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 넘으니 산이라고. 어쨌든 꾸역꾸역 도면을 그려가기는 했다. 올 봄에 재직자 훈련과정으로 캐드 학원이란 데를 다니긴 했지만, 그걸로만 땡, 그 뒤로는 프로그램을 열어 한 번도 놀아보지를 않았으니, 여전히 까막눈이나 다름없다. 그런 가운데에도 발표 과제는 계속 이어지고 있고, 손으로 그려가면서 어찌어찌 버텨보고는 있는데, 점점 한계에 다다랐다. 머리가 나쁘면 손발이 고생이라더니, 그거 할 줄 모르는 채로 설계에 도면 그리기를 하자니, 이만저만 고생이 아니다. 컴퓨터로 하는 작업이었으면 선 하나 잘 못 그렸어도 이리 옮겼다 저리 옯겼다, 늘였다 줄였다, 뒤집었다 돌렸다, 똑같은 그림 반복하는 거는 복사해다가 한 방에 붙여 해결하기도 할 텐데. 이건 뭐, 일일이 손으로 하자니 선 하나 잘못 넣으면 처음부터 다시, 치수 하나 잘못되어 있어도 처음부터 다시, 똑같은 선도 눈 비벼가며 하나하나 그려넣어야 하는.
그래서 날마다 방바닥엔 지우개 가루가 한 무데기씩 쌓이곤 했다. 하다하다 안 되니 나중에는 틀린 부분들에 종이를 오려붙여가며 땜빵하기를 수십 군데. 그랬으니 도면이란 것이 아주 너덜너덜. 평면 구성이나 입면 계획, 구조와 같은 건축 계획상의 내용은 둘째 치고, 도면이라는 것 자체가 되질 않으니, 이걸 이래도 되나 싶기도 하다가, 내가 지금 몰 하고 있는 건가 한숨을 쉬다가, 그러다가도 또다시 꾸역꾸역 모눈종이 칸 수를 세고 있어 ㅠㅠ
그리하여 이번 주까지도 밤을 꼴딱 새워가며 어찌어찌 해가기는 했다. 이젠 나이가 들어 예전처럼 날새기 같은 건 다시 못할 줄 알았더니, 손을 떨며 선을 그리다 보면 삼십 분이나 지났을까 싶은 데도 세 시간이 훌쩍 지나고, 요것만 하고 아침을 먹어야지 하는 게 저녁 때가 지나도록 꼬르륵꼬르륵 그 자리에 앉아 있기를 며칠씩. 하여 이번 주 교육에는 또다시 이 손도면을 들고 가기는 했지만, 이걸로는 여기가 한계다. 아마 교육생들이 계획한 설계를 가지고, 거기에 모형도 만들고, 그에 대한 패널까지도 하나씩 만들어 전시회라는 것을 제법 그럴싸하게 하게 되는 것 같은데, 패널을 준비하기에도, 모형을 준비하기에도, 이 손도면만으로는 어림도 없단 말이지. 허걱. 다음 주까지 패널을 완성해가야 하고, 모형 만들기를 위한 콘타를 구성해서 오라 하는데, 엄마, 난 몰라!
드디어 결단의 때인가 보다 싶어, 교수님에게 저는 여기까지인 것 같다고, 다음 주부터는 아무래도 그만 나와야할 것 같다고 말을 꺼내놓기는 했는데, 이건 모. 그러고는 수업을 마친 주말, 절애 오두막에서 하룻밤을 꼬꾸라지고, 또 하루는 에게해에서 꼬꾸라진 다음, 속초 터미널에서 다시 부천으로 기어올라가. 조과장님이, 그런 거면 진작 말을 하지, 라고 하면서 캐드 도면 작업을 해주겠다고 했어. 그리하여 동앗줄 하나를 붙잡았다. 이제 그 다음은 패널 작업을 위한 포토샵이 문제. 나는 판넬을 만드는 거라 하여 문방구에 가서 색상지 같은 거 사고, 도면에 사진 같은 거 색종이에 오려 붙이면서 만드는 건 줄 알았더만, 인터넷에 건축과 학생들 졸업 패널이니 공모전 패널 같은 거 뒤져보니 그런 게 아니자나. 이걸 나보고 어떻게 하라고. 겨우겨우 기어오르고 나니 산너머에 또 산이 있고, 그 뒤에는 그보다 더 골아픈 산이 있어. 목수한테 끌, 망치가 도구이듯이 설계하는 사람한테는 그런 프로그램들이 기본 연장일 텐데, 연장 하나 없이 설계를 배운다고 이러고 있으니, 이런 딱한 녀석아.
일단 이 너덜너덜한 손도면이라도 스캔을 받아 어떻게 써먹어보려면, 깨끗이 다시 옮기는 것부터 해야 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