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7- 2007
일을 마치고 들어오니 이모에게 메일이 와 있다. 강화의 봄소식, 아픈 세상의 소식, 그리고 아이들의 스무 번째 준비 소식. 이십 년이라니, 나는 그 시간의 깊이가 얼마나 되는지 알지 못한다. 이십 년은커녕 무엇 한 가지에 채 십 년도 몸을 담가보지 못했으니. 큰이모가 처음 만석동을 찾을 때가 87년이라고 했지. 아, 그 해라면 나도 기억해. 멀리 외삼촌 댁 가까이에서 작은 식당을 하던 엄마가 서울로 와 하숙을 처음 시작하던 해. 그러니 엄마도 꼭 스무 해 째가 되는구나. 아마 좀 더 선배들이라면 그 때를 명동성당이라거나 넥타이 부대 혹은 ‘소나기 퍼붓는 옥포의 조선소에서 눈보라 날리는 서울 철로 위’까지 울린 노동자들의 함성으로 많이들 기억하겠다. 나야 뭐 중학생 아무 것도 모르는 철부지였으니. 아, 한 가지 기억이 있기는 한데, 그 해 유월 구로동 어느 병원에서 폐렴으로 사십 일 가까이 누워 지냈는데 병원 휴게실 텔레비전에서 날마다 시위와 데모 장면들을 보던 기억이 있어. 그러다가 훗날 대통령이 된 아저씨가 나와 그게 항복인지 아니면 에누리치는 기만인지 하여간 무슨 선언인가를 했다지. 병원에 있던 환자, 간호사, 보호자 같은 사람들이 놀라 웅성웅성……. 아, 그 해가 87년이었어. 그러던 때 인천의 한 가난한 마을에서 기차길옆이 시작했고, 세상의 속도와 또 다른 속도로 공부방의 스무 해가 지난 거다.
2007. 04. 15 오후 두 시, 여섯 시
스무 해가 된 기차길옆 공부방 공연이 봄을 준비하고 있다. 스무 해가 된 만석동의 눈물과 희망이 또 한 번 봄으로 세상 사람들에게 손을 건네려 하고 있다. 더 내려갈 곳 없는 절망이었기에 꿈을 꿀 수밖에 없었노라고, 그 꿈은 내 아픔에서 탈출하는 것이 아니라 나와 같은 아픔을 가진 또 다른 이들과 동무가 되는 데 있다는 것을, 가난한 이웃들 속에서 밥과 집, 평화를 나누는, 나누고 또 나누어 마침내 나눌 것이 없을 만큼 가난해져 모두가 넉넉해지는 공동체를 바라며 살아온 스무 해의 삶으로 사람들을 초대한다.
아이들, 공연
기차길을 안 뒤로 해마다 그 봄의 사연에 평화로운 눈물을 흘리곤 했지. 공연을 보는 시간만이라도 아이들의 이웃, 아이들이 꿈꿔 손잡은 세상의 이웃이 되는 듯 했다. 감히 세상에 그보다 더한 공연이 또 있을까 생각하곤 하면서. 해마다 아이들은 꼬박 반 년 가까이를 준비해 단 하루 공연을 해 오고 있었지. 그것만으로도 입이 벌어지는 일이지만 실은 그것도 아니, 해마다 아이들이 펼치는 공연은 바로 그곳 공부방이 살아온 시간을 다 걸고 있었으니. 아이들이 펼쳐 보이는 것은 언제나 공연이라는 이름으로 걸어지지만 그것은 아이들의 하루하루, 공부방의 걸어온 길 그대로였어. 아이들의 공연에 빠지지 않는 ‘희망’과 ‘평화’라는 것 또한 어느 멀고 아련한 곳을 부르는 것이 아니라 아이들이 몸소 겪고 아파한 절망과 손을 잡아 가꾸어온 희망에서 보여주었고. 기차길 공연은 바로 아이들의 삶이었고 공부방의 몸부림이었으며 그리고 이 땅 가장 낮은 자리에서 우리 사는 세상을 비추는 촛불인 거였어. 그러니 올 봄에 열리는 스무 번째 정기공연은 꼬박 스무 해를 준비한 거라 할 수 있겠지. 그 스무 해의 만석동과 그 스무 해의 공부방, 그 스무 해의 아이들, 그리고 그 스무 해를 살아온 내 모습과 이 세상의 스무 해…….
보고싶어
이번에는 가보지 못할 거야. 해마다 공연이 있으면 아이들 가운데 하나가 초대장과 함께 편지를 써 보내주더니 올 해에는 아저씨가 여기에 들어와 있어 큰이모가 그걸 대신 하셨나 몰라. 생각 같아서는 주말에 일 마치면 일옷 갈아입고서 그리로 달려가고 싶지만 어려울 것 같아. 너무너무 보고 싶은 마음이지만 보고 싶은 거라고 그걸 꼭 다 보려 하는 것도 욕심이 되는 것 같고. 아저씨, 여기에 있는 동안에는 다른 것 다 꾹꾹 눌러 참고서 집 짓는 일만 열심히 배우려고. 이라크에서 너희가 맺은 동무들 가슴 아픈 이야기가 계속 전해오고 있어도, 대추리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끝내 집터와 논밭을 빼앗기고 눈물바람으로 그곳을 떠나는 아픈 소식을 보면서도, 돈과 무기 앞에서 우리 가난한 사람들을 다 주무르는 무서운 일이 펼쳐지고 있어도, 지금은 그 모든 것 다 가슴에 꾹꾹 눌러두고 집 짓는 것만 열심히 배우려 하고 있어. 글쎄, 나중에는 만석동 아닌 어느 곳에 너희들 손으로 또 다른 마을을 이뤄 가겠지? 그 때 내가 가서 집 지어주겠다 하는 말 같은 건 하지 않을게. 뭐니뭐니 해도 집이라는 것 제 손으로 짓는 게 제일일 테니까 말야. 그 대신 너희들 집 짓는 일에 손이 필요하다 하면 언제라도 달려가 거들고 싶어. 그 때는 꼭 불러주렴. 아저씨는 지금 나이 서른다섯이 다 되어 처음으로 스스로 사는 법을 배워가고 있는 거거든. 돈이나 무기로는 침범할 수 없는 평화, 그게 어디에 있을까를 찾고 싶어서인지도 몰라.
고마워요
올 공연에 보러 가지 못해도 너무 서운해 하지는 마. 공연 보러 올라가지는 못하지만 그 하루가 아니라 더 많은 날들로 너희와 늘 함께 하고 있으니까 말이야. 이번 너희들 공연을 생각하면서 정말 이런 사람들이 그 공연을 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이 들곤 했어. 그 동안 너희가 동무로 맺어온 이라크 아이들, 대추리 할머니 할아버지들, 그리고 어느 먼 나라에서 일하러 와 힘들게 살아가는 분들, 그리고 너희가 지금껏 손잡아온 세상의 약한 사람들, 우리와 눈물이 닮은 사람들……. 아, 이번 스무 해 째 공연은 또 얼마나 눈물겨운 감동이 가득할까? 정말로 고마웁고 고마워라. 아이들, 이모 삼촌 모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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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권이 필요하신 분들은 여기에 이름이랑 주소를 남기면 된답니다.
“그래, 그렇게 해마다 반복되는 갈등과 아픔들을 또 넘어가고 있었어. 얼핏 생각하면 스무 해 동안 해마다 똑 같은 갈등과 아픔이 되풀이 되었지. 우리는 또 그 때마다 그 고비들을 잘 견뎌왔어. 우리에게 문제를 던져주는 것은 늘 아이들이었고, 그 문제를 푸는 열쇠도 아이들이 가지고 있었어. 20주년이라는 올해도 마찬가지야.
20년을 같은 자리에서 늘 똑 같은 일상을 되풀이하며 지내온 탓에 가끔은 그 긴 시간동안 우리에게 남은 것이 무엇인지 회의가 찾아들기도 하지만. 그 때마다 확인하게 되는 건 우리에게는 그저 '사랑'밖에 없다는 거야.
앞으로 20년 하고 얼마가 더 남았는지 모르지만 그 남은 시간에도 우리는 여전히 사랑하고, 그 사랑 때문에 아프고, 절망할 거야. 우리는 그 사랑으로 이라크 아이들과 친구가 되고, 대추리 주민들의 이웃이 되었고, 우리보다 더 약하고 가난한 이들의 동지가 되었고 앞으로도 그럴 거야.” - 첫 번째 총연습을 마치고 게시판에 큰이모가 쓴 글 가운데에서
기차길옆작은학교 정기공연 - 우리 아이들의 나라는 17 홍보영상 보기
공연2주를 앞두고 있는 아이들의 하루하루 모습들.
학교 끝나고 만석동 아이들 돌아오는 시간. 우와~! 소리들리며 나타나는 1, 2, 3학년 녀석들 때문에 잠자는 듯 조용하던 동네가 깨어납니다.
학교다니면서 공연 연습하는 동안 체력이 약한 아이들은 많이 지친답니다. 기초학습시간에 뒹굴며 책도 읽어주고 찔통도 받아주면서 기초학습을 해요.
이 시간쯤 강화 공부방 초등부 아이들. 학교 끝나면 운동장에서 만나서 다 같이 강화집으로 와요. 연습이 있는 날은 다같이 만석동으로~!
강화 초등부 단체 사진^^
중, 고등부는 목요일에는 학교 끝나고 교복도 못 갈아입고 만석동으로 와서 연습하고 밤 9시가 넘어 강화로 떠나요. 그래도 강화 식구들이 오는 목요일과 일요일날 아이들은 제일 신이 납니다.
만석동 고등부는 연습이 끝나고도 공부를 해요. 실업계, 공업계 아이들 요리시간이 있는 날은 밤 11시가 넘어서 만든 요리를 가지고 와서 다 같이 나눠 먹으면서 난리가 나지요. 이렇게 같이 먹고 즐기고 나눈 시간들이 모여 공연의 '신비로운 힘'이 태어난답니다.
인문계 아이들은 밤 12시까지 공부를 합니다. 피곤하고 지친 몸을 추스리며 공부하는 아이들을 보면 이모 삼촌들은 안스럽기만 하지요. 하지만 힘든 시간을 이겨내면 분명 아이들 마음에 힘이 생기겠지요.
봄과 함께 밀려드는 황사바람 속에 우리 아이들처럼 힘없는 대추리 할머니 할아버지, 평화바람 이모삼촌들은 땅에서 밀려나고, 사람들의 미래를 어둡게 하는 세상의 일들은 하루하루 거세어지고 있습니다.
그래도 약하고 가난한 사람들끼리 '동무'가 되어 함께 사는 꿈을 꾸는 '길'을 함께가는 우리 아이들의 웃음은 약해지지 않을 거예요.
4월 15일 공연에 와서 함께 해주세요.
'길, 동무, 꿈'의 힘을 함께 나누어 가져요, 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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