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처님이 오신 날, 그리고 할아버지가 눈감아 가신 날. 하늘이 맑고, 연녹의 이파리들이 깨끗하다. 잠이 많아진 달래는 아직 이불 속에서 눈을 감고 있다. 평온하게 잠을 자는 얼굴이 고마울 뿐. 달래의 뱃속에는 또다른 심장이 뛰기 시작했다. 감자, 우리는 그 아이를 감자라 부르기 시작했다. 아마 올 봄에 놓았을 그 햇감자들, 아직은 그렇게 주먹보다 작은 크기로 이 우주의 기운을 받고 있을 것이다. 그렇게 우리에게도 감자가 왔다. 처음에는 어리둥절했고, 자꾸만 잠을 자는 달래를 보며, 조금씩 실감이 되며 또한 긴장이 된다. 그러고보니 나는 준비한 것이 아무 것도 없다. 이제야 출산이며 임신에 대한 책 몇 권을 주문해놓고, 수수팥떡이니 하는 싸이트들을 들여다보며 아비가 되는 일을 어떻게 준비해야 하는지 어수선하게 찾아보고 있다. 그러니 달래가 약간만 배를 움크려도 나는 당황스러움을 감추지 못하고, 약간의 혈흔에도 침착하지를 못한다. 물론 겉으로야 태연한 척 의연한 척.
축하의 인사를 많이 받았다. 나보다도 더 기뻐해주는 사람들. 그 축하의 인사와 기쁨에 겨운 목소리들이 얼마나 고마운가. 아마 할아버지에게 이 소식을 전할 수 있다면 누구보다 기뻐했을 것이다. 언제나, 가장 많이 하시던 말씀이 바로 그거였으니. 좋은 글을 써라, 는 말도 아니었고, 어떤 일을 해야 한다는 말도 아니. 어서 장가를 들어 아기를 낳아라, 하던 말. 햇감자를 찌어내, 오두막 들마루에 앉아 껍질을 벗겨 먹으며, 감자 이야기를 전할 수 있다면, 아마 저 햇살처럼, 보드랍게 웃으며 좋아하셨을 텐데, 하는 상상이 행복하다.
뭐가 뭔지 아무 것도 모르겠는 나는, 병원에 찾아가는 길이 무슨 소풍 길 같기만 했다. 아마 달래는 많이도 떨렸을까. 이제 넉 주가 되었다 하니, 그렇담 아마도 우리가 지구를 타고 해 한 바퀴를 크게 돌았을 그 즈음, 삼신 할머니가 점지해주신 모양이다. 어떤 아기가 나오더라도, 혹여나 몸 불편한 아기가 나올지라도 고스란히 축복으로 맞이할 준비가 필요해. 이미 또 하나의 씨앗이 이 우주에 시작되었고, 그 자체로 우주가 될 또 하나의 세상이 열리고 있다. 잠든 달래를 바라보면 저 배 안에 씨앗 하나 들어왔구나, 한 점 우주가 열리고 있구나, 달 하나를 품었구나, 별빛 한 줄기 깃들었구나 하는 생각들이 실감없는 관념처럼 들다가도 순간순간 저릿한 놀라움이 되곤 한다.
감자를 상상한다. 그리고 나를 상상한다. 나는 이 아가와의 만남을 어떻게 준비해야 하겠는지. 그리고 이 아기와 어떻게 살아가게 되려는지, 아비로서 무엇을 해주어야 하는지. 그런 생각에 잠겨들다가 끝내 다다른 것은, 무언가를 해준다 하는 생각이야말로 내가 이 아기와의 만남을 준비하며 가장 먼저 버려야 할 것인지도 모른다는. 단지 겁내야 할 것은 이 아기의 세상에 아비라는 존재가 걸림돌이나 장애가 되지나 않을 수 있다면 그게 다행일 뿐.
아마도 이 아기는 성장해가면서 많이도 넘어질 것이다. 때로는 위태로운 길로 절뚝이며 들어서기도 하겠지. 그런 때마다 내가 해주어야 할 것, 해줄 수 있는 일은 그저 뒤에서 지켜보는 것 뿐. 안전하고 편안한 길을 안내하려 해서도, 내 생각에 옳다고 생각하는 길을 가르키려 해서도 되지 않아. 보살핌이나 보호라는 말로 나는 어쩌면 내가 가진 울타리 안에 이 아기를 가두려 할지 모른다. 교육이니 기본이니 하는 말로 내가 가진 도덕이나 윤리, 가치 따위에 이 아기가 길들여지기를 바랄지도 몰라. 안타까움이 있다면 그것은 온전히 내 몫일 뿐이다. 끝끝내 지켜봐 주는 일, 그리고 믿음을 저버리지 않는 일, 내가 해줄 수 있는 게 있다면 그게 다여야 한다. 마치 내 엄마가 지금껏 내게 그러해온 것처럼. 물론 그게 얼마나 힘든 일이겠는지는 감히 상상이 된다. 아마도 자연스레 내 안에는 어떤 기대나 바람이 생기기 마련이겠지. 그러나 너의 세상은 온전히 너의 것. 다행스럽게도 아기가 아빠를 좋아해, 아빠와 놀기를 좋아하고, 아빠에게 무언가에 대해 묻기를 좋아한다면, 그것만으로도 기꺼이 행복할 수 있겠지.
감자가 왔다. 그 자체로 하나의 세상이고, 하나의 우주를 여는 목숨 하나. 그 자체로는 어떤 숭고함으로 표현해도 넘치지 않을 귀하고 소중한 것. 그러나 내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그 숭고함은 세상 모든 목숨의 그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귀하되 귀하지 않은, 소중하되 특별하지 않은. 오히려 내가 이 아기로 말미암아, 그동안 내가 쉽게 스치고 지나쳐버리던 목숨들의 고귀함을 배울 수 있기를, 하찮게 보아넘겼을 그 목숨들에게 숭고함을 느낄 수 있게 되기를. 모성이라고도 하고, 여성성이라고도 하는, 그 생명감수성이라 하는 것은 어쩜 그런 것인지도 모르겠다. 내 아기만을 세상의 특별한 것으로 여긴다면 그것은 엄청난 욕심과 폭력의 시작이 되겠지만, 내 아가로 인해 세상 모든 목숨을 귀하게 받들 수 있게 된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