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 강

냉이로그 2017. 8. 18. 18:18

 

 

 헉헉거리던 여름이, 가는가. 감당키 어려웠다. 몸은 몸대로, 셋이나 되는 현장을 가까스로 막아내느라 후덜거렸고, 마음은 마음대로, 이래도 되는 걸까 싶은 마음에, 잘하고 있는 건가, 하는 자괴에, 버티기가 어려워. 토해내지 못하는 고립감, 어디서부터일까 싶은 망가진 마음.

 떼를 쓰고 고집 피우는 걸 배우면서, 달래는 감자에게 힘겨워했고, 나는 애비가 되어 그런 상황에서 제대로 갈피를 잡지 못했다. 오히려 감자에게 연민이 깊어 받아주고 맞춰주는 모습으로, 달래의 걱정과는 전혀 다른 방향에서 내 방식을 바꾸려하지 않았으니, 달래에게는 내가 또다른 벽이었다. 달래는 달래대로 고립된 채. 

 큰이모의 메일을 받은 게 언제였더라. 달래가 뛰쳐나가 바다 앞에 서서 이모에게 울음을 쏟아내던 다음 날, 이모가 보내온 편지. 한라산에서 내려오던 운전 길, 신호에 걸린 짬에 휴대폰으로 메일을 열어보던 나는, 그 긴 메일을 다 읽기도 전에 운전대에 머리를 파묻어. 경적 소리에 놀라 출발 기어를 넣었지만 눈앞이 흐려져 보이지가 않던.  

 그러나 고마운 건 언제나 감자, 품자. 떼쓰고 고집부리는 거에 대해 감자랑은 조금씩 얘기가 되고 있는. 그리고 요즘 들어 그야말로 리즈 시절을 보내고 있는 품자. 나는 조금이라도 달라지기는 한 걸까. 그러나 여전히 나는 아가들 앞에서 혼을 내는 아빠, 무언가를 가르치는 아빠, 안 된다고 말하는 아빠가 되기를 주저하고 겁을 낸다. 감자에게, 그러면 안 되는 거야, 하고 말할 때, 혼이 나는 감자보다도 그 말을 하는 내 가슴이 더 벌렁대고 있으니.

 칠월 말, 속을 썩이던 한라산 현장 하나를 가까스로 준공했고, 돈내코 골짜기 현장도 간신히 준공을 보았다. 아직도 소소한 하자가 있어 연락이 그치지를 않으니, 전화기에 감독부서 번호가 뜰 때마다 심호흡을 하게 되지만, 그래도 어쨌든 큰 산을 둘은 넘어. 이제 남아있는 건 한라산 영실에 있는 현장 하나.

 칠월 들면서 제주에 내려온 근이는 한 달 열흘을 있다 지난 주에 올라갔다. 근이는 아주 훌륭한 육아 도우미였어. 집에 있을 땐 달래를 도와 감자, 품자를 봐주었고, 이제는 기저귀 가는 거며 옷 입히는 거, 목욕 시키는 거까지 못하는 게 없을 정도. 아, 머리 감기는 건 아직 자신이 없다 그랬던가. 하지만 무엇보다 높이 사는 건 그런 기능적인 스킬들이 아니라, 감자품자가 어찌나 잘 따르고 좋아하는지, 아가들이 좋아하고 따르고 싶어하는 녀석만의 그 무엇. 그렇게 근이는 집에서는 훌륭한 육아 도우미가 되었고, 저녁이면 나와 술을 먹어주며 형누나의 부부싸움을 다 지켜보았고, 나중에는 현장을 따라다녔다.

 고맙게도 제주에서 문화재기술자로 다른 회사에서 현장소장으로 있는 지웅이며 민규, 봉수. 이런 동생들이, 졸업 후 문화재수리를 하고 싶다는 근이를 함께 챙겨주었다. 제주에 내려와 한 일주일은 감기로, 또 일주일은 배탈로 힘이 빠져있던 근이는, 봉수네 읍성 현장에 며칠을 나가고, 지웅이네 성읍마을 현장으로 며칠을 나가면서 얼굴이 아주 달라졌다. 문화재 현장에서 소장으로 일하는 형들을 만나면서, 실제 현장을 보고, 일을 배우고, 그에 대한 공부를 어떻게 하면 좋겠는지를 들으면서, 막연했던 무언가가 눈에 그려지는 것 같다는. 다행이었다. 지웅이, 민규, 봉수가 해주는 얘기들은 내가 해줄 수 있는 것보다도 훨씬 실제적이었고, 구체적이었고, 믿음이 줄 만한 얘기들이었다. 일하는 데서도 늘 도움을 받던 동생들인데, 근이를 챙기는 거에서도 그렇게 챙겨주니 얼마나 고마웁던지.

 근이는 내가 일하는 한라산 영실 현장으로도 몇 차례를 함께 다녔다. 근이 앞에서 형아가 얼마나 볼품없는 현장소장인지, 그대로 다 보여줄 수 있었네. 이제 갓 대학을 졸업해 공무원 발령을 받아온 감독관 앞에서 얼마나 쩔쩔매며, 시달리고 있는지. 어쩌면 나는 부러 근이를 그 자리에 데려갔는지도 모르겠다. 형이 하는 일, 그 일을 가감없이 보여주고 싶은.

 육지행 비행기는 우리 다섯 식구가 함께 올랐다. 영월 집에 들렀다가 울진 처가로 가는 길. 근이하고는 영월까지 함께 가고, 거기에서 인사를 하기로. 그러면서 영월에 올라가는 길, 대구공항에 내리면 영양부터 들러가자는 것도. 고등학교를 졸업할 무렵부터 근이는 마리아 샘을 찾지 못했다. 엄마한테 찾아가 보라고, 군에 가기 전에도, 군에서 제대를 하고 난 뒤에도 늘 얘기를 했고, 녀석도 그러마 대답을 했지만, 선뜻 걸음을 내지 못하고 있어. 이렇게 차일피일 미뤄지기만 하면 나중엔 더 어려워질 텐데. 그래서 짠 계획이었다. 근아, 엄마한테 가자. 형이랑 누나랑, 감자, 품자랑 다 같이 영양 집으로 엄마한테 인사하러 가자.

 근이랑 함께 갔던 영양 산골짝의 마리아 샘 집. 말할 수 없는 그 무엇이 다 녹아내리는 것 같던, 눈물겨운 시간. 굽이굽이 산골짝, 그 길을 돌아나오면서 근이가 말했다. 엄마, 외롭겠다. 다녀오길 잘했다, 참 잘했다.

 영월. 감자하고는 하룻밤을 보낸 적이 있었지만 품자는 처음이겠다. 늦어도 감자가 초등학교에 들어갈 즈음부턴, 우리가 함께 살 곳. 두 녀석 모두가 제주가 고향이지만, 여기가 우리 집, 엄마아빠가 결혼해서 살았고, 몇 해 안으로 우리가 다시 살 집. 감자는 먼 길 나들이에 지쳤는지, 집에 가고 싶다, 는 말을 자주 했고, 그때마다 감자에게, 여기가 감자네 집이야, 여기가 우리집.

 감자 품자에게 모운동 구름을 보여주고 싶었다. 마침 새벽까지 비가 내리고 막 개이고 있던 참이었으니, 그런 날이라면 어느 때보다 멋진 구름을 볼 수 있을 것만 같은 날씨. 하지만 근이가 보아야 할 읍사무소며 은행 일들에, 강릉으로 가는 버스 시간을 맞추자니 오전에 움직이는 건 무리. 하여 근이가 버스 타기 전 그 시간까지는 장릉을 둘러보았다. 한참 한옥 구조에 관심을 가져가고 있는 근이에게 전사청이니 종각이니 정자각 같은 건물들을 하나하나 뜯어가며 얘기해주니 얼마나 좋아하던지.

 근이와 인사를 하고난 뒤에야 아쉬운대로 오후 늦게 모운동엘 올라가보았지만, 늘 그렇듯 지는 해엔 그 구름을 볼 수는 없어. 그래도 반 년 가까이 작업실 삼아 그꿈들을 썼던 폐광의 탄광사무실을 찾아올라가 보았는데, 어쩐 일인지 그 조립식 건물도 다 허물어져 있는.

 집으로 돌아오는 길, 고씨굴 다리 아래로 흐르는 동강에 멈추어 섰다. 아무 것도 위로가 되지 못하는 시간을 보내고 있던 참인데, 신기하게도 그 강에서의 시간만큼은 위로가 되어던 것 같아.

 

 

  

 

 

 

 

 

 

 

 

 

 

 

 

 

 감자 형아는 아직도 강자갈들에 정신이 팔려 있어 ㅎ

 

 

강이 고마웠다. 괜찮다, 괜찮다, 말해주는 것만 같던, 가만가만 흐르던 강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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