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픈 축하

냉이로그 2009. 2. 19. 23:50

슬픈 축하

은국이의 병역거부선언 기자회견이 있었다. 그런 자리에 많이 다녀본 건 아니지만 오늘 자리는 기자회견이라기보다는 기쁜 눈물의 예식라도 치룬 느낌이었다. 흔히 떠올리는 것처럼 마이크가 놓인 긴 책상 뒤로 발표문을 읽을 사람들이 줄지어 앉아 있고, 발표문을 읽은 뒤 기자들의 질의응답으로 마치는 회견이 아니라 그이를 아끼고, 그이의 선언을 지지하는 이들이 모여 축하와 안타까움을 함께 나누는 자리. 그 비슷하게는 여섯 해 전에 가 보았던 창근이가 <축하의 식탁>이라는 이름으로 작은 까페를 빌려 소박하게 차린 음식을 나누며 병역거부선언을 하던 기자회견이 있었다. 오늘도 그러했다. 입영 영장을 받은 은국이의 징집일. 군대 대신 감옥을 선택, 스스로 옥고의 길로 걸어들어갈 이의 다짐을 마주하는 심정은 결코 가벼울 수만은 없었다. 하지만 회견장은 은국의 바람처럼 무겁거나 침울하지 않게, 젖어드는 마음일지언정 웃음을 자주 터뜨리게 하는 슬픈 축하의 자리가 되게 했다.마지막 순서로 은국이 자신의 소견을발표할 때 그랬던가, 자신은 감옥을 선택한 것이 아니라고,자신이 선택한 것은 평화였지 감옥이아니었노라고. 그 누가 감옥가기를 원하겠느냐며, 그저 자신의 신념에 따라 평화를 선택할 뿐이지만이 사회가 그것을 용납치 않기 때문에어쩔 수 없이 감옥에가게 되는 것이라며 말이다. 그래,은국의 말처럼 그 친구는 군대가아닌비폭력과 비무장, 평화를 선택한 것 뿐이다.그러니 오늘 그자리를 함께 준비한 이들이눈물을 속으로 삼키며 그 선택을 기꺼이 축하할 수 있던까닭은그 선택의 댓가가 옥살이일지언정은국의 선택은 평화에있기 때문일 것이다. 누구도쉽게 택하지 못할, 평화 앞에서 떳떳할 수 있는, 자신의 신념에 자신의 삶을 일치시키는 그 용기있는 선택이야말로 축하받아 마땅한 것이니 말이다. 그래서일 것이다.나야 기껏 창근이의 선언과 오늘 은국의 선언자리에 가 보았을 뿐이지만 대부분양심과 신념에 따른 병역거부자들의 기자회견은 매번 이처럼 슬픈 축하의 자리 들로되어온 까닭은.

아들의 어머니

열흘 전 쯤이었나, 은국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곧 징집일이 돌아와 병역거부 기자회견을 준비하고 있는데 혹 그 때까지 서울에 있으면 와 줄 수 있겠느냐고. 가능하면 이라크 평화팀으로 함께 활동한 팀원으로 지지 성명글 같은 것을 준비해주기를 바란다며 말이다. 그 때까지만 해도 내 일정은 더 서울에 있을 수 없어 곧 양양으로 돌아가 집 짓는 일에 들어가기로 한 터라 안타까운 마음으로 사정을 말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제재소 나무 주문이 밀려 일을 시작하는 날이 늦춰지면서 서울에서 남은 일을 더 볼 수 있었고, 따로 무슨 글을 준비하진 못했지만 자리에 함께 가 손이라도 잡아주고 싶었다. 회견장에는 조금 늦어 도착했다. 홍대 옆 극동방송국 길 건너 샤라는자그마한까페. 발표자들이 앉은 작은무대를 바라보며 둥그렇게 앉은 사람들이 자리를 가득 메웠고, 바텐 옆으로 마련한 또다른 무대에서는 축하의 공연 또한 준비되고 있었다. 내가 막 들어설 때는 은국의 어머님 말씀을 듣는 차례. 누구보다 가슴 아파하실 분의 이야기를 듣는 순서이기에 나도 모르게 슬몃 고개를 떨구며 사뭇 긴장스런 마음을 겸허히 다잡고 있었는데, 오히려 어머니는 그러한 이들의 긴장을 풀어주는 말로 이야기를 시작하셨다. 그렇게들 우울해하지 말라고, 당신이 글에도 써오신것처럼 이 애는 나한테는 못된 놈, 못된 아들이지만 그런 아픔은 어머님이 감당할 테니 다들 가벼운 마음으로 이 애의 선택에 지지하고 응원해 달라고…. 그렇게 사람들 얼굴에 웃음을 물게 하며 시작한 어머니 말씀은말 그대로 감동이었다. 그 어떤 미려한 수사나 표현이 있어서가 아니다. 어머니 그대로의 일상스런 말로 그 동안 어머니가 보아온 은국의 모습, 어머니가 감당, 받아들이고 있는 아들의 선택, 그리고 아들의 선택을 통해서 바라보는 세상에 대한 이야기까지. 어머니 말씀이 감동이었던 건 말씀이 아니라 어머니, 당신이 감동스러운 분이었기 때문이다. 중간중간 그 자리에 함께 와 있던 병역거부를 고민하는 은국의 친구들을 보면서, 너는 왜 안 하냐고, 왜 우리 아들만 시키냐고, 너도 얼른 하라며 웃음을 자아내기도 했지만 '군대를 거부하는 것으로 감옥에 가는 것은 내 아들이 마지막이기를 바란다'는 말씀은 가슴을 울리게 했다.

소견서

감동스런 어머니의 말씀에 이은 은국의 이야기. 그것은 다짐을 이미 넘어선 고백이었고, 스스로에 대한 확인이었다. 부러 긴장을 숨겨 장난스러운 말부터 꺼내는 은국은 자신이 써온 소견서를 천천히 읽어내려갔다. 며칠 전 전화통화를 하면서 소견서가 잘 안 써진다면서, 어떻게 써야할지 모르겠다는 고민을 얘기할 때 그저솔직히 네 마음 그대로만전하기만 한다면 그것으로 좋지 않겠냐고,진솔하게너를 들여다 봐소박하게 쓰려 하면 잘 쓸 수 있을 거라고그닥힘이 되지 못할 말 밖에 하지를 못했다. 은국은 글을 읽기 시작했고, 늦게 도착한 나는 자료집을 미처 받지 못해 귀를 기울여 들을 수밖에 없었는데 은국의 글은 첫 단락부터 빨려들어가기에 충분했다. 어린시절부터 군인에 대해 가지고 있던 상, 그리고 자신의 생각과 신념이 자라오던 모습의 장면과 장면들. 결코 그 신념이라는 것이 관념으로 떠받치게 된 것이 아니라 삶의 터널을 지나면서 자연스레 자라온 것임을, 그리고 그 깨달음과 넘어섬의 결절들이 우연의 산물이 아니었음을 말해주기에 충분한 내밀한 고백. 은국은 이라크에서의 활동 그리고 팔레스타인에서의 활동을 떠올려 얘기하던 대목에서 잠시 마이크를 내려야 했다. 가까스로 울먹임을 가다듬어 끊긴 낭독을 잇는 은국이는 그 순간 순하고 약한 한 마리 짐승이었다. 나중에 봉화에서 올라왔다던 은국의 한 친구가 그런 말을 했던가. 처음 만날 때 은국에게서 빛이 나는 걸 느꼈다고, 그 느낌이 어디에서 오는지를 물어 답을 찾은 것이 눈물이 많아 빛이 나는가 보다 생각을 했다면서. 은국이 쓴 소견서는 자신의 신념이 어떻게 자라왔는지 그 육체를 말해주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그 신념에 따라 살고자 한 그간의 몸부림을 담아 들려주었다. 은국은 이제껏 내가 알아온 모습보다 훨씬 더 깊어져 있었고, 각을 풀어내고 있었다. 끝까지 다 읽은 은국의 소견서는 감동스런 자기 고백이자 병영국가를 사는 한 청년의 평화 선언이었다.

이어진 공연

이어진'루드의 상상력' 팀의 공연. 조약골이 먼저 <애국자가 없는 세상>을 불렀다. 정생이 할아버지의 시는 말할 것도 없지만, 그에 붙인 곡 또한 시가 그리는 안타까운 절망의 바람을 그렇게나 잘 담아내고 있어. 재작년 빌뱅이 오두막 마당에서 할아버지에게 들려드리겠다며 부르던 기억이 나. 국가가 아니라, 군대가 아니라 꽃을 사랑하고, 연인을 사랑하고, 자연을 사랑하고, 무지개를 사랑하는 세상. 조약골에 이어 루드가 부른 <청계천 8가>. 노래를 정말 잘한다는 얘기를 이런저런 자리에서 듣기는 했지만 루드의 노래를 실제로 듣는 건 처음이었다. 정말 잘 해. 앵콜 요청으로 루드가 한 곡을 더 불렀고, 그 다음에는 은국이도 기타를 잡고 노래를 불렀다. 밥 딜런이 부른 <천국의 문을 두드려요>. 은국은 꼭 이 노래를 부르며 병역거부를 선언하고 싶었노라며 '어머니, 이 계급장을 떼어주세요. 이제 나는 이것을 쓸 수 없어요… 어머니, 이 총을 내려주세요, 이제는 더이상 누구도 쏠 수 없어요…' 하는 노랫말을 상기시켰다. 중간에 노래가 끊이긴 했지만 마음을 다해 부르는 노래는 언제나 또 다른 가슴을 울리게 하는 법.

애국자가 없는 세상 / 권정생 시, 조약골 곡, 노래

미안, 안녕

소견 발표를 마친 뒤 공연을 준비하는 사이 누구라도 은국에게 해주고 싶은 이야기를 해 달라는 시간이 있기도 했어. 얼마 전 병역거부를 한 우공이라는 분이, 봉화에서 올라왔다는 어느 아저씨 한 분이, 은국의 어린시절부터 이모 스님으로 지내왔다는 스님이 가슴 절절한 이야기들을. 이야기가 끝날 때마다 은국이가 몇 번이나 내 이름을 불러 한 마디 하라고, 기범이 형도 무어라 얘기 좀 해 달라고부탁을 하는데 나는당황스러워 몸을 꼬며 고개를 젓기만 했다.재차, 삼차이름을부르는데 어떻게 할 줄을 몰라 그저 "건강하게 잘 다녀와라." 한 마디로 넘기고 말았는데 그게 참 미안해. 부끄럼 같은 거 타지 말고, 나도 은국에게 힘이 될 수 있는 말,어머니의 말씀과 은국의 소견서를 들으며들던 감동들을좀 더 정성껏 이야기하지 못해 미안.잘 다녀와라, 은국아. 지난 번 양양에 다녀갈 때 잘 챙겨주지 못한 것도 미안. 글쎄, 오늘 기자회견장에서 내내 떠나지 않고 떠오르는 얼굴이 있어 마음이 더 아파오기도 하더라. 아마 다녀오고 나면 너는 더 훌쩍 크고 깊어져 있겠지. 네 스스로 신념을 저버리지 않고 평화를 선택한 것 정말로 축하한다. 안녕.

글쎄, 이런 말이야 군소리밖에 되지 않을 테지만, 혹이라도 아직도 양심과 신념에따른 병역거부를 비겁한 군기피자 정도로나 생각하는이가 있을까 싶어 덧붙인다. 어머니 표현대로라면'얘는 사 주만 훈련받고 나오면 지하철 같은 데서 왔다갔다하면서 예쁜 아가씨들이나 보고 그러는 공익으로 갈 건데 굳이 병역거부를 하려 한다고.' 말하자면몸 편하기를 선택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어려운 댓가를 치뤄야 하더라도 평화를 택하겠다는 것. 또한 은국의 소견서 맨 마지막 문장은 이렇게 맺는다. '나는 생명을 보살피는 의료인의 한 사람으로서 군사력 확대를 반대하고 모든 종류의 전쟁을 거부하는 것이 병을 치료하는 행위와 다르지 않다고 믿는다.' 은국은 한의대생일 때부터 이미 병역거부자로 살아왔고,공부를 마친 두 해 전부터 의사로 살고 있는 중이다.군사주의가 아닌비폭력, 비무장의 평화주의를택한 이 행동에 이 사회에서 가해질제제나 불이익이 어디 당장의 감옥행 뿐이겠는가.숱하게맞게 될 폭력의 시선과금지하는 사슬들….우리사회에서도대체복무를 허용하겠다는 입장이 2007년 국방부에서 발표되었으나 지난 해8월 원점에서 재검토하겠다는 것으로 뒤집어지고 말았다. 자신의 양심, 신념에 따라 사는 것조차 자유로울 수 없어 온갖 편견과 왜곡에 묶여 살아야 하는 세상.

* 관련 싸이트

전쟁없는세상(양심에 따른 병역거부자들과 후원인들의 모임)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권 실현과 대체복무제 개선을 위한 연대회의

[프로메테우스] 한의사 은국 “파병국가의 군인이 될 수 없다” 2009. 2. 19

Posted by 냉이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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