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금

굴 속의 시간 2010. 10. 6. 04:35

닷새 남았다. 그러고나면 뭣부터할까, 아직 아무런 생각도 짜지 못하고 있었다. 그간 저금해놓은 술자리들이야 하루이틀에 엎어지고 자빠져서 될 일이야아니겠고, 솔직히술이라는 것이 그리 땡기지도 않는다. 그래서 요 며칠 새만 해도 여기저기의 애인님들께서 그날 대전에서 있을시험장 앞으로 내려가 기다리겠다 하기도 했는데, 그냥 다 마다했다. 핑계가 아니라정말, 그렇게 여섯 시간의 시험을 치르고 나오면기운도 다 빠져, 진도 다빠져, 무엇보다몸속에 있는 것들이 다 빠져나간 것처럼 다리가 풀리고 마음이 텅 빈 것 같아 기분이 어떨까 싶기 때문이었다. 교문에 엿은 되었으니무적컨디션일 수 있기나 빌어주세요. ㅎ 아니다, 모닝콜은 필요하겠구나. 아무래도 그 전날엔그 어디 여관방에 들어야 할 텐데거까지 갔다가늦잠에고사장도 못들어가보는 코메디를 할 수도있을 테니.

그러고는 어디를 헤매고 다니게 될까 하다가 눈에 띈 게 이 영화였다. 순례 언니가 찍었다 하고, 공효진이 나온다 했으니어느정도 영화 잘못 골랐네 하는실패율은 덜 하지 않겠나.지난 번날아라, 펭귄이 생각보다 잘 되지 않아 안타까운 마음이 없지 않았는데,이번엔 소다. 줄거리가 어떻다더라,남자 주인공은 시골 백수인가 보던데. 아부지가 몰래 소를 팔겠다고고삐를 잡고 우시장엘 나갔는데, 소 값을너무 안 쳐주더라는거지.소 이름이 먹구라던가. 아, 몰라.어디서 읽었는데 굳이 다시확인하려니그건 귀찮음. 암튼 그러저러 해서 소는 끝내 못 팔고, 못 판 건지 안 판 건지, 소를 끌고 집으로 가지는 못하고 그 길로 해서 여행을 다니는 거라나. 그러면서 옛 애인이었던공효진도 그 길에 함께 하게 되고. 대충그런 이야기라는데 뭐 줄거리로만 보면 그렇다 할 것이 뭐 있는 건 아니다.소가 나온다는 거에서 급반가움이 들었던 걸 생각하면더더구나 소재주의의 혐의가 들지 않는 것도 아니나 그래도 좋잖아.임순례도 좋고, 공효진도 좋고, 소도 좋다. 그래서 막연히 그런 생각을 잠깐 해보곤 했다.남포동에나 가서 며칠 꿈벅거리며 소 걸음으로 돌아다니다 올까, 어쩔까.

그러다 좀 아까전화를 받았다. 혼자 훌쩍 제주도에가 있다는 가출 중년아저씨. 다음 주에도 계속 가출해 있을거야, 너 시험 끝나고 할 거 없으면 지리산에나 같이가자. 좋아요.그래서 지리산으로 가기로 했다.산행은아니고, 거 왜 올레니 둘레니 하면서 옆구리 길을 타고 넘는 거.안 그래도 올 가을은 어디든 걸어야겠다, 산이나 헤매야겠다 하는 마음을 이미 바닥에 깔고 있었으니, 아주 반가운 제안이었다. 게다가 어디가 되었건 언제라도 함께 걸어도 좋을 사람과 함께라면. 난지도야, 같이 가자. 그렇게 그 주에는 지리산 옆구리를 타게 되겠고, 그 다음 주엔 아아들하고 약속한대로 설악산엘.그리고 그 다음엔 아직 뭐, 차차 아무 곳이라도 발 닿는대로면 되겠지.

아무튼 그리해서 이 영화도 일단 저금이다. 아, 이럴 때는 저금이 아니라 찜해 둔다 하는 게 맞겠구나. 소와 함께 여행하는 법은 잠깐 미뤄두고, 일단은 그냥 소가 되어.

소와 함께 여행하는 법 / 임순례, 공효진, 임영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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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냉이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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