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비슷한 동물 일인칭 나레이션 같은 것들을 볼 때면, 비슷한 거였어도 매번 볼 때마다 또 새롭고 그렇더라. 아마 그건 이렇게 읽을 때나 잠깐 공감하고, 돌아서고 나면 쉽게 잊어버리고 그래서인 것 같아. 머리로만 백 번 이해하면 뭐할까. 공감하지 못하고, 억지로 상상력을 끌어올려야만 살짝 그러다 말아버리니. 요즘 평화라는 거에 대해 다시금 생각해보는데, 그건 이해하는 게 아니라 감수성이라는 말이 참 맞는 것 같아. 요즘 류은숙 선생이 쓴 <<사람인 까닭에>>라는 책을 보다가도 인권이니 연대니 하는 그 소중한 말들이, 타자의 처지를 공감할 수 있는, 약자의 아픔을 내가 그 당사자가 되어 상상할 수 있는, 그 감수성이 정말로 기본이 아니겠나 싶더라. 아참, 나는 요즘 새로운 곳에 들어와 일을 하면서, 여기에서 먹고자고 하면서 안 먹어야지 하던 걸 더러 먹을 때가 있다. 혼자 지내고, 혼자 백수놀이 할 때는 어려울 것 하나 없었는데, 이렇게 낯선 공간에 들어와 낯선 사람들하고 우르르 지낼 땐 그게 참 어렵네. 불국사에서 일할 땐 삼시세끼를 공양간에서 먹어서 일판에 나와 있는 거래도 어려울 게 없었는데. ^^;;
저건 바끼통 자게에 프랭스가 퍼다놓은 어느 게시물을 보다가 그 밑에 댓글로 쓰고 나온 거. 실은 그 기사의 주제에 대해서라기보다는, 그걸로 연상되는 요즘의 고민들. 말하자면 실상 나의 상상력이라는 것은 얼마나 빈약한가, 하는. 나의 감수성이라는 것은 얼마나 닫혀져 있는가, 하는. 사실 나는 그 어떤 아픔에도 진정으로 공감하고 있질 못하고 있지 않은가 하는. 그런 고민 앞에 서게 되어. 지금도 그곳 강정, 그곳 바그다드, 그곳 대한문 앞의 무너진 농성장……. 그리고 그 기사에서 말하는 내 한 끼의 밥과 그 지옥같은 사육장. 결국 그 상상력과 감수성이라는 건 나를 통해 그들을 볼 수 있는 능력이며, 그들을 통해 나를 볼 수 있는 힘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나와 그곳, 나와 그들의 거리가 결코 멀지 않음을 어느 자리에서나 느낄 수 있는 마음. 타자에 대한 상상력, 생명에 대한 감수성은 바로 그런 것일 것이다. 너무 거창하거나 관념적인 것 같을지 모르지만, 달리 말해 그건 온 몸에 살아있는 촉이거나 통점 같은 것. 그러나 삶의 관계를 자본에 예속시켜버리고, 세상이라는 터전을 살아남기 위한 싸움터로 기획해놓은 이 세상에서는 그런 촉이나 통점 같은 건 일찌감치 잘라내도록 강요하기만. 그렇다고, 탓할 수만 있을까. 정생이 할아버지의 오물덩이처럼 딩굴면서에는 할아버지가 소년 시절 쌀 됫박을 속여야 했던 점원 시절의 고백이 한 대목 있다. 기술자가 되고, 현장 소장이 되어 내가 회사에 들어와 맨 처음 배우기를 강요받는 것이 바로 쌀 됫박을 속이는 일. 이러려고 나는 옛 사람들이 지어온 집을, 옛 사람들의 집짓기를 배워온 걸까. 일을 하고 있어 어쩌지 못한다는 걸 그 모든 핑계로 삼으면서, 그 일이라는 것에서도 떳떳치 못한다면, 결국은 아무 것도. 내가 한다는 일이, 나와 내 식구를 곤궁치 않게 하는 것말고 단 하나의 목숨, 세상의 어느 한 구석에라도 온기를 더하게 하는 것이 되지 못한다면.
써놓고보니 그 게시물에서 너무 나가버린 거가 되었는데, 좁게 보면 아주 상관없는 내용에서 시작한 거긴 하지만, 어떻게 보면 아주 다르지는 않는 그 어느 지점에서부터 가지가 이어져, 지금 가장 크게 부딪치고 있는 고민으로 와 버렸나보다. 그냥 넋두리에 지나지 않는, 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