 그랬지. 술 따라줄 때는 사랑해요, 엄마 / 사랑해요, 아빠 / 사랑해요, 삼촌 그러는 거라고. 누가 들으면 닭살도 그런 닭살 없겠지만 그래도 그렇게 만나는 자리에서는 언제나 술잔 넘기는 수만큼이나 사랑을 말하곤 했다. 우르르 모이는 잔칫날 같은 때 스쳐가며 얼굴만 보던 걸 빼면은, 그렇게 다정히 키득거리며 함께 하기는 사 년만. 신기하게도 은이는 그 옛날 비밀이랍시고 말해주던 것들을 기억해내곤 했다. 어쩌면 나는 까맣게 잊고 있었을, 그러나 녀석이 천연덕스레 웃으며 말하는 앞에서 아, 맞다! 하고 살아나고 살아나는 그때의 장면들. 은이는 다시 아홉 살 애기로 돌아갔고, 나도 그때 서른 몇으로 돌아가 있는 것 같았다. 어쩌다 이 녀석은 덩치에 걸맞지 않게 애교쟁이 귀요미로 돌아와버린 걸까.
그러다가도 몇 번이나 나는 깜짝 놀라곤 해. 아이의 어떤 멈추어진 표정에서 아빠의 얼굴이 그대로 나타나. 은아, 너 크니까 점점 아빠랑 닮아간다. 녀석은 진짜냐고, 정말 그러냐, 어디가 그러냐 하면서 싫지 않은 표정. 식당에서 나와 학교로 되돌아오던 길, 엄마랑 아빠를 사랑하고 존경한다는 은이의 말이 얼마나 고맙고도 기뻤는지 모른다.
은이는 기숙사 방으로, 나는 현장 앞에 잡아놓은 일꾼들 여관으로, 돌아가야 하느라 더 긴 시간, 긴 밤을 함께 보내진 못했지만, 이젠 가까이 있으니까 자주 볼 수 있겠다며, 시종일관 환하게 웃는 녀석 얼굴에, 정말 그럴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이상하게도 아쉬움같은 건 크지 않았다.
농암 샨티에서 화서 현장까지는 삼십여킬로미터. 늦은 저녁 시간이어서 그랬는지 그 길을 오는동안 마주친 자동차가 두 대밖에 없어. 밤안개 몇 뭉치를 만났을 뿐. 제법 잘 닦아놓은 길치고는 몹시도 예쁘고 조용한 길이었다. 오는 내내, 학교 운동장을 돌면서, 벤치에 앉아서, 손을 꼭 잡고 교실 방방을 다니면서, 그리고 밥을 먹으면서 쉴새없이 신이나 떠들던 아이의 목소리가 꼭 진짜인 것처럼 다시 들리고, 다시 또 이어지고. 마치 노랫소리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