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과 소녀

냉이로그 2008. 10. 16. 00:32

희곡이라는 장르의 글을 이제껏 한 번도 제대로 읽어본 일이 없다. 유리디스를 손에서 내려놓으면서 나는 무어에 이끌리기라도 하듯 장식처럼 꽂아두고만 있던 희곡집 한 권을 꺼내어 읽기 시작했다. 아리엘 도르프만 희곡선 죽음과 소녀》. 출판사에서 보내줘 받아놓고는 있던 책이지만 좀처럼 손이 가지 않던 거였다. 아무래도 희곡이라는 익숙치 않은 장르의 글을 읽는 것에 훈련되지 못했다는 생각에 엄두를 내지 못한 거였겠지.

희곡을 읽는다. 생각보다 잘 읽힌다.다른 어떤 글을 읽던 때와는 아주 색다른 느낌.작품의 배경이 어디가 되었건 머릿속으로 떠오르는 곳은 오로지 어두운 소극장의 무대일 뿐이다.그곳이 바다라 해도 소극장 무대 위의 바다이고, 도시 한 복판이라 해도 소극장 무대 위의 도시. 학교 운동장이 되었건떠들썩한 장터가 되었건 그 모든 이미지는 소극장 무대라는 액자 안에서 펼쳐진다. 무대 위로 아무리 밝은 조명이 비춰진다 하더라도그건극장 안의 어두움을 전제로 하고 있는 것이다. 이미 이것은 지금껏 내가 읽은 소설이나 동화 장르와는 판이하게 다르다.나는 작품을 읽으며 현실이 아닌 무대 위의 현실을 보게 된다. 인물들의 대사 또한 그러하다. 소설이나 동화에서 읽는 인물들의 대화는 실제그대로떠들거나 속삭이는현실의말들로 들려왔지만,희곡의 대사들은 아주 전혀 다른 울림이다. 배에힘을 가득 주고 내뱉는, 객석 맨 뒷자리까지 들리도록 말하는 배우들의 발성법, 그것으로 들리는 것이다. 때문에 같은 내용을 가진 작품일지라도 그것을 소설로 읽는 것과 희곡으로 읽는 것은 전혀새로운 작품을 읽는 것만큼이나 다른 것이다.…말하고 나니 참 별 것도 아닌 얘기, 어린시절 학교에서 배우고 지났을 법한 상식수준의 얘기건만나는 이제야 세상 처음 알게 된 것만 같은 기분에 휩싸인 것이다.

죽음과 소녀》에는모두 네 작품이 실려 있다.<과부들>, <죽음과 소녀>, <경계를 넘어>, <연옥>. 네 작품 모두 전쟁과 군사독재의 끝, 폭력이지나간 자리에서 황폐화된 인간의 내면을 헤집는다. 인간에 대한 탐구는 그리 만만한 것이 아니다. 기억과 상처, 제도와 화해, 용서와 치유 그리고 잃어버린 목소리, 잃어버리도록 강요받은 목소리….

죽음과 소녀 / 슈베르트 현악 4중주

어느 페이지인가에 연필을 찾아 밑줄을 그은 단락이 있다. 141쪽. 이 책에는 각 작품마다 그 끝에 따로 작가 후기가이어지는데 그 가운데 <과부들>이라는 작품 뒤에 붙은 작가 후기의 한 부분이다. <과부들>은 도르프만이 처음에는 시로 썼다가 소설로, 그 뒤에 희곡으로 고쳐 쓴 작품인데 희곡으로 써서 무대로 연극을 올린 뒤에도 거듭 고쳐 쓰곤 했다. 윌리엄스타운의공연에서 관객과 평론가들에게는 열광적인 평을 얻었다 하지만 도르프만은 그 공연을 보며 아직 소설의 자장에서 벗어나 자유를 얻지 못했다는 것을 느껴 새로이 개작에 들어가게 되는데 이 때 쿠슈너라는 무명 희곡 작가를 만나 함께 작업을 하게 된다. 아래 인용한 단락에 나오는 '그'는 쿠슈너를 말하는 것이다.

… 그는 나와 동일한 표현의 문제로 심각하게 고민하고 있었으며, 정치와 상상력이 교차하는 방식들을 어떻게 다룰 것인지, 고통과 억압을 절망에 빠지지 않고 어떻게 그릴 것인지, 어떻게 일상대화를 구사하면서도 동시에 신화적일 수 있을지, 어떻게 선전 위주로 가거나 교조주의적이지 않으면서도 인간의 저항능력과 활력을 보여줄 것인지, 어떻게 우리가 자기 내부에 적을 지니고 있는지 또 어떻게 가장 훌륭한 이들이 가장 끔찍한 일을 저지를 수 있는지 등의 문제를 놓고 분투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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