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릉 객사문

굴 속의 시간 2010. 2. 14. 01:57

강릉 객사문

역시 고려시대 주심포 건물 양식이다. 그런데 이 건물은 이름에서도 나왔듯 '문'이다. 사찰의 법당도 요사채도 아니고, 그저 관아 건물의 문일 뿐이다. 그러니 문 건물 가운데에서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것이다 라고 말할 수 있는 그런 건물이다.

객사문이라 했다. 그렇다면 객사로 들어가는 문. 아, 객사라고? 객사에 대해서는 한국건축사를 공부하며 새겼던 게 기억난다. 읍성이라는 지방 주요도시마다 동헌보다 더 중요한 건물로 객사라는 게 있다 했다. 동헌이 입지하는 곳은 읍성의 가운뎃 쯤 丁 자 모양으로 만나지는 삼거리였고, 이 동헌까지 들어가려면 보통 문 셋을 지나야 한다 했다. 성 바깥에 담장을 두르지 않은 채 서 있는 일주문, 그리고 성 안으로 들어가면서 나오는 두 번째 문인 중층누각의 문, 그 다음에는 솟을삼문을 거쳐 정전의 역할을 하는 동헌이 나온다. 이 때 동헌의 오른편에는 언제나 동헌보다 위계가 높도록 객사라는 것을 둔다. 유교원리에 따라 서상(西上)의 원칙에 따라 오른쪽이라 했지만, 이 위치는 좌우가 바뀔 수도 있다. 그러나 없는 경우는 없으며 읍성 안에서 가장 위계가 높은 곳이 된다. 말하자면 이 객사는 왕을 상징적으로 나타내는 것인데 그 안에는 궐패라 하는 것을 모시고 매월 초하루와 보름에 궁을 향해 예를 올린다. 또한 왕이 파견한 중앙관리나 사신 통해 무언가를 내려보낼 때 그것을 받는 의식을 이곳에서 하면서 객사의 양 옆에 마련한 동익사와 서익사를 그이들의 거처공간으로 내준다.

강릉의 객사에는 모두 83칸이나 되는 많은 건물이 있었다 하는데 일제시대에 일본인들이 이 자리에 강릉공립보통학교를 세우면서 대부분 다 헐리고객사문만 남게 되었다 한다. 광복 후에는 다시 학교 건물을 헐고 그 자리에 강릉경찰서를세웠으며, 1993년 강릉경찰서를 옮긴 뒤에 이 자리에 강릉시청의 청사를 건립하기로 계획했다 한다. 그런데 청사를 세우려 준비하고 조사하는 과정에서 그 곳이 고려에서 조선에 이르기까지 중요한 유적지임을 발견하게 된 것이다. 임영관이라 하는 건물이 있었던 흔적과 고려, 조선시대 건물의 하부구조와 많은 유물들이 출토되면서 사적지로 지정되었다 한다. 그게 1994년 일이었다. 그 뒤로 2000년 부터는 도심관아유적 복원사업의 일환으로 임영관 자리에 정대청과 중대청, 동대청, 서헌 같은 4개 동의 건물과 석축, 담장 들을원형을 따라다시 만들어2006년 완성되었다고.조만간찾아가 내 눈으로 직접보고 와야 할 곳이다. 봄에 양양에 가서 집짓는 일을 하게 되면 그 때오가면서 들를 수 있겠지.강릉에 가면 객사문 뿐 아니라 선교장도, 오죽헌도, 그리고 양양의 진전사지와 선림원지까지찾아가봐야 할 곳이 적지 않다.

여기에서 옮겨온 강릉객사문의 정면과 안면 사진이다.보다시피 맞배지붕으로 되어 있지만 이 건물은 집이 아니라 문 건물이고, 대문이 셋인 3문 양식이다. 기단은 고려시대 것이라 볼 수 없는데 아마도 조선시대에 다시 만든 것이라 추정하고 있다.

정면에서 바라봤을 때의 도면과 그 정면에서 모형 골조를 찍은 사진이다. 글쎄, 이 모형 골조는 어디에 전시되어 있는 것인지 잘 모르겠는데 고건축박물관에서 내가 보고온 것과는 다르다. 모형에 사용된 나무 빛깔부터가 일단 다른데, 그거야 그렇다 치고 일단 가장 다른 점은 고건축박물관에서는 강릉객사문의 원형복원 이전, 그러니까 조선시대에 한 번쯤 변형된 채로 있어온 모습으로 모형을 만든 것이고, 이 모형은 원형복원 이후, 고려시대의 모습을 되살려 만든 것이다.

도면이나 모형 골조를 봤을 때 실제 모습을 정면에서 찍은 것과 그리 다를 바가 없다. 단지 모형에는 전면 세 칸으로 있는 판문을 생략하고 있을 뿐. 앞서 고려시대 주심포 건물들을 이야기하면서 배흘림 기둥을 말할 때 강릉 객사문의 것이 가장 강한 배흘림을 보인다고 했다. 그 다음은 수덕사 대웅전, 그 다음이 부석사 무량수전, 가장 약한 것이 봉정사 극락전이라며 말이다. 지금 보고 있는 강릉 객사문의 기둥이 가장 강한 배흘림 기둥이다.

기둥만을 찍은 사진으로 다시 확인. 강릉 객사문의 기둥이 이처럼 다른 건물에 비해 센 배흘림을 하고 있는 것은 아무래도 문 건물이다 보니 기둥과 기둥 사이로 벽체가 없어 시각적 불안함을 해소하느라 기둥을 강조한 것으로 보여진다.

이것은축소 모형을 측면에서 찍은 사진들이다. 위엣 것이 내가 고건축박물관에서 찍어온 사진이고, 아랫 것은 인터넷에서 보게 된 사진인데 둘의 모습은 사뭇 다르다. 그러니까 위의 것은 복원 전의 모습, 아랫 것은 복원 후의 원형 모습. 일단 위에서 보는 사진으로는 지붕 물매가 크지 않아 납작해 보이는데, 아래 사진에서는 그보다 물매가 크게 있어 용마루가 좀 더 솟아 있다. 이것은 그전까지 서까래 하나로 외목도리에서부터 종도리까지 걸려 있던 것을 원형 복원을 하면서 하연과 장연으로 나누어 걸었기 때문이라 설명이 되어진다.

용케도복원 이전의 사진복원 후의 사진 인터넷에서 찾을 수 있어 나란히 옮겨 보았다. 이 두 사진을 보면서 지붕 물매 말고 또 한 가지 복원 전과 후가 달라진 거라면대공을 어떻게 쓰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 복원 전에는 종도리를 받는 대공이 판대공 하나만으로 되어 있다.그에 비해 복원해낸 뒤에는 화려하게 초각한 파련형 대공이 종도리를 받고 있고,또한 솟을합장이 人자 형태로 종도리의 양쪽을 받고 있다. 이것은 해체 수리를 하는 과정에 종도리에서 솟을합장을 결구했던 홈을 발견했고, 또한 종보 윗부분에서는 파련형 대공을 결구하던 흔적을 찾아냈기 때문이다. 이후 조선시대로 가면 솟을합장과 파련형 대공의 모습은 좀처럼 찾아보기 어렵게 되는데, 그 까닭은 조선시대에는 천정을 가설하기 때문에 천정으로 가려지는 윗부분들은 최소한의 구조적 역할만 하게끔 되는 것이다. 그에 반해 고려시대에는 지붕 상부가 그대로 노출된 연등천정 양식을 쓰기 때문에 그 위에 있는 구조재들도 하나하나 장식적인 요소를 고려했던 것이다. 그러니 천정 가설로 가려지는 부분의 장식적 역할이 필요치 않아진 조선시대에 쓰인 대공들은 종도리를 최대한 안정적으로 받아주기만 하면 되는 것이니, 비교적 치목이 간단한 판대공 형식으로 바뀌게 되고, 그 모양은 솟을합장과 파련형대공을 한 데 뭉뚱그렸을 때의 형태과 같은 사다리꼴 모양을 띄게 된다.



으아, 인터넷에서 사진들을 찾다가 이런 것도 보게 되었다. 이게 뭐지? 문화재청에서 열람할 수 있다는 수리보고서인가? 으아, 봐야 할 게 너무 많다. 아무튼 사진으로 보여지는 부분만이라도 눈을 비벼가며 뜯어보고 읽어보니 종보 위 대공 형식을 어떤 근거와 원리로 복원했는지가 설명되어 있다. 우미량에 숭어턱이 없다는 것이나 도리내밀기가 줄어든 것에 대해서도 설명하고 있는데 그 부분에 대해서는 내용의 일부만 보여지고 있어 솔직히 아직은 잘 모르겠다. 그 밖에도 주심도리에 서까래가 걸리는 부분이 패어 있는 것과 물매 각도를 말하며 통장연일 때와 하연, 상연의 이중 서까래일 때를 견줘 설명하는 대목도 있는데 역시 내용을 다 읽어내기에는 이 사진만으로 부족하다. 아, 이런 것까지 봐 두어야 하겠구나……. '강릉 객사문의 해체수리 보고서'를 구해서 봐두어야 한다.

이번에는 측면부를 도면으로 그린 그림으로 다시 보자. 아쉽게도 측면부 도면은 원형 복원 이전의 것밖에 찾을 수가 없어 그것으로 보고 있지만, 그렇다는 것만 머릿속에 고려하며 보면 문제 될 것은 없겠다.외목도리를 제외하고 1, 3, 5 오량가 맞배지붕 건물이다. 맞배지붕은 횡력에 취약하다는 것 역시 귀에 인이 박히도록 되풀이해 얘기해왔다. 그렇기에 측면부에는 봉정사 극락전의 어미기둥, 수덕사 대웅전의 가운데 각형기둥 따위로 보강재를 둔다는 것을 눈여겨 보며 말이다. 마찬가지로 맞배지붕 건물인 이 강릉 객사문에도 측면 가운뎃 부분에 각형의 기둥이 있다. 모형 사진이나 실제 모습을 찍은 사진들에서도 한 눈에 확인이 되고 있었다. 그런데 강릉 객사문의 이 각형기둥은 횡력 취약함을 보강해주는 보강재이기도 하지만 이 건물은 문 건물이기 때문에 문을 걸기에도 좋도록 쓰여지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다른 건물에서는 측면의 벽부에만 어미기둥이 있다거나 각형 기둥이 있었지만, 이 건물은 측면 뿐 아니라 내부에도 이러한 각형 기둥들이 계속 세워져 있다는 것이고, 그 기둥과 기둥들 사이에는 문이 걸리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까 고려시대 맞배지붕 건물의 특징이었던 내부단면 구조가 측면부까지 동일하게 이어졌다는 것에 이 강릉 객사문은 그야말로 꼭 들어맞는 것이다.

박공 이음부는 어떤가? 이 도면으로 봐도 되고 저 위에 있는 사진들로 보아도 확연히 보인다. 거멀정이라는 꺽쇠철. 그러니 여태 살펴본 건물들 가운데에는 수덕사 대웅전만 지네철 비슷한 거였고, 나머지 고려시대 건물들은 모두 거멀정으로 박공 이음을 하고 있다.

보다시피 우미량을 사용하고 있는데, 종보 밑에서 시작해서 주심도리까지 잡아주고 있다. 솔직히 수덕사에서 쓰인 우미량에 입이 쩍 벌어졌기에 여기에 쓰인 우미량을 보면 에게, 뭐 이리 시시하나 하는 마음이 조금 들기도 했다.일단 우미량 부재 자체가낙차 큰 폭포수처럼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춤이 낮아 그렇기도 했고, 그리고 겨우 한 단만 있다는 것에서도 그랬다. 그러나 보라, 수덕사 대웅전은 9량가던 것에 반해 강릉 객사문은 5량가 밖에 안 되는 작은 건물이다. 그러니 우미량이라는 부재를 더 쓰려해도 쓸 곳이 없는 것이다. 중도리에서 주심도리 받치고 나면 끝이니 하나 이상 더 쓸 수도 없지를 않은가? 워낙 수덕사에서 눈이 높아져 있어 그렇지 이 건물의 측면부도가만히 들여다 보고 있으면 단순함과 멋스러움이 잘 조화된 참 예쁜 모습이다.

다시 우미량이 어떻게 놓였는지 살펴보면 종보 밑에서 나와 주심도리로 가는 거야 주지한 내용이고, 그 밑은 무엇이 어떻게 받치고 있는지를 보자. 좋보 밑에서 나올 때는 대보 위에 있는 화반이 받쳐주고 있고, 주심도리로 이어질 때는 외목도리를 받으면서 나오는 초방이 우미량을 받아준다.


측면부의 각형기둥, 그러니까 문을 기준으로 좌우가 대칭으로 되어 있다는 것도 굳이 짚고 지나야 할 필요가 있을까? 암튼 전면으로 봤을 때 전후대칭의구조로 되어있다는 것도 메모해놓고 지나가자.그보다 더 눈여겨 봐야 할 부분이라면 위의 사진에서 왼쪽 기둥열에서 쪼로록 보이는 공포부들을 보자. 물론 공포부에 대해서는 뒤에서 제대로 한따까리 해야할 테지만일단 이 사진으로 확인되는 것 한 가지 짚어놓으려는 것이다. 뭔고 하니 창방 머리들. 사진 정면으로 보이는, 건물의 측면에도 창방들이 있다. 각형기둥 양쪽으로 귓기둥으로 창방이 지나간다. 그 창방을 뺄목들은 귓기둥의 머리에서 주두 밑으로 빠져나가게 되고, 그 창방의 뺄목은 그 자체로 헛첨차가 된다는 것이다. 물론 수덕사에서도 측면부의 창방들은 그 뺄목이 헛첨차가 되었더랬다. 그러나 수덕사 대웅전의 내부에는 중앙 각형 기둥이라는 게 있을리 없고, 내진열의 고주들이 서기도 하지만 내부에서는 그것과 전후면의 평주 사이에 창방이라는 게 없다. 그러니 창방 뺄목이라는 것도 당근 있을 수가 없다. 그래서 수덕사 대웅전에서는 귓기둥 쪽에서는 창방 뺄목이 헛첨차 역할을 했지만, 전후면의 평주들에서 공포부를 이루는 자리에서는 창방 뺄목이 아닌 그야말로 짤막한 헛첨차가 주두 밑, 기둥머리에 끼워져 있었다. 그리고 그 헛첨차의 뒷뿌리는 뒤에 있는 살미첨차 뒷뿌리와 한덩어리처럼 붙어 보를 받는 보아지 노릇까지 했지. 그런데 강릉 객사문에서는 모든 공포부가 있는 곳마다 창방 머리가 헛첨차 역할을 한다. 왜냐하면 이 건물에는 문을 설치하기 위해 내부 중앙에도 계속해서 각기둥이 서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그 내부의 각형 기둥과 안팎의 평주들 사이에도 계속 창방이 있어야 할 테고, 기둥에서 창방 뺄목 위치가 바로 헛첨차의 위치가 되니 그대로 창방 뺄목들이 모두 헛첨차 구실을 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다보니 이 강릉 객사문에서는 헛첨차 뒷뿌리가 보아지를 형성한다느니 하는 것도 아주 거리가 먼 얘기가 될 뿐이다. 헛첨차 역할을 하는 창방 머리 뒤쪽으로는 안에 있는 각형 기둥까지 쭉 이어지는 창방이 되는데, 뒷뿌리랄 것이 아예 있지도 않으며, 창방으로 뻗어나가니 보아지 노릇이라는 것 또한 할 수가 없는 것이다.

이것이 원형의 모습을 종단면을 보여주는 도면이다. 이미 측면부와 측면의 종단면부는 하나하나 다 살펴봤으니 이 그림을 보고 그것들을 확인할 수 있으면 되겠다. 아니, 확인하는 것 뿐 아니라 보지 않고 이것을 그려낼 수 있는 것이 중요. 오량집이어서 그런지 구조는 생각보다 간단하다. 대들보와 종보, 받침목이 되는 초방과 우미량, 화반. 그리고 파련대공과 종도도리면 다 된다 할 테니 말이다.

횡단면으로 보는 그림이다. 여기에도 그대로 적용되고 있는 고려시대 전형적인 양식, 그 하나는 역항아리 형태의 보를 쓴다는 것, 내부 가구구조가 양 측면까지 그대로 투영되고 있다는 것. 그리고 이 건물에서 역시 외목도리 밑은 단장혀가 받고 있다.

기둥 밑에서 지붕 밑을 올려다보며 찍은 사진이겠다. 기둥이 있고, 헛첨차가 내밀었고, 주두가 있고, 살미첨차가 있고, 보머리와 행공첨차가 보인다. 그 위로 초방도 있을 텐데 그것은 보에 가려져 있는 것 같고, 암튼 그 행공첨차 위로 외목도리가 걸려 있는데 그 외목도리를 받는 장혀 길이가 행공첨차의 두 배 정도밖에 되어보이질 않는다. 이렇게 단장혀가 외목도리를 받고 있다는 거.

평면도를 보면 기둥이 서는 자리가 한 눈에 보인다. 이것이 내부 공간을 두는 건물이었다면 안에 있는 각형 기둥들을 두지 않았을 텐데, 이 건물은 문으로 만들었기에 안에도 각형기둥들이 같은 간격으로 서 있다. 방형의 기둥단면 옆으로 표시된 것들은 신방목과 신방석을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건축용어사전에 따르면 신방목이란 '기둥을 초석이 받치듯 문설주에도 받침목을 두는데 이를 신방목이라 한다.' 고 나와 있다. '신방목 안쪽은 대개 문짝을 다는 홈이 파여있다'며 말이다. 그리고 신방석은 '성곽문의 경우는 외부공격에 대하여 문짝이 물러나는 일이 없도록 나무 대신에 돌을 사용한다, 이를 신방석이라고 한다'면서 '성곽 신방석에서는 문설주도 신방석에 홈을 내고 깊이 박는 경우가많다.'고 설명했고 말이다.신방목이나 신방석은 바깥 쪽을 둥글게 만들어 태극문양 등을 새기기도 한다 하는데 종묘의 외삼문은 삼태극을 새겼다고 한다.

사진에서 보면 기둥 밑이 초석이겠고, 문설주 앞에 바깥쪽으로 받침목이 되는 신방목과 그것을 받아주는 신방석을 확인할 수 있다.

공포부의 모습이다. 기둥머리의 주두 밑에서 창방 머리가 헛첨차 역할을 하며 내밀고 있다. 처마내밀기를 주두 밑에서부터 시작하는 모습이다. 주두와 소로가 보이고, 주두 위로 도리방향 소첨차가, 그것과 결구한 보방향의 살미첨차가 놓였다. 앗, 헛첨차를 사용한 공포부인데 수덕사 대웅전과 다른점! 수덕사 대웅전에서는 살미첨차의 끝부분도 보머리 초각과 같이 날렵하고 뾰족하게 깎여 있었다. 그런데 강릉 객사문에는 살미첨차에 그러한 초각이 없다는 거! 또 한 가지는… 아, 잊을만 하면 다시 찾아오는 수수께끼! 사실 위에서 살짝 언급하고 지나치긴 한 건데 나도 다시 한 번 확실히 머리에 새길 겸 수수께끼로 남겨둬야지. ㅎㅎ. 살미첨차가 내민 출목 쪽에는 초각이 된 보머리가 행공첨차와 결구되어 올라있고, 그 위에는 초공이 단장혀와 외목도리를 받아준다. 그리고 기둥머리 위로 따라 올라가면 살미첨차 위에서 보 목아지와 뜬장혀가 결구되어 있다. 그리고 그 위에서는 부석사 무량수전이나 수덕사 대웅전 같으면 도리방향 대첨차가 초공 뒷부분과 결구되어 있을 텐데, 여기에서는한 번 더! 뜬장혀가나오면서 초공 뒷부분과 결구하면서 우미량을 통해 주심도리와 장혀를 받는다. 아! 강릉 객사문에는 가로방향 대첨차가 없고, 뜬장혀가 둘이로구나! 다시 말해 주심도리에는 바로 받아주는 장혀가 있고,다른 건물에서는 대첨차의 자리에 뜬장혀가, 다른 건물에서 뜬장혀의 자리에서도 또 뜬장혀가 받아주는 식으로 세 번의 장혀가 받아주는 모습이다. (눈이 번쩍! 처음 알게 된 사실이다. 이걸 수수께끼로 낼 걸 그랬나? ㅎㅎ)

살짝 각도를 틀어서찍은 사진으로 다시 한 번 확인하고 지나가자. 공포가 짜이는 구성이나 차례에 있어서는 수덕사 대웅전과 거의 비슷하다. 한 가지 다른 점은 대첨차가 없는 대신 그 자리에 뜬장혀가 한 번 더 지나간다는 것. 모형의 사진에는 '주장여'라고 스티커가 붙어 있지만, 그거야 부르는 사람에 따라 다른 것이니 이름이야 그렇게도 부른다 하는 정도로만 넘어가도 되겠다. 기억할 것은대첨차가 아니라 장혀가 지난다는 것,같은 형태의 장혀가 두 겹으로 놓이고, 그 위에는 도리밑에 밀착한 장혀가 따로 있다는 것이다. 그 밖에는 수덕사 대웅전과 다른 구성이랄 것이 전혀 없다. 단지 모양내는 것이 조금 다르다는 것 뿐. 헛첨차는 모두 창방 뺄목이기 때문에 그렇게 달라지고, 살미첨차 끝에 초각이 없다는 것, 그리고 수수께끼로남겨둔 그것. 아하,몰랐는데 지금 확인해 보니또 한 가지가 있네. 초방 끄트머리가여기에서는동글동글 예쁘게 다듬어져 있는데 수덕사 대웅전의 초방은 그냥 빗깍다시피 하다가 가운데를 살짝 오목하게 했구나. 그래 초방 모양 달라, 살미첨차 모양 달라, 두 군데의 모양이 다르다. 아으, 안 되겠다. 눈에 확들어오게 나란히 놓고 비교를 해 봐야.


부석사 무량수전 공포도 △ 수덕사 대웅전 공포도 △강릉 객사문 공포도

아쉽게도 강릉 객사문 공포도는 방향을 거꾸로 한 그림이지만 그거야 뭐. 포토샵 색칠공부가 어려워서 선이 좀 뭉개졌긴 했지만빨간색으로 표시한 초공만 보면 그 끝 모양이 모두 다르다. 강릉 객사문은 동글동글동글 다듬어져 있고, 부석사무량수전과 수덕사 대웅전은단순한 빗각에 약간의 초각이 있을 뿐이다.또 그 둘은 빗각의 방향이 다르다. 부석사 무량수전은 밑면이 짧아지는 쪽으로 빗각, 수덕사 대웅전은 밑면이 길어지는 쪽으로 빗각. 그 다음 노란색의 보머리를 보면 부석사 무량수전이 갈고리모양이었고, 수덕사 대웅전과 강릉 객사문은 좀 더 날렵한 모양새이다. 그 아래 하늘색 살미첨차 쪽을 보면 부석사 무량수전은 아직 살미첨차라기에는 그저 정직한보방향의 대첨차이고, 수덕사 대웅전은 살미첨차도 보머리처럼 초각이 되어 있다.그런데 강릉 객사문은 초각없이 출목만 만들어주고 있다. 사실 부석사 무량수전이야 헛첨차를 쓰는 양식이 아니니 소첨과소첨, 대첨과 대첨이 정확한 십자결구로 짜올라고 있으니 살미첨차라할 수도 없었지만 말이다.

자, 그럼 이제 다시 강릉 객사문의 공포도에만 집중. 그림 네 개 가운데 왼쪽 위에 있는 측면 공포도를 본다. 첨차의 공안이 또렷이 보인다. 살미첨차와 보 사이를 보면 그 틈과 닿는 면에 오목, 오목하게 파놓은 자리가 아주 눈에 띈다. 그러니 당근 첨차들 사이 수직거리 이격 또한 함께 확인된다. 창방이 수장폭인 것도 굳이 따로 설명하지 않아도 좋을 것이다. 도면에서 기둥 머리 안에 빗금이 쳐 있는 조그만 방형이 창방의 단면이다. 첨차나 장혀의 폭과 거의 비슷하게 보여진다. 그러니 이 건물에서도 창방의 두께가 수장폭이다. 첨차 마구리는 빗각으로 깎였고, 그 밑면은 연화두형 초각이 되어 있다. 그 모습은 살미첨차나 헛첨차 어느 것에서도 그림에 잘 나타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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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살미첨차를 한 번 잘 보자. 아직 살미첨차에 대해 메모하지 않고 지나간 부분이 있는데,그건 살미첨차가 기둥 중심을 기준으로 좌우대칭이 깨뜨려지고 있다는 것이다. 살미첨차는 그 태생이 헛첨차를 쓰면서 보 방향 소첨차를 생략한 채쓰게 되는 대첨차, 그것을 살미첨차라 한다 했는데이것의 이름을 그냥 대첨차라 하지 않고 살미첨차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기둥을 중심으로 안쪽으로는 소첨차의 길이만큼만 나갔는데 바깥으로 대첨차의 길이로 내밀었다는 것. 수덕사 대웅전에서는 앞뒤로 초각이 되어 있어서 (아, 이거 수수께끼 힌트 너무 나온다.) 대칭이니 뭐니 살피기가 좀 거시기했는데, 강릉 객사문에는 초각 없이결구되어 있으니그 모습이잘 드러나고 있다.요 위에서부석사 무량수전, 수덕사 대웅전, 강릉 객사문 세 건물의 공포도 비교해놓은 것에서 부석사 무량수전 공포도를 보면 비교가 잘 된다. 부석사 무량수전에 쓰인 보 방향 대첨차는 정확하게 좌우대칭이 되고 있질 않은가. 이렇게 살미첨차들은 비대칭적으로처마내밀기 쪽이 길어진다. 이것은 앞으로 다포양식의 살미첨차가 길게 나가는 것으로 이어진다 볼 수 있다.

보라, 기둥 바깥으로는 대첨차의 길이만큼, 기둥 안으로는 소첨차의 길이만큼만 팔을 뻗고 있는 살미첨차를.

이로써 강릉 객사문에서 살펴볼만한 구조적 틍징이나 양식상 특징들은어느정도 다살피지 않았나 싶다. 한 가지, 위에서 사진으로만 보게된 해체수리보고서의 내용을 아직잘 이해하지 못한 것을 숙제로 남겨둔것만 뺀다면. 그래도 필요할까 싶어 모아놓은 사진들이 몇 장 더 있으니 그것들을 보면서 앞서 본 것들을 되짚어보며 마친다.


안쪽에서 지붕 가구구조를 올려다보며 찍은 사진이다. 대보와 종보 사이에 화반이 놓이고 우미량 끝이 시작되는 모습을 한 번 더 눈여겨. 문이 있는 쪽 맨 꼭대기에는 파련형대공의 반쪽이 살짝 보이고 있다.

위에서 본 사진을 찍고 뒤돌아 찍었다면 이 사진이 나왔겠다. 위에서는 복원 뒤에 찍은 것이고, 이것은 수리 전에 찍은 것인데 이 부분에서야 서까래 물매만 조금 다를 뿐 나머지는 복원 전과 후가 다를 것은 없다. 종보와 대들보 사이에서 우미량과 화반이 어떻게 층층으로 결구되어 있는지를 다시 한 번 확인.

기둥 상부와 공포부를 깨끗하게 담아놓은 사진이다. 공포부를 보면 동글동글 깎아 다듬은 초방머리부터 날렵한 초각의 보머리, 그리고 빗각으로 깎아 연화두형 초각을 넣은 살미 첨차와 헛첨차 머리가 층층이 보인다. 헛첨차는 창방으로 쭉 뻗어나가고 있고, 주심도리 아래에는 뜬장혀가 둘 지나간다. 아, 그런데 저건 뭐? 문 위에 마치 난간처럼 쫄대같은 것을촘촘히 꽃아 놓은 것이 있는데,그건 뭐?


궁금하면 못참아. 그 부분 자세히 보여주는 사진을 찾아보니 이렇게 있다.그러고는 이것을 객사문의 홍살이라 하던데, 용어사전에서 홍살의 뜻부터 다시 찾아보았다.

* 건축용어사전에는 홍살문을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두 개의 기둥으로 만들어지며 문짝을 달지 않는 상징적인 문이다. 일주문과 다른 점은 지붕이 없다는 것이다. 또 기둥이 얇기 때문에 일주문처럼 자력으로 서 있지 못하고 기둥하부 양쪽에 지주석을 세워 쐐기를 박아 고정시킨다. 기둥상부에는 가로대를 길게 건너지르고 그 위에는 세로 살대를 촘촘히 박아 구성한다. 세로 살대 중간은 태극문양 등으로 장식하기도 한다. 그리고 모두 붉은색 주칠을 하는데, 그래서 홍살문이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다. 붉은색은 벽사의 의미가 있다. 우리 풍속에 동짓날 붉은 팥죽을 쑤어 먹거나 대문에 뿌리는 것 등은 붉은색을 귀신이 꺼리는 색이라 하여 악귀를 물리치고 집안의 안녕과 무병을 기원하는 의미가 있다. 홍살문의 붉은색도 이와 같은 의미로 쓰인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홍살문은 서원이나 향교를 비롯해 능 앞에 설치된다. 그리고 홍살문 앞에는 대개 하마비를 세운다. 아무리 지체 높은 사람도 홍살문 앞에서부터는 말에서 내려 걸어 들어가란 뜻이다. 홍살문부터는 정정하고 신령스런 공간이라는 상징성을 갖고 있다.

이런 사진이 있다.해체수리할 때의 모습인 것 같은데 나무의 빛깔을 보면 새로 보수한 부재와 옛것 그대로인 부재가 확연히 구분된다. 아직 가보지 못해서 지금도 이렇게 부재들이 섞여 있는지 모르겠는데 아무튼 이 사진으로 볼 때는 그렇다. 공포부를 찍은 것인데 서까래부터 외목도리와 단장혀, 그 밑의 동글동글 다듬은 초방 머리, 소로까지는 새로 깎아 만든 부재고, 보와 행공첨차는 수백 년 전 부재 그대로이다. 그리고 소로를 건너 뛰어 그 밑에 있는 살미첨차가 다시 옛 부재이고, 그 위의 주두가 또한 그렇다. 보의 목덜미 부분을 보면서 잠시 착각, 어 이상하다 싶기도 했다. 강릉 객사문은 대첨차 자리에 대첨차가없고 뜬장혀, 그리고 그 아래 보머리와 결구하고 있는 것도 뜬장혀인데,이 사진을 보면 보머리와 결구하는 것이 마치 대첨차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아! 그건 이 공포 부분이귀주 위에 있는 거라뜬장혀가 바깥쪽으로 더 뻗지 않고 있을 뿐이었다. 그러니까 뜬장혀가 시작하고 있는 맨 끄트머리부분. 헷갈리지 말자, 겨우 머릿속에정리해가고 있는데 자칫 한 번 헷갈리면 와르르 무너져버린단 말야.아이구, 두야.

방금 본 부분을이쪽 측면에서 다시 보는 게 이 사진인데기둥 위 공포부만들여다 보면 다시금 확인이 된다. 주심도리 밑에 얇은 부재의 단장혀가 받고 있고, 소로를 끼우고 그 밑으로 있는뜬장혀(초공과 결구되는), 소로를 끼우고 한 층 아래 다시 뜬장혀(보 목아지와 결구되는), 그아래 소첨차가 나와 있고, 주두 밑으로 창방 뺄목이 나와 있다.여기에서 보면 초공과 결구되는 뜬장혀만이 끝이 뾰족 날렵하게 초각되어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는데, 그러한 모양은 주심도리에서 뿐 아니라 중도리의 뜬장혀나 종도리의 뜬장혀에서도 같은 모습을 보이고 있다. 나머지 장혀와 첨차들은 빗각으로 깎여 있을 뿐.

여긴 도대체 어느 부분이야? 으유, 한참 헤맸네. 대들보와 종보 사이에 화반이 놓이고 우미량이 시작되는 부분이니 종보에 바로 직접 결구하고 있는 것은 중도리를 받는 뜬장혀가 되겠다. 그러니까 옛부재의 대들보와 옛부재의 화반 위에 있는 것이 우미량이 시작하는 부분. 그리고 그 위로 옛부재의 종보와 중도리 뜬장혀가 결구하고 있고, 그 위에 도리 구름을 방지해주는 초공 같은 것을 두고 중도리-장혀가 올라 있는 것이다. 여기에서도 측면으로 나가는 뜬장혀의 뺄목은 마치 전후면의 보머리처럼 날렵 뾰족하게 초각이 되어 있다.

아하, 그렇구나! 강릉 객사문에서는 측면으로 나가는 가로인방재의 뺄목에도 초각되어 있는 것이 있다. 그게 뭐냐면 각 도리 밑을 가로지르는 뜬장혀 끄트머리들.

방금 본 사진의 대칭되는 쪽 사진이다. 반대쪽 우미량이 시작되는 부분, 중도리 밑의 결구, 대들보와 종보 사이. 이 사진으로도 우미량과 종보가 어떻게 결구하고 있는지가 보여진다. 도리방향의 첨차를 하나 넣으면서 십자로 결구하여 종보와 뜬장혀의 결구를 받는다. 그리고 금방 확인한 것처럼 뜬장혀가 초각되어 있고.

그런데 한 가지 더, 지금껏 강릉 객사문 구조를 보면서 어느 단면을 보면서도짚어보지 못하고 지나온 부분이 있는데 중도리 밑에서 도리가 굴러떨어지는 것을 방지하고자감싸 안아받치고 있는초공이라 하는 부재. 이 사진과 조금 전의 사진을 보면서야처음으로 보게 되었고, 알게 된 것이다. 아하,아까 해체수리보고서를 사진 찍어놓은 곳에 그 비슷한 내용을 읽은 것 같은데… 그래, 맞다.그 책을 찍어 놓은 사진을 다시 들여다 보니이 받침재를 승두라 표현하면서 여기에 대한 언급이 있다. '승두 위에 솟을대공이 있었'다는. 이 사진은 안쪽 승두가 보여지지 않으니 솟을대공이 어떻게 올라섰는지가 보여지지 않지만, 다시 종단면도를 보니 이부재가 눈에 들어온다. 아, 하마트면 놓치고 갈 뻔 했어. 휴우.



앞서 공부한 봉정사 극락전과 부석사 무량수전, 수덕사 대웅전을 공부하던 것에 비해 이 건물부터는 훨씬 가볍게 살피고 지날 수 있을 줄 알았다.강의 시간에만 해도 봉정사 극락전은 두 시간을 꽉 채워 했고, 부석사 무량수전과 수덕사 대웅전은둘을 가지고 한 시간, 그 다음부터는 십 분에 한 건물을 했을까 싶을 정도로 팍팍 치고 나갔기 때문이다.게다가 앞서 세 건물들을 공부해놓으면그 뒤에 반복되어 나오는 기본구조와 양식에 대해서는 조사가 된 상태이니그 다음의 건물들부터는 정말 그럴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그게 아니네. 건물 하나하나 들여다 보아야 할 것이 너무 많아.눈을 크게 뜨면 뜰수록 보이지 않던 것들이 하나둘 새로 더 보여지고, 의문을 던져주고 그런다. 꼼꼼히 살필 수 있어 좋기는 하지만 이거 이렇게 해서는 진도를 따라가지 못하겠으니 큰일이다.이제 겨우 건물 네 개를 살폈는데 이미 진도는 그 열 배도 더 나가 있다. 진도를 쫓는 것에 대한 부담만 아니라면, 시험이라는 것을 치른다는 것만 아니라면 그냥 이렇게 천천히,차근차근 눈을 떠 가는 것만으로도재미있고 흥분되지만… 혹시 내가 공부 방법을 잘못하고 있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어쨌든 나는 지금 논문을 쓰려는 것이 아니질 않은가?수험생이 되어 시험공부를 하려는 것 아닌가? 이걸 어쩐다.이렇게 알아가며 즐거운 공부가 아니라 시험을 위한 공부는 방법을 달리해야 하는 걸까? 아, 모르겠다. 시간만 넉넉하다면 건물 하나하나 이렇게 붙잡고, 씨름하며, 사귀고, 사랑하며 그러고 싶은데 이러다가는 다음 주 쪽지시험도 또 빵점맞겠다. 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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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냉이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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