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력

그꿈들 2013. 2. 22. 09:59




 숙소에 걸어놓은 달력. 한 보름 정도는 영월에서 영주 기차 출퇴근을 했는데 내내 그럴 수가 없어 숙소에 지내고 있다. 회사에서 마련해준 직원들 숙소는 풍기읍에 있는 낡디낡은 아파트. 소백산이 바로 눈앞으로 펼쳐지는 그 조그만 아파트에 남자들 넷이 함께 사는데, 나는 여기에서도 막내. 암튼 그 허름한 아파트 가장 작은 방이 내가 머무는 곳이다. 지난 주 짐을 옮겨다 놓으면서 달력 챙기는 걸 잊었는데, 이곳에선 시간 가는 거가 느껴지질 않아, 달력 하나를 걸어놓았다.





 오늘로 십 년이 되는 그 날. 이상하게도 이번 해엔 새해 달력을 처음 받던 때부터 내내 그 해의 시간들이 겹쳐 떠오르곤 해. 달력 첫 장에 있는 2013이라는 숫자가 살짝 가려져 얼핏 2003처럼 보였어서 그랬는지. 십년 전의 그 날과 그 날, 그리고 그 날들이 하나하나 생생하게 떠올라. 어젯밤도 마찬가지라, 떠나기 전날의 그 밤이 너무도 또렷이 떠올라 한참을 그 시간으로 가 있다가 제주도 명숙이 누나에게 전화를 걸었다. 십 년 전의 그 얘긴 말고 그냥 시시한 얘기들만. 귤이 너무너무 맛있더라고, 귤은 다 팔았냐고, 귤 얘기만 한참 하다 끊었다. 한 마디 물어보면 누나는 언제나 쉴 새 없이 줄줄줄, 맛나게 얘기를 하니까. 어제도 그랬던 것 같다. 귤을 따고 상자에 담는 작업에 대한 얘기며, 누나네 귤나무의 잔뿌리 얘기, 그래서 귤의 당도를 높일 수 있었다던 얘기. 역시나, 언제나처럼 밝고 신나게 얘기하는 누나 목소리를 들어 좋았다. 전화번호를 눌렀다 말기를 몇 번이나 망설였는데 전화가기를 정말 잘했다 싶더라. 괜히 십 년 전, 그 날 얘기 꺼내지 않고 그렇게만 신나게 떠들고난 것도.

 이상하지, 아득하게만 느껴진다 싶으면 또 바로 어제 일처럼 떠오르기도 해. 아니, 해마다 그러진 않았는데 올 해는 이상하게 자꾸만. 그때는 십 년 뒤라는 걸 상상해보기나 했을까. 했다면 그때 그려본 십년 뒤랑 십년이 지난 지금은 얼마나 달라져있을까, 그리고 또 어느만큼이 그대로일까. 새벽에 눈을 떠 창을 열었더니 눈발이 내리고 있더라. 그리고 나는 또다시 보나마나한 달력부터 들여다보게 되어. 아니, 달력의 흰 종이와 검정 숫자가 아니라, 나도 모르게 그 날 그 시간들이 눈에 그려지게 되는 거겠지. 이제 더는 두려워하지 말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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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냉이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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