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자로그 2014. 5. 7. 00:26



 병수 아저씨가 선물로 주고간 조그만 솟대. 아저씨의  자모솟대들 가운데 나는 이걸 가장 좋아한다. 어디에다 세워놓아도, 어떤 풍경이어도, 그대로 강렬한 시가 되어버리고 마는. 


                                                                                                    애월 한담 산책길.


 빨간 날이 이어진 연휴, 세 식구가 만났다. 아빠가 올라가지는 못하고, 달래와 감자가 비행기를 타고 내려와 상봉을. 그 시간만큼은 눈 딱 감고서 (아니, 내내 걸리는 마음으로) 시간을 빼기로. 제주에 왔다지만 아빠는 여유가 없고, 엄마와 아기는 아직 조심할 때여서 어디 먼 곳을 다니지는 못하고, 가까이 바람을 쏘이다 들어오곤 했다. 그래도 하루는 대정에 있는 송악산을 올라. 아주 조금 가파른 길이 있기는 했지만, 그리 어려운 걸음은 아니었고, 무엇보다 고갯마루를 오를 때마다 넋을 빼앗는 풍경이 펼쳐지니 달래와 감자가 힘을 낼 수 있었는지 모르겠다. 안으로는 삼방산과 용머리 해안을 건너다 보게 하고, 밖으로는 가파도와 마라도가 발 밑으로 보이던 정상의 분화구. 감자야, 바다 좀 봐. 감자야, 이게 바다야, 저기가 가파도, 저기가 마라도. 

 또 하루는 들이 엄마가 일러준 길을 따라 애월 한담부터 곽지까지 이르는 해안 산책로. 거기야말로 달래, 감자와 함께 걷기에는 딱이었다. 집에서 차를 타고 나가기에도 아주 잠깐인데다, 오르막이라고는 없이 용암 바위의 해안을 따라 구불구불 이어지는 아름다운 바닷길. 이 날은 부러 병수 아저씨의 시 솟대를 손에 들고 나섰다. 아저씨에게 솟대 선물을 받으면서, 제주 곳곳을 다닐 때면 아름다운 풍경 앞에 높고 사진을 찍어 아저씨에게 보내주어야지 마음 먹었건만, 여태 한 번도 그러지를 못하다가, 이번 참에 들고 나섰다. 시 솟대가 놓인 풍경은 그 자체로 시가 되어주었고, 시 솟대 곁에 있는 이라면 누구나 시인. 시가 되는 풍경, 시가 되는 장면.

 그렇게 시처럼 짧지만 길었던 봄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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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냉이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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