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한 박스
씨발, 뭉클
또 한 박스가 왔다. 이번엔 새엄마. 십년 넘게 혼자 살고 있지만 그 동안은 늘 아니요, 됐어요, 잘 해먹고 지내요, 하기만 했지만 작년올 들어서는 그저 고맙게 받아먹어. 엄마들도 아니, 됐어 할 때보다 반찬 다 떨어졌어, 그 때 그거 맛있던데 것 좀 보내줘요, 할 때를 더 좋아하시는 것 같다. 엄마가 전화를 걸어, 반찬 다 떨어질 때 됐지? 물었다. 아냐, 됐어. 이번엔 아빠가 보낸대. 아빠가 물어볼 때마다 맨날 아직 반찬 많다고, 꽉 찼다고 그러니까 서운해하고 그런가봐. 엄마가 보내는 것만 받는다, 그런 기분이 드는 것 같아. 이번엔 아빠네가 보내주는 거 먹을게. 아마 엄마가 보내는 게 삼이면 아빠가 보내는 게 일. 네, 안 그래도 반찬이 다 떨어져가요, 보내주세요, 했더니 아빠랑 새엄마는 시장에 나가 장을 보다가 전화를 주시고, 택배를 싸다가 전화를 주시고, 오늘은 도서관에 가지 말고 기다렸다 받으라 전화를 주었다. 아빠는, 그리고 새엄마는 나 반찬 싸보내는 게 좋은가 보다. 씨발, 뭉클.
엄마맛, 새엄마맛
근데요, 반찬 담을 때 그냥 비닐 같은 데다 담아보내세요. 반찬 올 때마다 플라스틱 반찬통이 자꾸 쌓여서 그것 갖다 집도 짓겠네. 보낼 때마다 그런 거 다 사고 그러는 거 아녜요? 지퍼백 봉다리봉다리 반찬들을 꺼내어 통에 담아 냉장고에 넣으며, 그래도 김치는 어쩔 수 없는지 커다란 통에 담긴 것 작은 통으로 나눠담아 넣으며, 아 요것 참 맛있겠다, 하날 집어먹었더니 정말 맛있네? 으잉, 이게 뭐지? 열무이파리 같이 생겼기는 한데 그건 또 아닌 것 같고, 파도 아니고, 갓도 아니고, 요거이 뭔데 이리 시원하고 맛있다냐. 잘 받았다고 전화를 드리다가 근데 그건 뭐예요? 열무 이파리 같은 거요, 난 처음 먹어보는 거 같은데……. 으응, 그게 하루나라는 건데. 봄에만 무쳐먹는, 유채 싹으로 담가먹는……. 어머나, 유채 이파리로도 김치를 담그는구나. 어쩐지 처음 먹는 맛이다 했더니 내 입맛도 아주 후지지는 않구나. 또 한 통을 열어보니 네 갈래로 팔다리 가지런히 모으고 있는 오이소박이들이 열지어 있다. 고것도 하나 아삭. 엄마 반찬에는 엄마맛이 있고, 새엄마 반찬에는 새엄마맛이 있다.냉장고가 다시 아래위로 꽉 차니 든든타.
대략난감
그런데 한 가지 대략난감인 것. 냉장고 윗칸 냉동실로는 다시누렁이와 꿀꿀이, 꼬꼬와 물고기가 가득차버렸어. 안 그래도 엊그제 전화통화를 하면서, 그런데요, 고기 같은 건 말고 그냥 밑반찬들로만 보내주세요,하는 말을 해볼까 어쩔까 하기는 했는데, 그냥 말았더니 역시나가 되고 말아. 엄마들한테는, 아빠한테는 그 말은 못하겠더라. 엄마는 몰라도 아빠한테는 더더구나. 일년 가야 두어 번 볼까말까, 그럴 때마다 밥 두그릇 먹는 거 보시는 걸 가장 큰 행복처럼 여기는 아빠한테, 집에 갈 때면 왜 이렇게 말랐니, 고기 좀 먹어, 더 좀 먹어, 하는 말에 당신의 모든 사랑을 담는 분에게, 고기 어쩌고 하는 말은 도무지 못하겠는 거야. 갈수록 엄마한테 가는 일도 뜸해지고 있는데, 그 말은 엄마한테도 역시.
패쓰 & 배탈
고기를 그만하겠다 할 때정작 어려운 건언제나 그 입맛을 버리지 못해서라기보단 그 때문에 발생하는 관계의 불편함이랄까, 심적, 물리적 어떤 제약들 때문일 때가 많았다. 사람 만나 하는 일의 구할은 아마도 뭔가를 놓고 먹는 일, 그게 다라 해도 틀리지 않다 할 수 있을 텐데 일단 메뉴가 탁 걸려버리잖아. 반도 아니고 반에반에반에 반 정도로 어느만큼은 성가셔져버릴 밖에. 맨날 어딘가를 나가고, 하루 한 끼 이상은 다른 사람들과 어울려 밥을 먹어야 하는 이들에게는 그 자체로도 엄청난 스트레스가 될 거. 그러나 나야 뭐 일주일에 스무 끼는 혼자 밥을 먹다시피, 술자리 같은 거야 아예 없으니 그런 걸로야 어려울 것이 없다. 괜히 나때문에 어쩐다 싶어 미안하게 되는 일이건, 아님 별나게 군다는 눈총받는 것 같아 불편할 일이건. 그러나 한 가지,선을열어두었던 게 엄마아빠한테는 굳이 그러지 말자, 생각했던 거. 그래봐야 일년에 몇 번 명절이나 무슨 날이고, 어쩌다 이렇게김치 싸보낼 때 조금 넣어보내는 정도일 텐데, 그걸로까지 굳이 괜히 신경쓰게 하는 일하나 더 얹어드리지 말자하는 거. 고기 먹는 것 자체를 죄악이라 생각해서는 아니니. 그 옛날이 땅의 백성들이 명절이나 어른 생일날 이밥에 고깃국 먹듯이, 그런 거라 생각하고 엄마아빠한테만은 패쓰, 를 하려고 그랬더니아이고, 그런데 이번 판엔 너무 많이 왔다.아빠랑 새엄마로서는 꽤나 오랜만에 반찬보낼 수 있는 기회가 왔다 싶어 부러 더신경을 쓰신 걸 거. 아무래도 엄마한테라도 말을 해야겠다. 엄마, 나 고기 먹으니까 배탈이 자꾸 나네.오다가 상하나봐, 여기서 사먹을 테니까 고기는 보내지마.
진짜난감
그런데 이건 또 어떻게 하나. 집에서 부쳐주는 거 받아다 먹는 애들은 다 똑같지 않나? 쌓여가는 스티로폼 박스, 그리고 그 안에 들어 있는아이쓰팩. 아오, 저얼음주머니모아놓은 거다 꽝꽝 얼리면 이글루라도 하나 짓겄네. 집에선 이런 것도 다 사서 보내는 건가? 한 번 서울갈 때 차를 가져가면 다 싣고 가야지 했는데 일년 내내 세워두기만 하고 보험료만 무는 그건 언제 끌게 될지를 몰라. 근데 다른 애들, 자취하는 다른 애들은 다 어떻게 하나? 저거 일부러 살래도 오륙천 원은 하는 것 같던데, 저걸 그냥 버리나, 어쩌나. 저걸로 화분삼아 채소같은 거 키우기도 하고 그러는 것 같기는 한데. 암튼, 진짜 난감한 건 바로 쟤들.
내가 되었으면 / 노 리플라이
하여간, 됐고! 이제 밥차려야지. 유채이파리랑 오이소박이. 침 한 모금이 꿀꺽.그러고보니 점심도 아직.아, 신난다. 밥먹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