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변

굴 속의 시간 2011. 3. 8. 01:39

포장마차

시간이 애매했다. 스터디는 일찍 마쳤는데 내려오는 버스는 열 시 막차 뿐.두 시간반이 남았으니 누구를 불러내기도, 어디를 가기에도 마땅치는 않았다. 난지도한테는 그동안 조카를 너무 많이 써먹었으니 더는 그러면 안 돼. 목욕탕에라도 갈까.그래도 일단 터미널 쪽으로나 가서 생각해보자. 딱히 거기말고는 갈 곳도없었으니. 눈 붙일만한 곳이라도 좀 있었으면 좋겠는데,플라스틱 의자는 딱딱했고, 오늘따라 더 추웠다.

강변역 동서울버스터미널 앞 포장마차.파란 플라스틱 탁자는 여섯 개가 있었고, 맨 구석에 찌그러져 자리를 잡아.익숙한 풍경이다.거기에 그렇게 혼자 찌그러져 있는 거는 내가 생각해도 퍽이나 잘 어울리는 장면이다. 변변한 안주도 없이 담배 한 모금에 한 잔씩을 홀짝여. 얘기를 나눌 사람도 없어, 케에엑 가래나 뱉어가며 빈잔을 채우기나 했을 것이다.

그렇게 구석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있는동안다른 플라스틱 탁자로는 정확하게한 바퀴 반 손님들이 들었다 자리를 뜨곤 했다.대각선 맨 귀퉁이엔 나와 비슷한 연배의 남자들. 목소리가 유난히 컸다.그 가운데 누구 하나 가족이아픈 모양.그런데 병실을 얻지 못했을까, 수술 날짜를 받지 못했을까, 삼성이니 아산이니 세브란스니 욕을 해가며, 병원을 옮길 때마다 그 비싼 엠알아이는 왜 다시 찍어야 하냐면서한국 의료산업의 구조에 대해 열을 토했다. 그리고 그 맞은편 자리로 어느 아가씨가혼자앉더니 잔치국수를 시켜. 아,저렇게 빼딱구두에 얌전한 옷매무새를 하는 아가씨도 이런 포장마차엘 혼자 들기도 하는구나. 아니, 그 뿐이 아니라 그 앞쪽으로는 역시얌전한 옷차림 아가씨 둘이 닭발인지 똥집인지 벌건 양념 안주 하나를 놓고 소주를 마셨다. 그ㅡ 양념 안주만큼이나 아가씨 둘얼굴도 뺨이 발그레하게 달아 있어. 직장 생활이라는 게 힘이 든가봐. 둘이는 열나게 사장인지 실장인지 하는 사람을 씹어댔다. 젊은 연인 한 쌍이잔치국수를 먹고 일어섰고, 그보다 나이 많은 연인 한 쌍이 역시 잔치국수를 먹고 일어섰다.그렇게 바삐 일어서는 이들은아마 버스 시간을 앞둔 이들일 것이다. 그리고 그보다 조금은 여유있이 술에 안주를 시키는 이들은시외버스를 타러 나온 길이 아니라 그 어디 쯤이 직장이거나 그곳을 중간 기착지 삼아버스를 갈아타야 하는 이들이거나. 거기엔 구리 남양주로 가는 버스들이 돌아나가는 곳이기도 하거든.아님, 그도 아니면 그 동네를 어정거리며딱히 일도 없이 술잔을 기울이는 사람이거나.

그러다 문득 드는 생각이내 모습도 딱'그 동네를 어정거리며 딱히 일도 없이 술잔을 기울이는' 축으로 보일 것 같다 싶었다.하긴 그 시간 나 말고도 나처럼 혼자 들어 순대 한 접시에 소주 한 병을 비우고 나가는 어떤 사내의 모습이 딱 나같아 보이기는 했다. 어디 먼 길 떠나는 이처럼 보이지는 않고, 그렇다고 여느 직장 일을 마쳐 퇴근 길에 들른 것 같지도 않고, 그저 한숨과 담배연기로 찌들어보이는, 왠지 꾀죄죄해보이는 얼굴빛과 옷차림. 과연 내가 그와 닮아 있지를 않겠는가.시외버스를 기다리는 손님이라기에는급해보이는 기색이라는 게 하나 없는 거지, 그렇다고 말쑥한차림새도 아니고, 뭔가 약속이 있어 보이지도 않고.거기 어디 쯤 살아서잠바떼기 하나 꿰어입고 나온 동네 백수마냥. 하긴 어딜 가도 늘 그런 소릴 듣곤 했으니까.어딜 가도 그 동네 사람 같다는. 그건 다른 게 아니라 어딜 가도추레한 옷차림에 부시시한 모습 그대로라그렇다는.

병원 욕을 하며 일장연설을 하던 사내가 변소를 찾아 잠깐 자리를 비우니, 그 앞에서 들어주기만 하던 친구들 목소리가 들린다. 야, 쟤 요즘 많이 힘든가 보다. 회사에서도 무슨 문제가 있나 본데, 하여간 요즘들어 맨날 술이야… 하이고, 나는 뭔데 그 사람들 하는 얘기들을 다 듣고 있는 거니. 아니, 뭐 딱히 들으려고 해서가 아니라 들리니까 들어. 그러다가 이런저런 딴 생각에 들었다가 그랬겠지. 그러니 그 사람들 얘기라는 것도 띄엄띄엄 맥락도 없이 들렸다가 말았다가. 그저 사람사는 건 다들 그리 다르지가 않나보다 싶은 생각이 드는 거.

마시지 말을까, 참자 참자 하다가, 그래도 거기 들어가 있기를 잘했다 싶은 건, 영월까지 내려오는 내내 버스에서 기절한 듯 잠을 푹 잤다. 갈수록 잠이 부족하다 부족하다 하면서도 깊은 잠을 못이루고 있기만 했는데, 정말기절처럼 잠이 들어 버스에 불이켜지고 나서야 깨어났다. 푹 잠이 들었으니 얼마나 좋아.

글쎄, 그 포장마차 안 또 누군가도 지금 나처럼 이렇게 일기 비슷한 걸 쓰고 있을는지도 모르겠다.거기는 터미널 앞이라 그런지 다들 급하게 먹고 일어서는 손님들이 대부분이더라.그 중엔 그 동네 사는 사람처럼 보이는, 담뱃내에 쩐 잠바 같은 거 하나 걸치고 술이나 한 잔 받으러 온 것처럼 보이는, 그런 사람 하나도 자리 하나 차지하고 있더라. 다 식은 오뎅 국물 하나를 놓고 소주 한 병, 또 한 병.가끔 전화기를 만지작거려보기는 하지만 마땅히 걸려올 곳도 없고, 걸 곳도 없어 보이는. 딱하다 못해 한심해보이는,저런 애랑 친구 아니어서 다행이다 싶은 ㅎ.

암튼 스터디가 일찍끝나 버스시간 떠버리니 그것 참 별로더라. 마땅히 갈 데가 있나, 그 짬으로 누굴 보자 할 수가 있나.그렇다고 까페, 찻집 이런 데는 너무 어색하고 낯설어. 다행인 건 그 어느국밥집이거나 포장마차 같은 곳엘 기어들더라도나한테는 그 동네 단골백수 포쓰가 난다는 거.익숙하고 편안해, 낯설지 않을 수 있다는 거.

다음 주 과제

다음 주 과제는 경복궁 근정전과 창덕궁 인정전. 가히모든 면에서 조선 최고의기법과 양식, 구조 씨스템을 갖췄다 말할 수 있는 그것들.한 주일 동안 그것들을 속속들이 다 뜯어 맞춰볼 수 있을까 사뭇 긴장이 디되기도 한다. 그나마이긴장이 있어 또 한 주일을 또 빡세게 살 수 있을 것이다. 지난 1월부턴 정말 매 한 주일, 한 주일이 하루처럼 지나가고 있어. 어느 새 3월. 형님, 벌써 이백십며칠 밖에 남지 않았어요.그러게. 그런데요, 요즘 공부하다 보면 작년엔 뭘 믿고 그렇게 자신있어 했는지 하면할수록 낯이 뜨거워지고 그런다니까요. 그래, 너도 그러냐, 나도 그렇다.뭘 몰라도 한참 몰랐지,뭘 모르니 그리그리 무모했나봐. ㅎㅎ

근정전, 인정전 말고도 해가야 할 게 경회루 합각부, 그리고 이고주칠량 건물 하나를 뚝딱 세워짓는 일. 우와, 쓰벌 만만치가한다.그래도잔머리 굴리지 않고 이것들과 끝까지 붙들고 씨름을 하고 나면또 얼마나 기분이 좋을 거야.피가 다시씽씽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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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냉이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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