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자가 백일을 맞은지 일주일이 지나고 있어. 녀석이 세상에 오고부턴 아침에 눈을 뜨면 저절로 카운트가 되어. 막상 백일을 며칠 앞두고서도 별 준비나 생각이 없었다. 잔치 같은 건 아예 생각도 안했지만, 그래도 떡이라도 해서 상을 놓고 사진 한 장은 찍어야 하지 않겠나 하는 정도. 사진관은 무어, 그냥 집에서 찍으면 되지. 그래놓고 인터넷을 검색하여 백일상은 어떻게 차리는지를 보았더니 백설기에 수수팥떡, 인절미, 송편에 빛깔이 다른 세 가지 나물과 세 가지 과일. 그리고 무명실 한 타래.
조촐하게 상이나 차린다고 했지만, 막상 아흔아홉날 저녁이 되니 그래도 감자에게는 처음으로 기념할 어떤 날인데, 조금이라도 정성을 더하고 싶어. 그제서야 지난 달력을 부욱 찢어내어 거기에 글씨를 썼다. 그런데 쩝, 집에는 예쁘게 무얼 할만한 문방구가 하나도 없어. 하다못해 굵은 매직이나 크레파스 같은 거라도 있으면 좋으련. 할 수 없이 얇은 싸인펜 한 자루로 칠을 해가며 글씨를 굵게 만들어. 헉헉, 그러나 싸인펜도 금새 닳아버리는 거라. 궁리를 하다가 누런봉투가 보이기에 그걸 오려 감자 모양 하나를 만들어 붙였다. 하하하, 이거면 됐다. 100일 감자.
아침에는 먼저 삼신할머니상부터. 삼신할미에게 올리는 상에는 흰쌀밥에 미역국, 물 한 사발과 빛깔 다른 세 가지 나물을 올리는 거라고. 하하하, 그리고 감자 백일상이니만큼 감자도 쪄서 한 접시를.
떡을 찾아오고 제대로 백일상을 차리니 오후가 훌쩍 지났다. 그런데 다른 때 같으면 오전나절에도 한참을 잠들었을 감자가 이날따라 잠들지 않고 내내 놀더니 그제서야 잠에 빠져. 하긴, 녀석이 세상에 오고난 뒤부턴 모든 스케줄은 녀석의 허락 하에 진행하게 되어 있었다. 감자가 졸리다는데 감자 백일상이 다 무어람. 일단 감자야 자자, 자고나서 사진찍자.
감자가 자는 사이 마을로 백일떡을 돌리러. 잔치를 크게 벌이진 않더라도 백일떡은 백 사람과 나누어 먹는 거라는데, 우리가 제주에서 아는 사람이라곤 스물서른도 되질 않아. 그렇다고 하루이틀 뒤면 굳거나 쉬게 될 떡을 먼 데까지 보낼 수도 없고, 그냥 가까이에서 감자를 아는 이웃들하고라도 나누기로. 떡을 찾아 들어오는 길에는 어차피 시내에 나갔으니 조산원에 들러 산파 할머니에게 전하고, 제라진에도 들러 그림책 이모삼촌들에게도, 그리고 함께 일을 하던 회사 동생들, 제주에 사는 달래의 고향친구, 그리고 사나흘에 한 번씩은 들르게 되던 한살림 매장 이모들에게 떡을 전하고 들어와.
마을 분들에게는 사진을 찍고 나서 한 바퀴를 돌고 올까 했는데, 감자가 잠이 들어버렸으니 마을에도 한 바퀴 돌자 하여 다시 떡배달을 나갔다. 난장이공 이모에게도, 이장님댁에도, 마침 수니언니도 마당에 나와 있었고, 상순 삼촌도 대문 앞에서 반갑게 만나.
(요거는 백설기 한 덩이, 수수팥경단 몇 알을 담은 꾸러미에 넣은 감자의 인사말 ^ ^)
감자는 저녁이 다 되어서도 쿨쿨 잠만 잤다. 저녁에는 들이네 식구랑 밥을 같이 먹기로 하였는데, 우리 생각처럼 그 전에 백일 사진을 찍는 건 하지를 못해. 들이 누나랑 큰아빠큰엄마가 내려오고 나서 겨우 부스스 잠에서 깬 감자를 상에 앉히고 사진을 찍느라, 감자를 웃게 하느라, 감자야 감자야 깍꿍깍꿍 여기저기서 불러대고 호로록꿍딱꿍딱 요란하게 소리치고, 엄마야, 이게 모야, 감자는 잠에서 덜깬 얼굴로 어리둥절해하기만 ㅜㅜ
아무튼 이렇게 하여 어른들만 신난 가운데 감자의 백일사진 찍기를 마쳤다.
지난 백날이 그랬지만, 감자의 백일을 맞아 지나면서도 남다른 소회 같은 건 없었다. 그저 감자에게 자꾸만 묻게 되어. 감자야 어땠니, 백일 동안 살아보니 살만은 했니, 엄마아빠가 마음에 안 드는 건 아니니, 다 좋은데 아빠만 쫌 맘에 안 드는 건 아니니. 아빠는 좋았단다. 그리고 고마웠어. 아프지 않고 건강하게 잘 지내주어서, 때로 까닭 모를 울음을 터뜨리기도 했지만 괜찮을 거라는 믿음을 저버리게 하지 않아주어서. 그리고 너로 인해 배고픈 아이의 울음을 더 크게 들을 수 있게 되었고, 여리고 아픈 목숨의 소리에 더 귀를 기울일 수 있게 해준 것을. 고맙다, 감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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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일 사진을 찍던 날엔 끝내 환하게 웃는 얼굴을 보여주질 않아. 그날은 잠에서 덜깬 데다가 어수선한 가운데 어리둥절해하기만 하더니, 푹 자고난 그 다음 날에야 다시 방긋방긋 환하게 웃어. 한참 웃고 노는 녀석을 다시 백일상 뒤에 마련한 포토존에 앉히고 사진을 찰칵찰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