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안에서 1214] 유인물

새벽에 나가보니 어젯밤 띄워놓은 흡착물들은 검은 기름 덩어리가 되어 간조 뒤 모래밭에 그대로 남아 있었다. 오전 일은 그것들을 걷어내는 일부터 시작되었다. 게다가 곳곳에서 삽이나 바가지로 모래를 뜨지 말라는 얘기를 소리치고 다니는 사람들이 있었고, 마을 주민들도 다급한 마음에 새로 들어오는 봉사자들에게 다 쓴 흡착물을 바다에서 걷어내지 말라고 쫓아다니고 있었다. 여전히 흡착물은 모자랐고, 다녀가는 사람들이 벗어놓는 방제복들을 흡착물 대용으로 바닷가로 옮겨왔고, 그러한 노력 덕인지 오늘은 해안선을 거의 흡착물들로 펜스를 만들 수 있었다. 하지만 오후 세 시가 되면서 봉사자들은 또다시 거의 다 빠져나갔고, 가장 바쁜 그 시간 사람들은 얼마 남지 않았다. 그래도 간혹 기름 묻은 모래흙을 퍼담느라 가득한 양동이며 마대, 그것들은 모래밭에 그대로 남아 있었고, 곧 밀려올 바닷물에 그대로 쓸려갈 판이었다. 밀물은 생각보다 빠르고, 몇 남지 않은 사람들은 그것을 육지 위로 옮겨내느라 바빴다.

저녁은 먹지 못했다. 구세군 밥차가 밥을 배식한다고 했지만 다섯 시도 되지 않아 그것은 끝이 났다. 그곳에 있는 분이 말하기를 오후 세 시면 사람들이 다 나오니까 그 때 배식을 해야 한다던가. 들어오는 밀물을 보면서 바닷가에 나갔고, 근무 시간을 지키러 나온 경찰들을 몇 보았다. 의경들에게 부탁해 해저문 시간 만조가 들 때 기름 먹은 옷가지들 거두는 일을 도와달라 부탁했다. 글쎄, 지휘관이 없는 채 사병에게 부탁한 거라 말이 될까 싶었지만 어쨌든 절실한 마음에 거듭 말을 했다. 지휘관 되시는 분들께 꼭 말씀해 주세요, 지역 분들이 가장 바라는 게 그거라고.

사흘 째가 되고 보니 이곳에 길게 있으며 일을 하는 개인 봉사자들을 이렇게 저렇게 알게 된다. 있다보면 뜻이 맡고, 어떻게 해야 일을 정말 일이 될 수 있게 하는가를 함께 고민도 한다. 그 분들과 함께는 야간 작업이 가능하니 그것을 매개로 모이게 된 것이다. 모여 얘기를 나누는데 답답해하는 부분들은 크게 다르지 않다. 상황실에서 체계를 잡아주지 못하는 점, 봉사자들에게 무슨 일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해 기초적인 오리엔테이션도 없다는 점, 그러다보니 오히려 걷지 말아야 할 흡착포를 걷어내거나 그리 쓸모 없는 일에 많은 땀을 쏟곤 하는 일들이 있다는 점, 방제복들이 함부로 쓰레기가 되어가는 점…… 들이었다. 하지만 오늘이 어제보다 나았던 게 마을 주민과 봉사자 몇몇 사람들이 쫓아다니며 소리친 것이 어느 정도 분위기를 바꾸기는 했다는 거였다. 이런저런 이야기들 끝에 우리끼리라도 역할을 나눠보자는 얘기가 있었다. 그 중 내가 맡은 건 이곳에서의 할 일에 대한 기본적인 수칙이 될만한 유인물 문안을 쓰는 거였고, 조금 전에야 써서 편집할 분에게 보냈다.

되고 힘들지만 사람들을 만나서 좋다. 때로 안타까운 모습들이 있기는 하나 함께 애쓰는 수많은 분들의 얼굴에 맺힌 땀방울은 그래도 아름답다는 생각을 한다. 이곳에서 처음 만난 사람들과손을 맞추고 있고, 또 알게 지내던 분들을 이곳에서 만나면 그 반가움이 새롭기도 하다. 오후에는 고마리가 왔고, 밤이 되어서는 병수 아저씨가 서둘러 달려왔다. 내일은 낮은산 식구들이 다 같이 온다는데, 그래서 점심 밥 먹고 조금 쉬던 시간에는 비옷이며 고무장화들을 에이급일만한 것들로만 좋은 것들을 구해 숙소에 가져다 놓기도 했다. 나는 살람 아저씨와 다닐 여행이 예상보다 늦춰졌고, 나도 이틀을 더 이곳에서 머물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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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 전까지 쓴 유인물 문안)

만리포를 찾은 자원 봉사자 여러분께

0. 들어가는 말

바다 기름 유출을 보며 느낀 우리들 마음은 하나일 거라 생각합니다. 바다가 숨이 막히고, 그 바다에 삶을 기댄 갯목숨들의 숨이 막히고, 또한 우리 어민들의 삶이 막히는 이 끔찍한 재앙 앞에서 삶과 목숨의 절실함을 느끼며 이곳으로 먼 길을 오셨습니다.그 절실한 마음만큼 우리의 노력이 이 바다를 살리는데 보탬이 되고자 하는 바람은 누구나 같은 것입니다.하지만 마음만으로 달려온 이 갯가에서 실제로 어떤 일을 어떻게 해야할지 몰라 우왕좌왕하며 일을 못찾고 가슴만 답답했던 시간이 없지 않던 것이 사실입니다. 때문에 이렇게나마 우리의 마음이 바다를 살리는 데에 조금이라도 더 앞당기게 할 수 있도록 몇 가지 수칙을 말씀드립니다.

오전

1. 가장 먼저 해야할 일은 흡착포를 비롯한 옷가지들로 해안선을 두르는 것입니다.

바닷가에 나가면 기름을 머금게 하는 흡착포 및 흡착포를 대신할만한 옷가지들을 받으실 것입니다. 또는 곳곳에 그러한 기름걷이 물품들이 놓여 있을 것입니다. 모여주신 봉사자 분들이 가장 중점으로 하셔야 할 일은 그것들을 해안선 가장자리에 뿌려 놓는 것입니다. 혹 파도에 쓸려 먼 바다로 떠나갈까 걱정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그 흡착포들은 밀물이 들어오느 동안 계속해 바닷물에 있는 기름을 엉기며 만조가 될 때까지 해안선 끝으로 밀려오기 때문입니다. 지금까지는 많은 봉사자 님들이 흡착포를 가지고 모래밭에 묻어 있는 기름을 닦아내는 것에 많은 힘을 쏟았지만, 실제로는 그것이 그리 큰 효과를 보지 못합니다. 모래밭의 기름은 단지 만조 후 쓸려나가는 바닷물에서 약간의 기름이 모래밭 표면에 묻어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것은 바닷물에 있는 기름을 잡는 것인데,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최대한 많은 양의 흡착포를 간조 이후 바닷물 가까이로 뿌려 놓는 것입니다. 그렇게 뿌린 흡착포는 뒤집을 필요도, 붙잡을 필요도 없습니다. 기름을 잡는 일은 우리 손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밀물에 밀리는 흡착포가 그 스스로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할 일은 최대한 많은 흡착물들을 바닷물에 던져 넣는 것입니다.

2. 또한 많은 일손이 필요한 일은 지난 밤 걷지 못한 흡착포들을 육지로 걷어내는 일입니다.

바닷가에 띄워 놓은 흡착포와 옷가지들은 만조와 간조를 되풀이하며 그 물속에 섞여 기름들을 흠뻑 빨아들입니다. 하루가 지나 조수 간만을 두 차례 이상 지난 것들은 먹물을 머금은 솜처럼 기름을 흠뻑 머금은 채 놓여 있습니다. 그것들이 바로 바다를 더럽히는 기름인 것이고, 그것들은 다시 밀물이 들어오기 전에 육지로 건져내야 합니다. 하나하나집어 담아 마대자루에 담거나 더 무거운 것들은 포크레인, 트렉터의 힘을 빌어 육지로 내 놓습니다. 기름을 흠뻑 머금은만큼 무게도 꽤 나가기 때문에 새로운 흡착물을 내던질 때보다 더 많은 힘이 필요합니다.

3. 모래밭에 묻은 기름을 걷어내는 일로 삽이나 쓰레받이, 바가지를 쓰지 않습니다.

지난 며칠 동안 봉사자들이 흘린 많은 땀에도 불구하고 방제작업을 어렵게 한 일은 바로 삽이나 쓰레받이로 모래흙을 걷어낸 것 때문입니다. 우리가 흔히 기름 방제를 생각할 때 초기 모습에서 보이던 삽으로 원유를 퍼내고 쓰레받이나 바가지로 퍼내는 일일 것입니다. 하지만 지금의 양상은 많이 달라져 만조 이후에도 모래밭 위로 남는 기름은 두꺼운 덩어리로 남지 않고 얇은 기름막으로 남아 있습니다. 많은 봉사자들은 눈에 보이는 그 기름을 제거하기 위해서 삽이나 쓰레받이로 그것을 걷어내려 땀흘리며 일을 하지만 실제로는 기름보다 모래를 더 퍼다 담는 일이 허다합니다. 그래서는 기름탱크로 옮겨 싣기에도 어려울 뿐더러 흘리는 땀에 견줘 걷어내는 기름의 양은 무척 작습니다. 표면에 묻어 있는 기름은 결국 다시 만조가 되면서 떠오르게 되고, 그것은 해안가부터 떠밀려오는 흡착물에 엉겨붙게 되어 있습니다.

오후

4 오후 세 시가 되면 방제 도구들을 육지 위로 꺼내는 일이 가장 중요합니다.

밀물이 본격적으로 시작하는 오후 세 시 쯤은 많은 봉사자들이 바닷가를 떠나는 시간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 때 가장 안타까운 모습은 그 동안 걷은 방제도구들을 그대로 바닷가에 둔 채 나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방제도구란 흡착물이 아닌 기름을 퍼담은 양동이나 마대자루, 혹시 몰라 썼을지 모르는 삽과 쓰레받이 따위입니다.) 밀물은 생각보다 빨리 들어와 자칫하면 그 동안 애써 모인 기름들을 그대로 덮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지난 며칠까지의 모습은 오후 세 시 이후 봉사자들이 빠져나가면서 그것들을 그대로 둬 자칫 그대로 다시 바닷물로 버려지게 됩니다. 기름을 모은 양동이나 마대자루는 생각보다 무겁고, 이 일은 봉사를 마치고 나오는 분들이 함께 해 주셨으면 합니다.

5. 봉사를 마치고 돌아가는 옷가지는 함부로 버리지 말아주십시오.

기름 방제 일은 몸에 해로울 위험이 있는만큼 거의 모든 분들은 아주 단단한 차비를 하고 옵니다. 방제복과 고무장화, 면장갑에 고무장갑, 마스크와 비옷까지……. 이차 오염을 막기 위해서는 필수적인 것이지만 또한 이것들이 엄청난 쓰레기가 되고 있다는 것은 무척 가슴아픈 일입니다. 깨끗이 벗어놓으면 그 다음 봉사자가 다시 쓸 수 있는 것들임에도 불구하고 아주 쓸 수 없이 버려 놓는 일이 무척 많습니다. 적어도 겉에 입는 비옷이나 고무장화, 고무장갑은 교체되는 봉사자들이 다시 쓸 수 있는 상태입니다. 하지만 험하게 벗어놓고 분류없이 아무런 쓰레기들과 함께 버려지게 되면 그대로 쓰레기차에 실려갈 뿐입니다. 하루 천 명의 봉사자가 다녀가면 비옷과 제복 천 벌에 고무장갑과 장화가 천 켤레가 버려지는 실정입니다. 쓰레기를 만드는 일은 바다에 기름을 붓는 일과 다를 바 없습니다. 비옷과 방제복, 고무장갑과 장화들은 반드시 분리해서 모아주시기 바랍니다.

위에 쓴 네 가지 정도의 수칙만 지켜주신다면 우리의 태안 바다가 생명을 되찾는 일은 여러분의 마음만큼 최대한 빨리 되살릴 수 있을 것입니다. 이 바다를 찾은 모든 이들의 절실한 마음을 모아 우리가 흘리는 땀과 노력이 바다 생명을 진정으로 지킬 수 있는 길에 함께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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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냉이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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