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정사 극락전

휴우우. 이제야 어느정도 봉정사 극락전에 대한 정리를 마쳤다. 이 건물 하나만 붙잡고서 며칠이 걸렸는지 모른다. 강의만 해도 다섯 시간 동안 아홉 개의 건축물을 다뤘는데 그 가운데 두 시간을 온전히 이 건물 하나만 가지고 했으니……. 그래도 이렇게 끙끙거리고 하고 나니 봉정사 극락전에 대해서만큼은 적어도까마득한 막막함 같은 것 없다. 물론 공부라는 것이 알면 알수록 질문이 더드는 법이고, 차라리 아무 것도 모를 때야 무얼 모르는지조차 모르니,알 것 같다고 말을 하는 것이 얼마나 경망스럽고 위험한 일인지를 생각하지만 (아, 오직 모를 뿐!) 아무튼 그렇다는 것이다. 적어도강의에서 다뤄준 내용만큼은 알겠다 싶은 것이다.

이 모형 사진은 지난 주에 다녀온 고건축박물관에서 봉정사 극락전을 이리저리 뜯어보며 찍어둔 것인데 이제 책이며자료, 공책 따위다 치워놓고요 사진들만 앞에 놓고서 떠오르는대로끄적여 봐야겠다.

봉정사 극락전은 능인대덕이 창건했고,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건물이라는 둥, 그것이 묵서명에 지붕가구 수리 기록이 나와 있기에 추정할 수 있는 거라는 둥 같은 배경에 대한 이야기는 그냥 넘어가겠다.집의 가구 구조만으로 본다면 일단 보다시피 맞배지붕 건물이고, 처마 밑의 외목도리부터 주심도리, 하중도리, 상중도리, 종도리로 올라가는 칠량가 건물이다. 그런데 도리들의 모양을 잘 모라. 하중도리만 각재를 쓴 납도리이고 나머지는 모두 원형의 굴도리를 쓰고 있다. 맞배지붕 건물의 가장 큰 약점인 횡력의 취약함을 보강하기 위한 방편이다. 그 납도리가 세로의 방형인 것도 기억하자. 부재를 휨모멘트에 강하게 쓰는 모습이다. 종도리 밑부분부터 그 다음 상중도리로, 상중도리에서 하중도리, 주심도리까지 건너건너 이어가는 것이 보인다. 이렇게 종도리부터 주심도리까지 솟을합장이 이어지는 것은 이 건물이 유일하다. 다른 건축물은 종도리에서 상중도리까지만 나가는 것이 보통이며 조선 중기 이후, 건물 천정을 가설하기 시작하면서부터는 아예 솟을합장재를 쓰지 않는다. 대공과 솟을합장재를 한 데 뭉뚱그린 사다리꼴 모양의 판대공만 대놓고, 그야말로 구조재 역할만 하는 것이다. 천장을 막아버리는데 무엇하러 공을 들여 모양에 신경을 쓰겠는가? 이 건물과 같이 천정이 노출된 연등천정의 구조에서는 대공도, 솟을합장재도 모두 구조재이면서 장식재 역할을 동시에 하는 것이다. 이렇게 측면 방향에서 볼 때 가장 중요한 것이라면 가운데 길고 튼실하게 뻗어올라가 종도리(와 종장혀)를 바로 받아내고 있는 어미기둥이다. 그리고 어미기둥을 기준으로 좌우대칭으로 서 있는 중고주와 귓기둥. 이 또한 맞배집의 취약한 횡력을 보강해주기 위해 갖게 되는 구조이다. 지금 보고 있는 측면과 반대편 측면의 어미기둥들이 양쪽에서 단단히 잡아준다. 이렇게 어미기둥을 세우려다 보니 대들보는 하나로 이어지지 못하고 기둥의 양쪽으로 나뉘어 맞보 형식으로 기둥 가운데를 관통하며 그 안에서 결구가 된다. 지붕뚫고 하이킥이 아니라 기둥뚫고 대들보! 어디 대들보만 그러한가? 양쪽의 중고주의 기둥머리를 잡아주는 창방 또한 기둥을 뚫고 있고, 귓기둥의 창방은 다시 그보다 키가 큰 중고주를 뚫고 들어간다. 이 모습은 말하자면 천두식 구조와 닿고 있는데, 천두식 구조라는 것은 기둥들이 쭉쭉 뻗어 올라가 도리들을 바로 받아주는 양식을 말하는 것이다. 사실 도리를 바로 기둥이 받는다는 것은 구조적으로 안정감을 준다. 그러나 그렇게 매번 기둥이 도리를 직접 받으려니 내부공간을 쓰는 데는 불편하지 않겠나? 조금만 움직이려 해도 기둥이 걸리고, 탁 트인 공간 없이 자꾸만 기둥이 막아서게 되고. 그러니 건축의 발달로 따지면 내부 공간의 필요에 따라 천두식 양식은 대량식 양식으로 바뀌어간다 할 수 있다. 대량식이란 말 그대로 대들보를 통해 지붕 하중을 바깥 기둥열의 기둥에 전달해, 마침내 지반을 딛고 선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가로부재와 세로부재를 중첩으로 사용하면서 실제로 지반 위로 서는 기둥들은 바깥 테두리에만 두른다는 것이다. 건물 내부에 기둥을 최소한으로 줄일 수 있으니 내부공간 활용도가 훨씬 높아지는 건 당연한 말이다. 단점이라면 천두식 양식보다 구조면에서 불안할 수 있따는 것인데, 그 불안함을 해소하기 위해 온갖 방법이 고안되었고, 지금 이 공부도 그 방법을이해하고자 이 골머리를 싸매며 하고 있는 것 아니겠나? 어쨌든 봉정사 극락전은 종도리를 바로 받치는 어미기둥과 그 기둥을 관통하듯 가로지르는 대들보의 모습에서 천두식 양식이 어느만큼 쓰였다고 볼 수 있다. (사실 천두식 구조라는 것은 길고 굵은 나무가 충분히 있는 환경에서나 쓸 수 있는 것이라 우리나라에서는 잘 쓰이지 않았다. 중국에서도 길고 굵은 나무를 구하기 쉬운 남방 계열에서 많이 썼지, 북방에서는 대량식 구조를 많이 썼다. 그리고 우리나라는 중국의 북방 영향을 많이 받았고 말이다.) 자, 이 사진 하나만 보고서도 할 말이 끝도 없겠으나, 그러면 요기에만 너무 빽빽해지겠으니 이만 통과.

아, 아니, 이것 하나는 꼭 이 사진을 보며 얘기해야 한다. 측면부에서만 보고 설명할 수 있는 부재. 사진을 보면 오른쪽이 건물의 정면이 되고 있는데, 그건 무얼 보고 알 수 있냐하면 내부에서 불단의 후불벽을 만들어주는 기둥이 왼쪽에 서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내부의 오른쪽, 건물의 정면 쪽에는 고주가 서 있지 않다. 고려시대 맞배집의 가장 큰 특징이라면 내부가구 구조가 측면까지 그대로 가는 것인데, 앗, 그렇다면 봉정사 극락전은 거기에서도 예외가 된다. 내부에는 어미기둥이라는 것도 없지, 대들보도 끝에서 끝까지 하나로 놓여 있지, 게다가 정면 쪽에는 고주가 아예 없질 않은가? 그건 그렇고, 어쨌든 여기에서 말하고자 하는 부분은 사진에서 볼 때 오른쪽에서 두 번째 기둥, 중고주는 옆으로야 어미기둥으로 창방을 가로지를 수 있지만 안쪽으로는 창방을 같이 걸어줄 기둥이 없는데, 보다시피 바깥으로 뺄목이 나와 있는 것이다. 왼쪽에서 두 번째 기둥이야 사정이 다르다. 옆으로 어미기둥에 창방을 걸고, 안쪽으로는 후불벽을 위해 세운기둥과창방을 걸어 그 두 창방의 머리를 이쪽 저쪽으로 빼면서 십자로 결구를할 수 있으니 말이다. 그런데 오른쪽 중간에 있는 기둥의 창방 뺄목은 어떻게 된 것일까?아, 심심한데 바로 답을 쓰지 말고 수수께끼로 남겨두어야겠다.(수수께끼입니다. 맞추는 분에게는 상품…… 으로 뭘 하면 좋을까? 으음…… 영월 동강의 자랑 올갱이 해장국 한 그릇 되겠습니다. ㅎㅎ) 아무튼 그것을 보면 고려시대 사람들이 얼마나 치밀하게 건축을계획하고 시공했는지를 알 수 있다. 또한 그런 면에서 다시 한 번 고려시대 사찰이라는 것이 전면과 측면, 후면까지 장식적인 요소를 많이 고려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조선시대로 가서는 예불을 사찰 안에서 하게 되지만 고려시대에는 사찰 안으로는 일반 신도들이 들어가지 않는, 예불 자체를 바깥에서 치루는, 그래서 불전 앞마당에서 예불을 치룬다 하여 '야단법석'이라는 말까지 나오게 되는 것이니, 말하자면 사찰은 하나의 탑처럼 신도들이 바깥에서만 보는 건축물이라는 것이다.예불을 사찰 안에서 올리는 조선시대로 가면 측면과 후면에는그렇게까지 신경을 쓰지 않는다. 들어가면서 바라보게 되는 전면과 사찰 내부는 어마어마할 정도로 화려하게 할지라도 말이다.

아, 바로 이 사진이 있네. 이 사진을 잘 보면 위에서 낸 수수께끼의 답을 찾아낼 수 있겠다. (암튼 혹시 올갱이 해장국에 눈이 먼 분이 있다면 열심히 찾아보기를 ^ ^). 보자, 이 사진을 놓고는 무얼 말할까? 처마 쪽을 보자. 이 건물은 앞뒷면이 모두 겹처마로 구성되어 있다. 말하자면 서까래를 한 번 빼고 그 위에 평고대로 앙곡을 잡은 뒤에 그 위로 부연이라고 하는 사각진 서까래를 한 번 더 올리고, 그 위에 다시 평고대를 올렸다는 뜻이다. 그래서 아래 평고대를 초매기, 위에 있는 부연 평고대를 이매기라 하는데, 이 건축물에서의 특징 가운데 하나는 초매기가 통평고대로 되어 있다는 것이다. 평고대 위로 부연을 올리게 되면 부연과 부연 사이 생기는 틈을 조선시대에는 부연마다 옆구리에 홈을 파서 판자를 끼워넣는 식으로 마감을 하게 되는데, 봉정사 극락전은 아예 평고대에 부연 끼울 자리를 하나하나 다 파놓았다는 것이다. 그러니 공이 얼마나 많이 들겠는가? 어느 자리 하나라도 잘못 파게 되면 전체를 새로 파야 하니 일의 능률이나 효율로 봐서는 고달픈 일일 수가 있다. 그만큼 이 때의 건축물은 공을 많이 들여 지었다는 것이고, 그러한 방식은 조선시대로 가면서는 쓰지 않게 되는 古式수법이라 할 수 있겠다. 그리고 하나 더, 이 각도의 사진을 보며 얘기를 한다면 앞서 말했듯 이 건물은 대들보가 처마바깥을 받치는 외목도리와 저 뒷처마 바깥의 외목도리까지 이어지고 있는데, 고려시대에는 대들보의 춤이 그리 깊지 않아 외목도리와 주심도리를둘 다 받쳐주지 못하고 있다. 이것은 부석사 무량수전에서도 그러하고, 수덕사 대웅전에서도 그러한데,대들보가 주심도리를 직접 받아주지 못함으로써그 둘의 높이 차이를 극복하기 위해쓰는 받침목의 이름이 건물마다 다다르게 불리고 있다. 이 건물에서는 주심도리 아래 승두라는 받침목을 두어대들보와 높이 차이를 해결한다. (부석사 무량수전과 수덕사 대웅전은 초방이라는 받침목.) 그 다음에는 또 뭘 볼까? 공포를 이루는 첨차 얘기를 여기에서 할까? 아니다, 그건 공포를 좀 더 크게 찍은 사진을 보면서 하기로 하고…….

이건 정면의 사진이다. 우선 먼저 생각나는 것부터 적어보면 이 모형도에서는 외목도리 위에서 서까래를 받쳐주는 부재가 표현되어 있질 않다. 실제 건물에는 서까래를 거는 외목도리 위에 받침목을 한 번 더 대어주면서 앙곡(처마의 곡선)을 만들어주는데, 아쉽게도 그렇다. 모형을 보면서라도 그게 어떤 건가 확인해보고 싶었는데, 쩝. 이 입면의 모습을 보면 이제 아무리 비슷한 건물 뼈대가 나란히 있더라도, 이것은 봉정사 극락전이다! 라고 한 눈에 알게 해 주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기둥 위의 공포와 기둥 위 공포 사이에 하나씩 들어가 있는 복화반이라는 것 때문이다. 왜냐하면 복화반이 쓰인 건축물은 바로 이 봉정사 극락전 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 복화반은 장식재로서의 역할도 하겠지만 그 위로 장혀를 받아주면서 장혀가 휘거나 처지는 걸 방지해주는 역할을 한다 할 수 있겠다. 건물의 구조에서 이 복화반이 들어간 곳은 앞면에서 셋, 뒷면의 같은 자리에 셋, 그리고 측면에서 볼 때 종보를 받쳐주는 것이 둘(바깥 측면은 어미기둥이 바로 받쳐주니까 복화반이 없다.), 그리고 종보를 받치면서 계량 위에 올라 있는 것들이 둘, 둘, 둘, 둘 하여 모두 열여섯 개가 된다.

그러면 이제 부분에 대한 설명 말고 이 건물의 시공에 있어 이후 건축물과 다르게 중요한 점을 말한다면 그것은 바로 하인방과 기둥하부가 결구되는 방식이다. 그것은 얼마 전 수리복원을 하면서 건물을 뜯었을 때야 비로소 발견이 된 것인데, 하인방이 주먹장 형식으로 기둥과 결구가 되어 양쪽으로 쌍주먹장의 장부를 갖는다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하인방을 기둥과 결구할 때는 장부맞춤이라는 방식을 쓰는데, 말하자면 한 쪽 끝은 하나짜리 촉을 써서 통장부를 만들고, 또 한 쪽은 촉이 둘인 쌍장부를 만들어, 기둥을 먼저 세운 뒤 인방의 끝을 한 쪽씩 비스듬히 끼워넣은 뒤 촉이나 주선, 문선 따위로 단단히 고정을 시키는 것이다. 그런데주먹장이라는 방식은 결코 옆에서는 끼워넣을 수 없어. 위에서 내리꽂아야만 하는 것인데, 그렇다면 봉정사는 기둥을 먼저 세운 뒤 하인방을 끼운 것이 아니라 하인방을자리에 놓고 그 위에서 기둥을 내리꽂으며 지은 것이다. 왜 이렇게 해야만 했을까? 이것도 수수께끼로 남겨둘까?우리 전통 목조 건축이란 아주 간단히 말하자면 지붕의 상부가구의 하중을 대들보를 통해 기둥으로 분산시키고, 그 기둥이초석을 통해 지반으로 전달하면서 집을 서 있게 하는 방식이다. 이랬을 때 기둥(나무)와 초석(돌) 사이에는 따로이음부재나 고정부재를 쓰지 않고재질이 다른 두 접면의 마찰력으로 버티게 한다.여기에는물론 기둥 바닥에 그랭이를 떠 초석을 움켜쥐듯 완전히 밀착을 시켜 마찰력을 극대화하게도 하고, 애초 기둥과 초석은 상부의 하중을 받고 있는 것이기에 그 위에 올리는 기와나 적심, 상부 구조의 무게가 기둥을 강하게 내리누르게 되니 그것에 힘입어 단단히 결속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봉정사 극락전을 보면 초석의 윗면이 조금 가공되어 있는 것이 보인다. 아마도 그 때는 기둥 밑면에 그랭이를 뜨기도 했지만 초석을 완전 자연석 상태가 아닌 어느만큼 가공해서 썼기에 그 위에 그랭이를 뜬다 해도 자연석을 썼을 때보다 마찰력이 떨어질 것이다. 그랬으니 당시 목수들은 이 부분을 우려해서 기둥머리를 창방으로 결속하듯, 기둥하부도 하인방의 주먹장맞춤으로 이격없이 결구를 하려 했을 것이다.(요 부분은 아무래도 수수께끼로 내기에는너무 어려운 문제였다.)

또 하나, 기둥이 모두 드러난 사진이 이것 뿐이니 여기에서 짚고 넘어가자면, 봉정사 극락전은 다른 조선시대 주심포 건물들이 그렇듯 배흘림 기둥이 서 있다. 기둥이라는 것은 상부구조의 하중을 모두 나누어 받아야 하니가장 큰 하중을받는 것이며, 게다가 기둥이 선 자리마다 공포가 올라갔으니 기둥 자체를 더욱 튼튼하게 해줄 필요가 있는 것이다. 그래서 기둥 삼분의 일 지점이나 오분의 이 지점 즈음을 가장 굵게 하고, 그 다음은 기둥하부, 그 다음 기둥머리인 순서로 기둥 굵기를 안정되게 해준다. 배흘림의 정도로 보면고려시대 건물들 가운데에서도 강릉의 객사문이 가장 세게 되어 있는데,그에 비하면 봉정사 극락전은 배흘림이 그리 강하지는 않은 편이다.

좀 더 크게 찍은 사진이다. 스티커가 있으니 위에서 말한 복화반이며 수수께끼로 내놓은 창방의 위치가 좀 더 뚜렷이 확인된다. 첨차들이 십자로 교차하며 올라가는 공포부는 아래 좀 더 크게 찍은 사진을 보면서 다시.

자, 이것이 문제의 공포부다. 이것 때문에 봉정사 극락전을 포집이라고 말하는 것이며 기둥 위에만 올라서 있기 때문에 주심포 건물이라 말을 하게 된다. 확인하듯 아래부터 차근차근 짜 올라가 보면 맨 밑에 기둥이 섰고, 기둥을 양옆으로 가로지르는 창방이라는 부재가 기둥머리에서 이웃한 기둥머리로 이어진다. 그리고 그 위에 주두가 얹혀 있고, 도리방향 소첨차와 보방향 소첨차가 십자로 놓여 있다. 그 위로 첨차들의 네 귀퉁이와 가운데에 소로가 얹혀 있고, 그 소로를 가로지르며 가로방향으로 길게 뜬장혀가 지나가고 세로방향으로는 대첨차가 놓인다. 다시 네 귀퉁이와 가운데에 소로를 얹은 뒤 가로방향의 대첨차과 세로방향으로 나오는 보머리가 크로스! 또 하나, 지금까지는 기둥을 기준선으로 그 위를 따라 올라간 것이고,보머리가뻗어나온 위에 놓인 소로 위로는 단장혀와 함께 외목도리가 올려 있다. (정면도에 가깝게 사진을 찍었지만 그래도 사진이어서 입체감이 느껴지기는 한다.) 그리고아까까지 말하던 기둥 기준선으로는외목도리에 가려 보이지는 않지만,보머리 위에승두라는 받침목을 하나 두고 주심도리를 받고 있다. (이야아!) 이게 공포 양식 중에는, 주심포 양식 가운데에서도 그나마 가장 간단하게 짜여졌다 할 수 있는 구성 모습이다.

휴우, 숨 좀 한 번 돌리고, 이제 포를 이루는 단위 부재 하나하나를 따로 살펴 보면 사진에서도 보이듯이 봉정사 극락전의 주두와 소로는 밑의 경사면이 내반곡(안으로 휜 곡)으로 살짝 휘어 들어온다. 이것은 통일신라시대의 유적지인 안압지에서 출토된 유물과 유사한 모습이며,고식의 수법으로평가되는 것이다. 조선시대 건축물에는 그러한 곡이 없고 직선으로 빗깎았다. 또 한 가지, 주두와 소로를 말할 때 고려시대 건축물의 특징은 둘 다 주두굽을 가지고 있는 것에서 찾는데, 봉정사 극락전은 예외적으로 주두굽이 없다. 첨차를 보면 그 끝이 직절되어 있는데, 고려시대의 다른 건물에서는 비스듬히 깎여 있다. 빗깎은 것보다 직각으로 내리깎은 것을 더 고식으로 보니, 봉정사 극락전은 여러 모로 옛 양식을 많이 보이고 있는 것이다. 첨차의 밑면은 쌍S자형이라고도 하는 연화두형으로 되어 있고, 또 한 가지 특징적인 것은 첨차 윗면에 공안을 새겨놓았다는 것이다. 사진에서는 주두 위에 놓인 가로소첨차에 잘 보이고 있는데, 첨차의 윗면, 소로와 소로 사이 부분으로 살짝 파놓은 모습이 잘 보인다. 이것은 첨차와 첨차 간의 이격이 있으면서 그 빈공간에 접하는 면을 살짝 깎아줌으로써 더욱 자연스러운 미감을 만들기 위한 것이며, 다포 양식으로 가면 첨차와 첨차가 서로 밀착하게 되는데 이 때는 공안의 흔적을 조각으로 파서 나타내준다. 그리고 조선 중, 후기로 가게 되면단청으로 처리를 하게 되고, 더 시간이 흐르면 첨차의 단위 부재들이 쇠약, 세밀해지면서 많은 부재들을 중첩시키게 되는데, 그것을 마치 한 덩어리로 보이게끔 하고자 초각과 단청으로 일체화시키게 된다.

조금 전에는 정면에서 보는 공포의 조립도를 봤는데, 이번에는 그것을 측면에서 보는 사진이다. 공포 부분만을 보면 이 건물 역시 내부 구조가 측면까지 그대로 이어지고 있으니, 공포의 종단면도를 사진으로 찍은 모습이라 해도 다르지 않을 것이다. 이렇게 보이는대로 다시 짚어보면, 기둥머리를 창방들이 뺄목을 내밀면서 십자로 결구되어 있고, 그 위로 주두가, 주두 위에서 소첨차가 십자결구를, 그 위에 소로들이, 그 위에는 길게 나오는 뜬장혀와 보방향 대첨차가, 그 위에 소로들을 놓고 다시 도리방향 대첨차와 보머리가 결구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보는 외목도리를 직접 받아주고, 주심도리는 그 높이 차이를 승두가 해결해주면서 받아주고 있다.

사진 안에붙어 있는 스티커를 보고 생각이 났는데, 아까이 건물에 쓰인 복화반의갯수를 헤아리면서 '종보와 계량 사이'에도 복화반이 둘, 둘, 둘, 둘 있다고 했는데그 때 말한 계량을 이 사진에는 포인방이라는 이름표를 달고 있다. 이런 예는 공부하면서 계속 나오곤 하는데 한옥에서는아직 명칭이 통일되어 있지 못해서 적지 않은 부재 이름들이 학자들마다 다르게 불리기도 하고, 현장의 목수가 부르는 이름이 또 다르기도 하다. 아무튼 아까 전에 말한 계량이 포인방이라 하는 그것이다.

이 사진을 보니 또 중요한 것 하나가 생각나는데, 그것은 이 봉정사 극락전과 같은 주심포 건물에서는 창방이 수장폭을 갖는다는 것이다. 수장폭이라는 것은 말하자면 포벽의 두께를 말하는데, 이 사진에서 보면 창방과 첨차, 뜬장혀의 단면 폭이 거의 비슷하다는 걸 알 수 있다. 그런데 이 창방이 다포 양식 건물로 가게 되면 굉장히 굵고 두꺼워지게 되는데, 그 까닭은 다포 양식의 건물에서는 창방이 단순히 기둥 머리들의 이격을 방지하는 역할 뿐 아니라 상부 하중을 받아내는 역할까지 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다포 양식 건물로 가면 주심포 건물에서는 볼 수 없는 평방이라는 부재가 생겨나는데, 이 평방은 기둥 위의 주상포 뿐 아니라 기둥과 기둥 사이에 짜올려지는 간포들의 받침 역할을 하는 부재이다. 주심포에서는 기둥 위에만 포가 짜였기 때문에 그 하중이 바로 기둥으로 전달되지만 기둥 사이사이에 간포들이 있게 되면서 그 하중을 받아줄 역학재가 필요해졌다. 그러나 평방이 그 역학재의 기능을 하는 것은 아니고, 평방은 단지 포들의 받침이 되어주면서 그 대신 평방 밑에 있는 창방이 그 하중을 받아내는 역할까지 떠맡으며 굵어지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고려시대 주심포 건물에서 창방은 기둥들 간의 이탈을 방지해주는 본연의 역할만 가질 뿐 상부의 하중을 받는 일까지는 하지 않는다. 그러니 창방의 두께는 다포 양식에서처럼 굵게 쓰지 않아도 되는 것이며, 포벽부의 폭과 같은 수장폭으로 쓰고 있는 것이다.

다시 다른 각도에서 찍은 측면의 모습인데, 측면부를 보면서 한 가지 더 이야기할만 한 것은 박공을 달고 있다는 것이다. 사실 이 건물을 제대로 수리복원하기 전에는 조선시대에 달았을 법한풍판을 달고 있었다. 어쨌든 박공이건 풍판이건 측면부에 그러한 부재를 대는 것은 도리를 비롯한 가로방향 부재들의 마구리면을 보호하기 위함이다. 나무라는 것은 그 특성상 절단면이 취약하여 습기나 벌레 같은 것에 부식이 되기 쉬우니 도리나 장혀, 창방 같은 인방재들의 마구리면이 그대로 노출되는 측면 부위를 감싸주어야 하는 것이다. 기둥도 마찬가지, 그래서 기둥을 초석 위에 놓을 때 그 사이로 소금을 넣거나 숯을 넣는 것도 그러한 이유 때문인 것이다. 조선 시대로 가면 이러한 맞배 지붕의 측면에 커다란 방패막처럼 풍판을 다는 것이 보통인데 이 건물은 박박공만으로 도리 마구리면을 보호했다. 이렇지 않을 경우 도리 끝부터 썪어간다면 집을 다 뜯어 도리를 갈아주어야하느라 일이 커질 텐데박공이나 풍판이 비바람이나 벌레에 나쁘게 되면 그것만 교체해주어도 되기 때문이다. 사진으로 보이는 모형도에는 박공과 박공 사이를 고정해주는 꺽쇠철이 보이고 있지 않지만, 실제 건물에서는 꺽쇠라 하는 것으로 단단히 잡아주고 있다. 이 양식도 조선시대에 가서는 지네철이라 하는 조금 더 장식적인 문양이 있는 것으로 바뀌어 간다.

한 가지 더, 봉정사 극락전으로 대표되는 고려시대 주심포 건물의 구조에서 단장혀의 사용을 중요하게 말할 수 있는데, 그 부분이 잘 보여지도록 찍어온 사진은 아쉽게도 없다. 그래도 기억을 확인할 겸 설명을 하자면, 먼저 장혀의 기능에 대해 말을 해야 할 텐데, 장혀란 도리의 처짐을 받아주는 부재이다. 도리라는 것은 서까래를 받아주는 부재인 것이고 말이다. 그런데 원형의 굴도리를 썼을 때 이 도리는 휨모멘트에 약해 세로방향으로 긴 장혀라는 것으로 받쳐주기 마련인데, 이 장혀 또한 처짐의 우려가 아주 없다 할 수 없다. 그런데 주심포에서는 기둥 위에만 포가 짜여지기 때문에 기둥과 기둥 사이에서는 장혀를 받아줄만 한 것이 없다. 다포 양식이라면 기둥과 기둥 사이에도 간포가 짜여지기 때문에 이것으로 장혀를 받아줄 수 있겠지만, 주심포 양식에서는 사정이 다르다. 그렇기 때문에 주심포 양식은 기둥 위에서 짜여지는 공포 위에만 장혀가 위치하는 단장혀를 쓰는 것인데, 이 때의 단장혀는 다포 양식에서 쓰는 단장혀와 그 역할이 다르다. 다포 양식에서는 말 그대로 도리의 처짐을 받아주는 구조재로서 역할을 하지만, 주심포 양식에서는 기둥 위로 짜여지는 공포부 위에 있기 때문에 그 자리에서는 그닥 휨을 받아주는 구조재로서 역할을 못한다는 것이다. 기둥이 선 자리라는 것은 바로 도리와 도리가 결구되는 자리일 테니, 도리의 끝 부분에서 휘어짐이나 처짐이 발생할 까닭이 없기 때문이다. 게다가 기둥 위는 힘을 받는 지지점이기 때문에 그럴 걱정은 더더구나 없다. 그런데도 굳이 장혀를 쓰는 까닭은도리와 도리 끝이 만나 결구를 하면서 올라 있는 자리가 보머리와 소로인데, 그것들의 폭이 그리 넓지 못한 것이다. 대들보의 몸뚱이야굵은 부재이겠지만뺄목을 내면서 첨차들과 결구를 하게 되는 보머리는수장폭의 두깨로좁아지고 있지를 않은가. 그러니 목재들이 수축과 이완, 혹은 뒤틀림을 겪게 되면그 좁은 면으로 도리 끝이 겨우 걸려 있다 했을 때는 작은 충격에도 떨어지기 십상이다. 그래서 그것을 보완하기 위해 단장혀가 쓰인 것이니, 여기에서의 단장혀는 휨이나 처침을 방지하는 구조재 역할을 하는 것이 아니라 도리가 연결되는 부위를 받쳐주는 받침재의 역할만 하는 것이다.

그러니 어떻겠는가, 원형의 굴도리와 방형의 장혀를 위아래로 밀착해서 걸어주어야 하는데 그러려면 어느 하나의 윗면 혹은 밑면을 깎아 면을 맞춰야만 한다. 이렇게 기둥 위에만 단장혀가 쓰이는 고려시대에는 장혀 윗면을 도리 밑면이 쏙 들어갈 수 있도록 오목하게 깎게 되며, 조선시대로 가면 장혀를 그대로 두고 굴도리 아랫면을 평평하게 깎는다 한다. 이건 실제 일을 생각해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는 것인데 아무래도 단장혀가 몇 군데 들어가지 않는 곳에서야 그 장혀를 깎는 것이 낫지, 굴도리의 밑면을 깎자면 그 부분만을 평평하게 깎고, 다시 굴도리 그대로 살리고 하려면 훨씬 까다롭지 않겠나. 그에 반해 장혀를 받칠 면이 많게 되면 아예 한 번에 굴도리 밑면을 반반하게 밀어주면 그만이니 조선시대로 가면서 시공 방법이 달라지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제 이 정도로 지난 번 고건축박물관에 가서 찍어온 사진들을 보면서 할만 한 이야기는 어느 정도 한 것 같다. 여기에 몇 가지 더, 봉정사 극락전을 말하면서 중요하게 짚어야 할 부분들이 있는데 그 하나는 봉정사라는 사찰이 극락전과 대웅전을 중심으로 각각의 권역이 독립적이면서 병렬적으로 구성되는 점에서 공간 구성의 특징을 이해해야 하는 것이고, 또 말하지 못한 점은 극락전을 바깥에서 볼 때의 입면 양식의 특징과 극락전 내부에 마련한 닫집의 특징이다. 그러니 극락전의 골조만 세워놓은 모형 사진만으로는 그 부분들을 말하기가 좀 그랬는데, 그 부분들을 되짚는 것은 인터넷에서 퍼온 사진들을 띄워가면서 해보아야겠다.

이 그림이 봉정사의 가람 배치를 보여주는 것이다. 그림에서 진입로인 계단을 따라 올라가다 보면 맨 처음 만나는 것이 덕휘루라 되어있는 누각. 이 덕휘루는 만세루라는 이름으로 더 많이 쓰이기도 하는데, 아무튼 이 만세루를 지나면 양쪽으로길게 트여있는 하나의 마당이 나온다.(이 마당을 주목!) 그리고 이 마당을 지나곧게 들어가면 대웅전이 있는 대웅전권역이 나오고, 그 왼쪽에 있는 화엄강당을 기준으로 극락전 권역이 병렬적으로 자리해 있다. 극락전 앞에는 탑이 있고,그 왼쪽에는 고금당이라고 하는 작은 건물이하나 더 있어. 그리고 대웅전의 오른쪽에는 요사채가 있다. 이게 기본적인 가람배치의 모습인데, 여기에서 중요한 건 아까 주목하라고 했던 만세루를 지나고나오는 넓은 마당. 이 마당은 하나로 트여 있어 개방된 모습이지만 좌와 우, 가운데 부분이 저마다 성격이 다르다. 이를테면 요사채 앞쪽으로는 일반 신도들이다니지 않는 요사채의 앞마당 성격이 되며, 가운데 부분은 대웅전 권역으로 진입하기 위한 전초 공간, 그리고 왼쪽은 극락전 권역으로 들어가는전초 공간이 된다는 것이다. 이렇게 하나의 트인 공간으로 개방되어 있지만 각각의 공간이 성격에 따라 쉽게 넘어들지못하는영역으로 구성되었다는 것은 주목할만 하다. 우리가 건축을 이해한다는 것은 개별 건축물을 어떻게 계획하고 조성했는가 하는 것 뿐 아니라 그 공간 배치를 어떻게 했는지를 이해하는 것 또한 그 못지 않게 중요하다. 이랬을 때 봉정사는 외부 공간과 내부 공간의 상관관계에 따라 배치의 묘미를 잘 살린 한국 건축의 뛰어남을 말해주는 것이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이 가람 배치도를 보면서 거들 수 있는 말이 있다면, 맨 왼쪽에 있는 고금당이라는 작은 건물이 아마도 창건 초기에는 주불전 역할을 하지 않았을까 추정이 되기도 한다. 지금은 스님들의 요사채로 쓰고 있기는 한데, 건물의 이름 자체가 '옛금당'이라 되어 있기도 하니 어쩌면 그곳이 주불전이었다가 사세가 점차 확장되면서 옆으로 극락전과 대웅전, 화엄강당 들을 더 지으면서 중심 건물이 이동하지 않았을까 유추해보는 것이다. 그랬다면 정면의 진입방향은 지금과 달랐을 것이다.

아무튼 봉정사는 건물 하나하나가 다우리 건축사에서 중요한 것들이 되고 있어지금 살펴본 극락전 말고도 대웅전과 고금당은 따로 뜯어가며살펴보게 될 것이다.

봉정사 극락전의 입면을 보여주는 사진이다. 사실 이렇게 보면 여느 조선시대 사찰과 달리 굉장히 밋밋해 보인다. 마치 창고처럼 벽체로 답답하게 가려져 있고, 출입을 위한 문이나 안을 들여다볼 수 있는 창도 굉장히 작고 폐쇄적이다. 그 까닭은 앞서도 한 번 언급했듯, 고려시대에는 예불을 사찰 안에서 올리는 것이 아니라 바깥에서 했기 때문에, 그리고 법당 안으로는 신도들이 함부로 들어가지도, 들여다보지도 못하도록 되어 있기에 이렇게 폐쇄적인 입면 양식을 띄고 있다. 정면의 어칸에 출입을 위한 문이 있지만 보통은 어칸의 넓이와 문의 넓이가 함께 가는데, 이 건물에서는 어칸의 넓이보다도 훨씬 좁은 문이 판장문 양식으로 되어 있다. 그리고 그 판장문은 안에서 열 수 있게 되어 있다. 창문은 살창으로 되어 있는데, 눈여겨 보아야 할 부분은 창호 구조재를 어떻게 처리했는가이다.조선시대로 가면 창문이 이렇게 허공에 붕 떠 있듯이 되어 있지 않고, 가로세로로 나 있는 창호부재나 문선, 인방들이 함께 노출되어 있는데, 고려시대에는 창틀만을 남기고 모두 미장으로 가려버리는 것이다.

기단부는 장대석을 쌓아 만들었는데, 여기에도 고려시대 양식의 특징을 말한다면 윗돌이 아랫돌보다 두껍다는 것이다. 아마도 고려시대에는 큰 돌이 작은 돌을 내리눌러 앉고 있는 것을 안정적으로 느끼는 정서, 혹은 의식이 있었을 거라 유추하고 있다. 기단의 끝에는 쇠시리 초각이 되어 있는데 이것 역시 여말선초에 잘 나타나는 양식으로 종묘나 창덕궁 인정전의 기단에도 이와 유사한 초각이 되어 있다.

사진 옮겨오는 김에 이것도 가져다 놓았다. 측면의 모습인데, 앞서 모형 사진을 보며 설명한 어미 기둥이며 그것을 기준으로 좌우대칭이 되고 있는 중고주들이며, 대들보를 관통하여 맞보형식으로 지나가는 대들보들이 확인된다. (아참, 수수께끼로 내었던 창방 뺄목이 여기에도 보인다. 내부의 뒷쪽에야 불전의 후불벽을 만들기 위해 측면과 동일하게 고주들을 세워놓았다지만 앞쪽에는 기둥들이 없는데도 도대체 저건 어떻게 된 거냔 말이다. ㅎㅎ)

여기에서는 사찰의 내부가 보이는데, 지금은 이렇듯 마루를 깔아놓았지만 원래는 전돌로 되어 있는 바닥이었다. 지금도 후불벽 뒷면에 있는 바닥은 전돌을 그대로 두고 있다. 이처럼 전돌바닥으로 되어 있는 건축물로장곡사 상대웅전이 있다고 한다.

골조 모형도에서는 볼 수 없던 내부 모습 사진이 있어 이것도 같이 퍼다 놓는다. 계량이라고도 하고 포인방이라고도 하는 부재를 받치며 대들보 위에 서 있는 복화반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으며, 바깥 측면에는 어미기둥을 중심으로 맞보로 나가는 대들보가 내부에서는 하나로 굵직하게 쭉 뻗어가고 있는 모습 또한 확인이 된다. 앗, 이 사진을 보면서 알게 된 것 또 하나. 복화반 숫자가 두 개 더 있다. 건물의 뒷면 후불벽 열에 서 있는 기둥(고주)과 측면의 고주 사이 창방에도 복화반이 놓여 뜬장혀를 받고 있다는 거. 가운뎃 부분은 닫집이어서 그게 없겠으니 그렇다면 양쪽 퇴칸으로 하나씩 그것이 있다는 얘기가 된다. 다시 계산 하면 모두 열여덟 개의 복화반이 쓰이는 게 되겠구나! (아이구야, 이건 정말 이 사진을 보면서야 다시 알게 되었다. 조만간 봉정사에 가서 직접 확인해야겠다, 웁.)

그리고 이 사진 오른 편에 보면 살짝 닫집의 걸쳐져 있다. 겹겹으로 포가 짜여져 있어 보기만 해도 어지러울 것 같은 모습으로.

닫집이다. 집 안에 있는 또 하나의 작은 집이라 보면 된다. 보다시피 다포로 짜여져 있다.여기에서 닫집이 이렇게 다포로 조성되었다는 것이 중요한데, 그 까닭은 우리나라 다포집의 기원을 다시 생각하게 해주기 때문이다. 사실 우리 건축사는 일제시대에 일본 학자들이 정리한대로 지금까지 이어져오고 있는데, 그 정리에 따르면 우리나라의 다포양식은 원나라 때 유행하던 것을 받아온 것이라 되어 있다. 그런데 이 닫집을 보자. 닫집이라는 것은 건축물을 짓는 대목의 일이 아닌 소목의 일이 되는데, 닫집을 짓는다는 것은 그 당시 존재하는 집을 본 떠 그보다 작게 만들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된다. 그런데 만약 이 닫집이 봉정사 극락전을 지은 연대와 같다고만 한다면 이미 우리나라에는 원 간섭기 이전부터 다포집을 짓고 있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아직까지는 결정적이라 할만한 근거를 찾지는 못하고 있어 추정만을 하고 있을 뿐이다. 결정적인 근거는 없지만 이 닫집에 쓰이는 부재들이랄지 공포를 짜는 양식이 아주 고식의 수법으로 되어 있고, 그 문양들을 보아도 고식임을 알 수 있다. 투각한 당초 무늬 청판이랄지, 상대 갑판 밑 복련 양각이랄지, 창방과 인방 사이 투각한 모란 당초문 초각이랄지……. 닫집이라는 것은일반 건축물이라면 있을 상량문이나 묵서명 같은 기록을 남기지도 않는 데다가연륜연대법이라는 것을 써서 측정하기에도 부재 하나하나가 작고 가늘기 때문에아직은 확인이 되지 않는다.

휴우, 이제 어느 정도 봉정사 극락전이라는 건물을 두고 할만한 얘기는 다했나 보다. 마침 인터넷에 예전 모습을 찍은 사진이 있어 이것도 보게 되었는데수리복원을 하기 전에는 이처럼 측면부에 풍판을 달고 있었다.

그리고 이처럼 입면 모습에도 살창과 판장문이 아닌 분합문을 달고 있었고, 문 바깥으로는 툇마루가 짜여져 있었는데 이것들은 모두 조선시대에 고쳐놓은 것이라 하여 원래 때의 모습으로 복원해 놓았다. 인방에는 살창의 홈이 발견되어 복원을 했고, 문틀이 있던 부분은 뜯고 나니 심방석의 흔적이 발견되어 판장문으로 복원.

* 이렇게 실제 건축물 혹은 모형으로 보고 나니, 그리고 그것을 사진으로 찍은 뒤 도면을 보고 있자니 도면에는 까막눈이던 내 눈에도 도면이 읽힌다. 선과 빗금칠로만 되어 있는 그 암호 같은 그림들에 막막하기만 했는데, 이제 더듬더듬 알아는 먹는다.

위에서 봤던 다섯 번째 사진과 그 사진의 시선과 동일하게 그린 그림이다. 처음에 이 그림만 보면서 대체 이게 어떻게 되는 건지 알아먹기가 어려웠는데, 이제는 좀 알 것 같다. 요 위에 있는 사진에서 눈에 보이는 선만 남기면 똑같네, 뭐.

그리고 이건 정면에서 사진을 찍은 것이 아니라시선의 위치는 그대로 두면서 안 쪽에서 단면으로 잘랐을 때의 그림이다. 위의 그림과 똑같은데 한 가지 다른 점이라면 위에서는 보머리 부분이 보여지는 것이고, 요 아래 그림은 보의 몸통 단면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보의 단면을 보면 그냥 원형이 아니라 윗부분이 더 퉁퉁하고 밑면 쪽으로 좁아지는 모습인데, 이러한 형태의 보를 역항아리 형태의 보라 한다. 이 또한 고려시대 건물 양식의 특징 중 한 가지이다. 조선시대로 가면서는 역항아리 보가 쓰이지 않고 아랫면의 귀만 살짝 접은 모양의 보가 쓰이게 된다.

요 그림은 공포 부분을 측면에서 볼 때의 단면인데, 위의 사진과 방향만 달라 그렇지 이 또한 실제 모습이나 사진의 모습으로 확인하니 더 쉽게 이해가 된다. (아! 도면 읽기에 익숙해져야 하는데, 실은 아직도 많이 낯설다.)

여기에서는 사진과 그림이 조금 다른 것 같아 보이는데, 그 이유는 사진은 측면부 바깥에서 찍은 것이고, 그림은 측면부 안쪽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사진에서 측면부 바깥을 걷어내고 그 안의 모습을 본다고 생각하면 이 그림과 같아지는 것이다. 고려시대 맞배지붕 건물은 내부구조가 측면부 바깥까지 그대로 가는 것이 특징이라 했는데, 봉정사 극락전은 예외적으로 측면 바깥 부분이 달라졌다고 말하지 않았나. 여튼 이처럼 내부에는 후불벽을 세우기 위한 기둥이 뒷쪽에는 있는데 앞쪽으로는 중간 기둥들이 없다. (아까 그 수수께끼다. 앞쪽의 중간 기둥들이 없는데 도대체 바깥에서 볼 때 그 창방 뺄목은 어디에서 튀어나왔냔 말이다. ^^) 아무튼 이 역시 사진과 그림을 동시에 놓고 보니 도면이라는 걸 제법 볼 줄 알게 되는 것 같다.



휴우, 이제 한 고비 지나간다. 물론 봉정사 극락전이 그만큼건축사적으로나 건축양식으로나 중요했고, 주목해야 할 것들이많기에 그랬지만 이제 겨우 건물 하나 자신있게 말할 수 있을 뿐이다. 벌써 수업 시간에 다룬 것들만 마흔 개 남짓 된다.앞으로 수업이 이어지면 이어질수록그두 곱은 되는 양일 텐데, 갈 길이 까마득하다.그저 이렇게 공부하는 것으로만으로는 즐겁기 그지 없지만 시험이라는 걸 생각하면 까마득하기만 하다. 거북이같은 걸음에 시험이라는 경주에 덤벼들었으니, 그것도 출발선이라는 것도아득히 처진 곳에서. 건축 전공한 분들이야아무 단면이나 하나를 놓아도 바로 투상도까지 그려내고 있지만 나는 뭐, 맹인이 바위를 더듬듯 하나하나 더듬어야만 알 수 있겠으니 말이다.

그래도, 우와! 봉정사 극락전은 알 것 같다.야호! 언제 나랑 같이 봉정사에 가거들랑 두 시간은 거뜬히 얘기해줄 수 있을 거야. 아니, 어디 이 극락전 뿐인가, 대웅전만 보더라도 다포 초기 양식 건물이라 그 또한 이만큼은 파헤쳐 봐야 할 거고, 고금당이라는 건물도 하나하나 뜯어 보아야 할 테니 봉정사에만 가도 일박이일이 모자라겠다.고생했다, 냉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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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냉이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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