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
집이 달라졌다.냉장고가 달라지고, 찬장이 달라지고, 욕실이 달라지고, 베란다가 달라지고.같이 있는 동안에는 잘 몰랐는데, 엄마가가고 나니 이 안이 얼마나 달라졌는지가 이제야 보인다. 아마 이 신비로움은 내가 죽을 때까지 풀지 못할 몇 가지 일들 가운데 하나일 것이다. 아, 또 한 가지 달라진 게 있다면, 그건 냄새. 이 집에서도 엄마 냄새가 나다니.
1.
새벽 세 시면 엄마는 절에 간다며 걸멍을 지었다.물론 엄마가 늘 다니는 동네 절은 아니다.거기 가까운 곳에 절이 있니?엄마는,당신이초를 올리고 엎드려 절을 할 수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좋았던 것이다.다행히장릉옆에 가면 보덕사라는 조그만 절이 있어, 그래서 엄마는날마다 그 시간 절에 다니듯, 여기에머문 닷새동안에도그 시간마다 절엘 갔다. 그러더니 고 며칠사이그새벽에 같이 기도를 하는할머니 보살 한 분과 사귀어오가는 길 말동무를삼기도 했다. 아, 나는 여기에 와 두 해째, 여태 아는 사람한 명도 없어. ^^;;
2.
엄마를 절에 모셔다드리고 나면, 엄마가 돌아올 때까지, 나는 그 사이잠이 들어. 알람을 맞춰놓을 것도 없이, 내일 아침 쌀을 불려 놓을 것도 없이, 그냥 그대로, 마음 푹 놓고 잠이 들어.엄마가 깨워줄 테니까. 아침밥도 다 차려놓고, 밥먹어라 하면 그 뿐이니까.아, 얼마만에 꿀잠인가.
3.
밥하는 거, 빨래하는 거, 설거지하는 거, 이것저것 치우는 거, 아, 이것들에서 벗어나는 것만으로도 세상이 이렇게나 달라.그렇게 닷새동안을 왕자님으로 살아. 그래봐야 고작늙다리 수험생이건만, 어쨌건 밥차려주면 먹고 도서관엘,배고파! 소리치며 들어와 점심밥 먹고 다시 도서관,엄마! 왜 이렇게 배가 일찍 고파? 다시 뛰어들었다간다시 도서관. 열람실 고 자리에 보던 책 고대로 펴놓고는 후다닥 집에 들러 차려주는 밥만 먹고, 밥만 먹고. 와, 만세다.
4.
도서관 아저씨 불끄는 시간에집에 다시 뛰어들어오며, 엄마 먹을 거 없어? 엄마, 커피! 엄마, 과일! 엄마, 매실 타줘!엄마, 옥수수! 왕자가 어디 따로 있나.
5.
혼자인 거,심심한 거, 외로운 거그런 거에는 언제나 자신만만.일요일에 학원나가 교실에서 밥먹는 거 빼면 일주일에 스무 끼를 혼자 먹었다. 말이 쉬워일주일에 스무 끼지, 아마그건 그러고자 작정을 한다 해도 상황이 되지 않아그러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그냥 한 번 생각을 해봤어. 이만큼이나 맨날 혼자 밥먹고 지내는 이가 또 누가 있을까. 물론 비교할 바 되지 못한다는 거는 알지만, 독거노인 분들도 일주일에 두어 번은 복지사 분들이 들러 같이 밥을 먹잖아,재소자라 해도 같이 수감생활하는 사람들이랑 같이 밥을 먹잖아.지난 일 년을 통털어 내가 누군가와 마주 앉아 밥을 먹어본게 다 해야 몇 끼나 될까. 그러기를 일 년 넘어 이 년 가까이.미리 사다놓은 담배가 떨어지거나 펜을 바꿔야 해서 문방구에 가 "얼마에요?" 하는 말 정도가 아니라면 하루 한 마디가 그리워. 아마 그래서 나는 가끔 여기에다이렇게 이따우소리들을끄적이곤 하는 것일까.
6.
그래봐야 밥상 앞에서일 뿐이었지만, 엄마 앞에서 나는 말이 많았다. 엄마도 말이 많았다.그리곤 밤에 집에 돌아와서도 내가 할 수 있는 것도 괜히 죄다 엄마를 시켜먹었다. 엄마, 커피! 엄마, 과일! 엄마, 옥수수!
7.
밤에는배틀이라도 벌이듯.엄마는 저쪽 방에 앉은뱅이상을 펴놓고 지장경을 읽는다. 그리고 나는 그 소리를 음악삼아 이쪽 방 책상에 앉아 도면을그려.마치 세기의 배틀인 한석봉과 그 어미의 붓글씨에 떡썰기 대결처럼 엄마는 다음 입재일까지 지장경 천독을 해야 한다며 졸린 눈을 부비며 지장보살의 이야기를 읽고, 나는 벌써 두 달 밖에 남지 않았구나, 마음만 조급해 되지 않는 선을 그리느라 바쁘다. 한 가지 다행인 것은 내가 하는 공부에 사찰 건물이 많아 절에 대해 할 얘기가 많다는 거. 마곡사 실측보고서를 뜯어보다가, 엄마 마곡사 가봤어? 하니 지난 봄에 형이랑 형수, 조카들까지 다 같이 그리로 템플스테이를 갔다왔다 한다. 어어, 가봤구나, 엄마, 나 지금은 그거 공부한다! ^^
8.
새벽 세 시면 절에 가야 하는 엄마의 독경 소리가 먼저 끊기면, 이상하게 그 때부터 나도 힘이 빠진다. 책상 앞에는 앉아있지만,어떤 옛 생각과 또 어떤 훗날의 생각들. 엄마는 잠꼬대도 지장보살, 관셈보살을 한다는 걸 이제야 알았다.
9.
어진이 이 녀석.방년십팔 세. 세 해 전에 기미가 열여덟 살 나이로 죽었다. 그리고그 딸인 어진이가 다시 그 나이가 되었다. 이빨은 다 빠져 무엇 하나 제대로 먹을 수가 없어,눈도 귀도 다 어두워져 방 안에서도 자꾸만 여기저기 머리를 찧고 부딪혀. 하긴 뭐, 다리에 힘이 없어 제대로 걷지도 못하고 있으니.
10.
어제였구나, 동강 강둑으로 서는 오일장에,엄마랑 잠깐 다녀왔더니, 으앙, 나 어떡해. 책장도 모자라고, 도무지 정리가 되질 않아 방 여기저기로 쌓아놓은 보고서며 논문들 사이에 오줌을 질펀하게 싸놓은 것이다. 헉! 순간 울상이 되었다만은, 늬가 무신 잘못이 있겄냐, 야, 이거 아무래도 어진이가 예상문제 하나 찍어준 거 같은데? 거기, 얘 오줌에 젖은 그 보고서, 거기에서 한 문제가 나올 거 같아. 그치, 어진아? 니가 그래서 것다가 오줌싼 거지? 그래, 그 건물에 대해서는 늬 오줌냄새 맡으면서 성냥개비만한 나무 조각 하나까지 샅샅히 알아놓아야겠다. 아, 이거 좋으네. 어진이가 점지해준 예상문제, 하하하.
11.
아닌 게 아니라 시험이 임박해올 수록, 수험생들 사이에서는 예상문제를 점치느라 이쪽저쪽으로 안테나를 길게뽑곤 하면서. 이를테면이쪽의 주류라 할 수 있는 교수들이 최근 몇 해 동안 발표한 논문들이 어떤 것인지, 최근 문화재청이나그쪽 전문위원들이 집중하고 있는 사업들은 어떤 것인지, 학계의 동향은 어떤지, 최근 출제 문제들의 빈도와 경향은 어떤지…….애초 시험범위라는 것이 의미가 없고,주요 건물들을 다 들여다본다는 건가능할 수가 없으니 나름 그런 식으로 어떤 지푸라기라도 잡고싶어하는 것이다. 물론 나 또한 그래. 아직도 못본 게 이렇게나 많은데 이제 얼마 남지 않은 시간, 무엇부터 봐야하겠는지.
12.
그런데 하하하! 나는 어진이가 찍어줬다. 이 녀석 오줌에 흥건 젖은 그 보고서는 전주읍성의 남문인 풍남문 실측수리보고서. 아, 그런데 그게 재작년에 한 번 나왔단 말이지……. 하, 이거 참. 에이, 몰라. 어진이를 믿는다. 요 녀석이 그래도 엄마의 관세음보문품과 지장경 독경 십팔년 짠밥이란 말이지 ㅎㅎ. 그러고 보니 올 겨울 전주 지역 답사를 갔을 때 보니 풍남문에는 가설 비계를 세워놓고 보수공사를 하고 있었거든. 그 때문에 오히려 들어가볼 수가 없어 아쉽다 하고 돌아서 오긴 했는데, 아무튼 고맙다, 어진아!
13.
그때만 해도 아직 열 달이나 남았다며 남은 시간이 지겨워보일 정도로 길게 보이기만 했는데, 언제 이렇게 시간이 갔을까. 그 때 전주에서 완주로, 익산으로 다니면서 봤던 것들.화암사 극락전과 금산사 미륵전, 귀신사 대적광전에 위봉사 보광명전과 위봉산성, 그리고 전주객사와 풍남문, 익산의 미륵사지와 왕궁리터. 아무튼 전주는, 그 말로만 듣던 막걸리 골목은 증말로 끝내주는 곳이었다. 아, 침이 꼴깍. 이런 삼천포 같으니라구.
14.
보고싶은삼촌, 요즘은 뭐해. 말로 듣는 것과 문자로 보는 것과는 또 이렇게 다르구나. 보고싶은, 이라는 말이 이렇게 좋은 거라니.혹시 삼촌도 그 어느 버스를 타지 않았을까,하는 생각이 들어 찔러본 거였겠지.해원이 요 녀석은 지금 막 동생 지원이랑 엄마랑 희망버스에올랐다고 느낌표를 찍었다.그러게 거기 희망이들이 있구나. 요 이뿐 것들, 이라고 하면 안 되겠구나, 이뿐엄마랑 딸들같으니라구.
15.
두어시간 전에는 후배와 통화가 되었다. 부산이라네.지금은 역광장에서 빠져나와 건너편 차이나타운에 있는 듕국집에서 탕슉을 먹고있다고.오호라,잘했다. 무릇 집회란 바로고런 게 맛이지(라는 게 나으 지론.)빼갈도 시켜머거라.
16.
오늘은 슈퍼크레인 85호 로보트 티셔츠를 입고 도서관에 갔다.내가 할 수 있는 거라곤.
17.
줄넘기를 하고 들어왔다. 아무튼 소방관 지씨 엉아의 그 저주에 가까운(뒤집어 말하면 확신이 될 수도 있는) 말을 듣고 벌써 두 달이 넘어가나 보다. 내가 그런 거에 약해, 괜히 그런 식으로 뭐 하나 걸어놓고 나면, 정말 그렇게 될 것 같단 말이지. 너 앞으로 날마다 줄넘기 안 하면은 올 해도 파이다, 라던 말. 어휴, 그 말 때문에 내가 빗속에서도 나가 줄넘기를 하고 있단 말이지. 물론 엊그제처럼 우르릉쾅쾅 천둥에 번개, 폭우가 쏟아질 때는 아니지만도, 살살 내리고 그러면 그것도 그냥 못넘기겠어서, 속편하게 하고 말지, 하는 심정으로다가.
18.
솔직히 어떤 때는 비 좀 안 오나, 하고 바깥엘 내다보고 그럴 때도 적지가 않았다.그르니까 내가 정해놓고 하는 그 운동시간, 고 때 잠깐 비 좀 더 오지 하면서. 그러니까 나가기 싫어 억지로 나갈 때가 더 많은 거 같기도 하다는 말. 그런데 참 이상한 게 나갈 때는 죽상을 하고 나가도 들어올 땐 아주 기분이 좋아져 들어온다. 요즘엔 삼천 개를 쉬지 않고 그냥 쭉 해. 뭐랄까, 이것도 마인드콘트롤 뭐 그런 거가 될까. 이천 번까지 넘을 때는 오십 점짜리일 번 문제 푼다 생각하고, 그 다음 오백 번, 오백 번은 이십오 점짜리 2, 3번 문제를 푼다 생각하면서. 좀 쉬었다 하자 싶다가도 시험보는 연습이다, 생각하면 정말 그런 것 같은 게, 하이고, 참 별 짓을 다한다, 진짜.
19.
하여튼 뭐,그렇게 뛰어 유산소운동이 되면은 뇌에 산소 공급도 잘 되고 그런다니까. 그래, 책상에 앉아 두세 시간 멍텅하게 있느니 그리 뛰고 들어오면 기분도 좋고, 뭔가 좋을 거 같으니 좋잖아. 그리고 소방관 지씨의 그 말이 어떻게 저주이지만, 날마다 하면은 된다, 했으니 저주만은 아닌 거지 뭐야. ^^
20.
오늘은 줄넘기를 하면서 무어를 풀다 들어왔더라. 용마루 양성바름에 대한거를 했나, 각황이와 마곡이 두 건물에 쓰인 충량이며 멍에창방그런 거를 머릿속에 띄워놓고 그랬을까. 기차타고 올라가고 있을 엄마를 생각했을까,개를 안고 있다고옆자리앉은 아가씨가 싫어하면 어떡하나, 그런 생각을 했나, 고 녀석은 빼갈을 시켰을까 안 시켰을까, 백오십오미터 높이 그 꼭대기의 밤은 얼마나 외로울까, 그런 생각을 했을까.
21.
욕실이 반짝반짝하니, 바가지에 물을 퍼다 끼얹으면서도 조심조심하게 된다. 엄마가 갔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