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리원과 집을 왔다리갔다리, 그러면서 밤엔 조리원에서 달래 감자와 함께 잠을 자고 있는데, 이 철딱서니없는 아빠는 달래와 감자가 잠든 밤, 휴대폰을 조물딱거리며 드라마를 다운받아 본다. 하루는 너무 잠이 오질 않아. 그렇다고 감자가 잠든 방에 불을 켜고 무언가를 읽거나 할 수도 없어, 그래서 살그머니 전화기를 꺼내어 찾아보게 된 거.
미생. 이 만화가 원작부터 아주 끝내준다는 얘기야 여기저기에서 들었지만, 만화는 역시 종이책으로 봐야지, 컴퓨터 화면으로 보는 웹툰이라는 거에 적응이 되질 않아서 굳이 찾아보거나 하진 않았다. 그런데 그 만화를 드라마로 만들었다는. 하여 산후조리원의 그 고요하고 거룩한 밤에, 이 철딱서니 아빠는 드라마를 꼼지락꼼지락.
드라마 좋다는 얘기야, 본 사람이면 누구나 할 테니, 굳이 거기에 보탤 말이 더 있지는 않다. 그저 나는 그 드라마를 보면서 나이 마흔이 넘어 초보 직장인으로, 말하자면 신입사원, 문화재를 하는 건설회사에 들어가서 보내던 어떤 시간들이 떠올라. 드라마 속 어리버리 눈물겨운 장그래의 모습에서 나를 보는 것 같아, 질질 짜며 보낸 그 시간들이 오버랩되곤 했다. 드라마 앞에서도 눈을 질끈 감아버리고 싶을 정도로 끔찍했던 순간들. 그러나 오버랩하는 내 모습은 딱 1회까지였다. 그 어리버리, 왕따가 되어, 무시당하고, 적응 못하는 장그래는 그 다음 회부터는 자기 안에 있는 단단함으로 잘 이겨나가기를 시작. 그러나 나는 그러질 못했다. 왜일까, 왜였을까. 단단함의 차이였을까. 아니. 아마도 그 답은 거기에 있을 거. 극중 장그래는 '이로움을 추구하는 면에서는 같다' 라는 말을 했다. 이로움이라는 거, 이윤을 만들어낸다는 거, 중학교 사회시간에 배운 회사라는 것의 존재 이유. 그러나 나는 끝내 그것과 평행선을 타기만. 머리 숙여 굽힐 수도 없었고, 멋적은 웃음을 지을 수도 없었다. 그러기에는 최소한의 동기, 끝내 그걸 찾지 못해.
감자의 육아를 핑계로 지금은 이렇게. 그러나 내년은 어떻게, 또 그 다음 해는 어떻게 해야 할지. 낮은산 큰아빠는, 앞으로는 모든 걸 감자가 다 정리해줄 거라고, 감자가 시키는대로만 하면 될 거라고, 그 녀석이 어떻게 살지를 말해줄 거라는데. 그래, 답을 정해두려 하지는 말자. 어차피 시행착오는 죽을 때까지 멈추지 않을 거고, 나 또한 언제까지나 미생(未生)이니.
악어떼 / 불나방스타쏘세지클럽
아, 이 노래. 그러니까 감자가 세상에 나오기 보름 쯤 전 탑동 해변공연장에서 페스티벌이 있었어. 사우스카니발, 눈뜨고코베인, 불나방스타쏘세지클럽, 술탄오브더디스코, 장미여관. 공연이 시작하기 전부터 비가 쏟아졌지는데도, 이 만삭의 감자어멍은 비옷으로 무장하고 공연을 즐겨. 배가 불러있어서 무대 앞으로 스탠딩을 하러 뛰어나가지 못하는 걸 안타까워하면서 말이지.
코베인도 좋고 술탄도 좋고, 불나방도 좋았지만 젤 좋았던 거는 제주 토종뺀드였던 싸우스카니발. 세 번째로 무대에 오른 불나방스타쏘세지가 <악어떼>를 부르는데, 나는 이 신나고 익살스런 무대를 보면서도 가슴이 저릿저릿하였다. 마치 요 며칠 드라마 <미생>을 보며 오버랩하던 어떤 장면들이 떠오르는 것처럼. 빗속의 공연이 모두 끝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달래에게 그 노래는 참 슬프더라 했더니, 달래도 그 노랠 들으며 오빠 회사 생활 생각이 났더라지. 아, 달래도 그런 마음 들었구나. 모를 줄 알았는데.
나는 악어떼가 너무 두려웠지만 이 정글을 떠날 수가 없었네 나 이 정글을 떠나 살 수 없었기에 그들에게 굴복할 수 밖에 없었네
나는 악어떼가 너무 두려워 알아서 길 수밖에 없었네 나는 악어떼가 너무 두려워 알아서 길 수밖에는 없었네
나는 정글에서 살아남기 위해 그들의 비위를 맞춰 주었네 어느새 나는 그들과 공존하는 악어새가 될 수밖에 없었네
나는 악어새가 되긴 싫지만 살아 남기 위해 어쩔 수 없네 나는 악어새가 되긴 싫지만 먹고 살기 위해 어쩔 수가 없네
박자를 따라 발을 구르고, 목을 흔들며, 때론 웃음을 터뜨려가며 무대를 보았지만, 그 마음을 함께 느껴준 달래가 고마웠다. 감자야, 아마도 아빤 다시 정글 숲으로 들어가게 되겠지. 두려운 악어떼들, 그 안에서 아빠는 악어새가 되고 말까, 아니면 또다시 정글 바깥으로 뛰쳐나오곤 하게 될까. 그게 아니라, 아빠는 그 정글에서 악어떼도 어쩌지 못할 하마가 되어 그 안에서 풀을 뜯고 살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