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전히 그곳은
참으로 오랜만에 피켓이라는 걸 만들었다. 그것도 예전처럼 어디 사무실 같은 데서가 아니라 방바닥에 색지를 펴 놓고. 어차피 써 오던 것이 있으니 그냥 나갈까 하다가 무슨 마음인지 문방구에 나가 색지랑 매직 따위를 샀다. 색지 사 본 것도 이게 얼마만인지. 색지에 글씨를 쓰고, 그것을 두껍게 칠하고. 오랜만에 취해보는 매직 휘발 냄새. 신문과 뉴스에서는 팔레스타인 소식을 찾기 어려워졌지만 그 사이에도 이스라엘은 국경지대 폭격을 멈추지 않고 있고, 탱크를 앞세운 군사작전도 계속되고 있다. 모든 것이 짓밟히다 시피한 그곳 사람들에게 보내어지는 구호 물품을 실은 선박마저 이스라엘은 그 길을 막았다. 물론 점령과 봉쇄는 끊이지 않았고, 그 아픔의 땅에서 전해오는 '현지의 목소리'들은 어느 새 망각에 익숙해진 마른 가슴을 젖어들게 한다.
팔레스타인의 눈물
요사이에는 길바닥으로만 다니느라 제대로 글 한 줄 읽지 못하고 지내느라 주황색 겉장으로 된 책 한 권 가방 안에서나 굴러다니곤 했다. 그래도 짬짬이 읽는 것이, 아아 일상이라는 것, 진정 한 세계를 만난다는 것은 결국 그 미세한 순간의 진실들을 만나는 것에 있겠다는 걸 또다시 여실히 느끼고 있다. 팔레스타인 작가들의 글을 모아 엮어낸 <<팔레스타인의 눈물>>이라는 책. 그 땅의 점령촌이, 검문소가, 그 차별과 고립, 폭력의 질서가 얼마나 한 인간의 삶과 일상을 비참하고 비루하게 만드는가는 아무리 그것의 실상을 개념으로 안다 해도 나로서는 쉽게 느끼지 못하고 있던 거였다. 직장을 오갈 때마다, 친척 집을 방문할 때마다, 혹은 학교 길에서마저 그 고립장벽으로 인해, 닫혀버리고 마는 검문소 때문에 오도가도 못한 채 긴 시간을 막혀 있어야 한다는 거야 이제 막 이런저런 자료들에서 좀 더 자세히 알게 되었지만, 일상의 순간들에 배어있는 그 구체적 통증이 어떠한가까지 예민하게 느끼지는 못하고 있었다. 아, 얼마나 나는 인간에 대한 상상력, 삶에 대한 총체적 이해가 모자란가를 다시금 절감. 그러나 문학이란 그런 것이었다. 나처럼 일상을 살아가는 인간의 가슴, 일상의 구체적 진실에까지 나를 이입할 줄 모르는 이에게도 그것을 느낄 수 있게 해 주는 것. 한 때 나는 문학이 다 무슨 소용이냐고, 책으로 읽고 글줄 안에서 슬퍼하고 아파하다 말 뿐인 그깟 문학이 다 무어냐고 선배들 앞에서 떼를 쓰듯 말하기도 했지만 이제야 비로소 알 것 같아. 그것이 가진 힘을, 그 역할을.
아이들과 함께
종각 역에 내려 이스라엘 대사관이 있는 건물 앞으로 갔다. 그런데 벌써 먼 곳부터 그 쪽에서 쿵짝쿵짝 커다란 앰프에 사회자 목소리며 음악 소리 같은 것이 들려. 아마도 청계광장 소라탑 앞에서 또 무슨 행사인가가 있는 모양이었다.솔직히 반갑지 않은 마음. 이거 뭐 서울시에서 이상한 행사를 하나보다, 하필 일인시위를 하러 나가는 게 이럴 게 뭐람, 이건 아마도 일인시위를 방해라려는 겔 게야……하면서 되지도 않는 생각을 궁시렁궁시렁. 그러고는 팔레스타인평화연대에서 함께 유인물 선전을 나온 분들과 만나고, 준비해간 피켓을 들고 대사관 앞에 섰는데 건너편 행사장 무대에 병수 아저씨 그림 기후보호수가 걸려 있는 게 아닌가. 혹시 싶어 전화를 걸어보니 아닌 게 아니라 그곳 청계광장에 와 있단다. 그러냐고, 나는 그 건너 편 이스라엘 대사관 앞에서 일인시위 중이라 하니 아저씨도 놀란다. 것 참, 이렇게나 얼굴 한 번 보는구나. 평소 보자, 보자 해도 서로 시간이 안 맞아 보기가 어렵더만, 아무튼 약속 없이도 이래야나 볼 수 있는 사람들이 있다. 요사이 학교 앞을 다니면서, 집회를 하는 거리에서 얼굴 보는 이들도 다 그랬으니. 나는 피켓을 들고 섰고, 팔연대 회원 현미씨 님이랑 덩야핑 님은 열심히 유인물을 건네고…… 그렇게 한 시간이 지날 무렵 누군가 아는 척을 해 보니 고마리 선생님이었고, 아이들이 그 앞을 둘러쌌다. 반갑고, 놀랍고, 당황스러워. 마침 고마리 선생님은 가르치는 아이들과 함께 병수 아저씨 행사를 보러 나온 길이었고, 그 길에 일인시위하는 곳에도 찾아온 거였다. 지난겨울 갈천에서 연 고마리 캠프에서도 만났던 아이들. 아이들이 피켓들고 선 곁으로 서서 함께 노래를 불렀다. <평화가 무엇이냐>를 불렀고, <북쪽 동무들>, <달과 별>을 불렀다. 찬 바람, 썰렁한 도심 복판에서 아이들과 함께 노래를 부를 수 있다니 따뜻하고 기뻤다. "이스라엘 대사관을 왜 추방해야 돼요?" "이스라엘 나라가 팔레스타인한테 어떻게 했어요?" "그런데 미국은 왜 이스라엘 편만 들어요?" 아는 만큼 얘기해주고 난 뒤에 혹시 싶어 아이들에게 덧붙였다. "으응, 그렇다 해서 이스라엘 사람들이 다 나쁜 사람들은 아니야. 아까 어느 아이가 말하는 것처럼 이스라엘 다 죽여, 그래서는 안 돼."가까운 중국집으로 가 짜장면을 함께 먹은 뒤 아이들과 못다한 이야기.
테러를 말하는자, 테러를 일삼는 자
그래, 오늘 내가 들고 선 피켓은 그거였다. "팔레스타인인들과 하마스는 테러집단이 아니다. 진짜 테러집단 이스라엘 대사관을 추방하라 / 용산 철거민들은 도심 속 테러리스트가 아니다. 진짜 테러리스트들 김석기를 구속하고, 이명박은 퇴진하라."이전 냉전 시기 매카시즘이 뒤덮던 때자신의 이익에 반하는 자들을 몽땅빨갱이 공산주의자로 몰아붙였다면 냉전이 해체된 뒤로는 무조건 테러집단, 테러리스트로 몰아부친다. 그네들에게는언제나 가상의 적이 필요하다. 자신들의 폭력을 정당화시킬, 그래서 시민들의 공포를 부추겨 그 공포에 대한 정의의 싸움을 한다는 합리화를 시키게 해 줄. 그러니 이제 그들에게 저항하는 이들은 무조건 테러집단, 테러리스트들일 뿐이다. 하지만 진짜 테러집단, 테러리스트는 과연 누구인가.이스라엘 대사는 천오백의 팔레스타인 민간인, 그 가운데 오백이 넘는 어린이가 죽은 한 달 전의 학살을 두고도 테러집단으로부터 이스라엘을 보호하기 위한 정당한 군사작전이었다고 온 데로 언론플레이를 하고 다녔다. 우리가 이곳에서 저 너머 눈물젖은 땅의 아픔과 연대하기 위한 구체적인 행동 가운데 하나-이스라엘 대사를 추방시키는 것.
(사진 가져온 곳은 팔레스타인평화연대 자유게시판 현미씨 님이 올린 후기글)
* 그날 더 많은 사진들이 있는 곳 (고마리와 글쓰기 까페)
그리고 뒷이야기
늘 병수 아저씨 만날 때마다 투덜거리며 하는 말. 하여간 아저씨는 뭔 일 있을 때 만나면 안 된다니까……. 그치만 꼭 일이 있을 때만 만나는 건 이 무슨 운명인가. 행사 정리 다 되었다면서 차나 한 잔 마시고 헤어지자 해서 행사장으로 나가보니 으악, 일거리가 천근이다. 얼음조각 하느라 부수고 깨뜨려낸 얼음덩이들을 서울시청에서 다 치우라고 했다는 것. 다른 때야 그냥 녹게 버려두곤 했는데 명박의 성지인 청계광장은 그래서는 안 되나 보다. 아님, 날이 추워 얼어붙으면 사람들 다니기에 힘들기는 하겠다. 암튼 얼음인지 빙하인지 마땅히 도구도 없이 그것들을 다 치워야 했어. 으이그, 내가 미쳤지, 멀리서 아저씨 보이면 피해갈 일이지, 뭘 반갑다고 먼저 연락하고 뛰어갔는지. 투덜거리며 두어 시간 그 추위에 땀을 삐질 흘려가며 노가다를 했다. (그치만 겉으로야 맨날 이리 투덜대도 그 진심이야 다 아는 거.) 그러고는 찻집으로 자리를 옮겨 머루주를 두어 잔 했고, 일부러 나온 배추 선생님도 몇 달만에 함께 만나.
그렇게 우연히 반가운 이들을 한꺼번에 만나기도 한 데다 나로서는 또 특별한 만남이 있었는데 늘 말로만 듣고, 진보 블로그에서만 보아온 덩야핑 님을 만난 거였다. 지난 12월 대사관 앞 집회에서는 앞으로 지나치는 덩야핑 님을 보고 나도 모르게 고개를 꾸벅 인사를 하다가, 아차 하고 혼자 멋적어 뒤돌아선 적도 있어. 그니까 나야 블로그에서 늘 보아왔기에 잘 아는 사람인 양, 뭐랄까 마치 무슨 연예인 같은 사람을 봤을 때 아는 사람 본 것 같아 나도 모르게 인사를하듯 그랬던 것이다. 아까도 대사관 앞에서 만나 현미씨 님이 소개를 시켜준다 하는데 나도 모르게 "아, 저는 잘 알아요." 하고 말을 해. 참나, 알면 얼마나알겠다고. 아무튼 그런 식으로, 말하자면나는 덩야 님의 팬이었던 것인데 만났다는 것이다. 그러고 나서다시 막걸리에 이야기를 나누는데, 으아 환상은 하나도 깨지지 않았어.좋은 사람, 착한 사람, 겉이 없는 사람이라 했는데정말 그런 느낌이었다. 좀처럼 낯선 사람에게 가까이 못하고, 말 한 마디 건네지 못하는 나이지만 덩야 님 하고 앞에서는 그런 것이 하나도 없이 속엣 말부터 시작할 수 있었으니. 고마운 마음에 악수를 청했다.
'냉이로그' 카테고리의 다른 글
[더작가의 목소리] 금대리 아저씨에게 (4) | 2009.02.20 |
---|---|
슬픈 축하 (0) | 2009.02.19 |
용산참사범국민추모대회를 다니면서 (2) (12) | 2009.02.15 |
용산참사범국민추모대회를 다니면서 (1) (2) | 2009.02.15 |
[길동초 0212] 그 까닭 (0) | 2009.02.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