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날 이래

굴 속의 시간 2010. 10. 9. 17:08

으앙, 이게 뭐야. 오늘 안에 대전에 닿을 수나 있으려나.

싸고 보니 또 한 짐이 되었다. 공부가 잘 된 이들이야 다 머릿속에 넣어서 갈 것들을 이번에도 난 또 역시 가방만 무거워져. 혹시모르니, 이것도 한 번 더 들여다 볼 수 있을까,그러면 이것도, 이것도, 이것도 더, 더, 더 하다보니 어디달 반은 여행 떠날 사람 가방이 되어버렸다. 공부 못하는 애덜이 가방만 무겁다고, 하는 동서고금의 진리를 또다시 몸소 보여주고 있는 것이었다.게다가 나름 꼼꼼하게 챙긴답시고, 거기서는 전화기도 반납한댔으니서랍깊은 구석에서 손목시계도 하나 챙겨 찼고, 신분증은 있나, 싸인펜은 넣었나,엄마가 주고간 부적 같은 거에, 그리고 라이터는 안 빠뜨렸나 까지 그렇게콕콕 짚어가며 꼼꼼히점검까지 했다 싶었는데. 아뿔싸,수험표를 넣어오지 않았다는 게 기차역에 다닿아서 떠오른 것이다. 그것도 막 기차 도착한다고 방송이 나오고 있는데. 이걸 어째.한 대 보내고 집엘갔다 와야 하나, 말아야 하나. 수험표야 관리공단에 들어가 인터넷으로 다시 인쇄할 수 있을 테니, 뭐 대전 가서도 어찌 해결은 되겠지. 프린터 있는 피씨방을 잘 찾아야 할 텐데, 에이 씨, 이게 뭐야, 이 멍충이…. 그러곤 기차에 올라탔다. 제천역에서 내리고 갈아탈 기차가 올 때까지는 한 시간이 남았다. 그렇게 대합실에 앉아 공책을 보며 한 시간, 다음 기차가 들어올 때가 다 되었는데 그 때 또 생각이 난 것이다. 깜짝 놀라, 가방을 뒤지는데 으앙, 난 몰라. 나름 비기를 모아놓은 화첩이랍시고, 시험장에서 그릴 그림들을 약식으로 도해해놓은 것이 있었는데 정작 가장 써먹어야 할 그걸 안 갖고 온 거다. 몰라, 몰라, 난 몰라. 가방에 싸들고 온 한 보따리 자료들이야 다 없어도 그거 하나만큼은 꼭 있어야 하는 건데. 이번엔 정말 안 되겠구나.기차표를 바꿨다. 그리고 다시 영월로 돌아오는 기차표도 달랬더니 그건 또 한 시간 뒤란다. 아놔 미쳐요, 정말.헐레벌레 택시를 잡아타고 아저씨 터미널요. 그리그리 하여 이제 막 집에 들어왔다. 이게 뭐냐고요, 증말. 집 나설 때는 준비 다 되었다며 쌓아만 놓던 설거지도 싹 하고, 안 하던 청소까지 싹 하면서 가뿐하게 나섰건만. 으이그야, 코메디 한 판을 하기는 하는구나. 에이 씨, 해 저물기 전에 일찍 가서 고사장도 미리 가 보구, 차분차분하게 그러려고 했더니만, 쩝. 니가 그렇지 뭐. 그나저나 이러구 있을 시간 없다.어여 또 나가봐야지, 까딱하다간 표 바꾸고 온 그 기차도 놓쳐버릴까 몰라. 이거야, 원 오늘 안에 무사히 대전에 닿을 수는 있겠냐구.

아까 제천역에서 가방을 까열었을 때는정말 간담이 서늘, 살짝 식은땀이 나는 것 같기도 하더니 아예 이렇게다시 집에 왔다 가려고 보니까 차라리 잘 되었다 싶다. 청심환을 사 먹으면 좋다기에 그것도 하나 사긴 했다만, 이러는바람에 내 꼴이 얼마나 우스운지 긴장이 다 풀리고 말았어. 아, 생각해보면 이것도 그리 나쁘진 않구나, 즐거운시험장 가는 길.맨날 이런다니까. 으유, 띨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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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냉이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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