냉이로그

꽃들

냉이로그 2011. 4. 16. 23:45

미진이

죽변살 적에 만났던 아이들. 첫만남은, 그러니까 그게 벌써 육칠 년도 더 전인가 보다. 울진읍, 고 조고만 읍내 군청 앞에서 거의 날마다 종이학을 접고 서명지를 들고 서던 때가 있었다. 그 때 날마다 함께 나와 종이학을 같이 접고, 피켓을 나란히 들고 서던 아이들이 있었어. 그 때가 얘들 중3이었지 아마. 그렇게 알게 된 녀석들, 아마 고 녀석들이 고3으로 올라갈 무렵나는 목수학교에 들어가면서, 거의 그렇게 울진을 뜨게 되었을 텐데, 그러고 난 뒤로야 뭐 연락이고 뭐고 할 것도 없었다. 그래도 고 녀석들은 나도 잊고 지나던 생일을 기억해 죽변 집까지 쳐들어오기도 하고, 목수학교엘 입학할 거라고, 이젠 한동안 못 볼 거니 밥이나 먹자 하니 어느 새 철물점으로 달려가 망치에 끌, 줄자 따위를 사다 리본까지 묶어 선물로 건네주곤 하였는데.

고 가운데 한 녀석과 지난겨울부터 연락이 다시 되었다.내 기억엔 여전히 중3 꼬맹이들이었는데, 아니, 니가 벌써 4학년이라고? 그럼 너도 머리 파마도 해보고, 화장 같은 것도 하고, 어쩌다 술 먹어 전봇대 붙잡고 우엑웩 토도 하고 그런 것도 다 해봤겠네? 올 해는 휴학을 했다던가, 제대로 공부를 하고 싶어요, 라고 말을 했다. 진보정치연구회인가, 하는 동아리엘 들어갔다는말을 한 것도 같고,겨울엔 일을 하러다닌다는 말을 들었던 것도 같다.그러면서보내온 메일 어느 표현에는 노동계급성을 배우고 싶어요, 라는 말이 있기도 하여조금은 당황스럽게 하기도 했다. 고백같은 아이의 말들에 이러구저러구 나름 자상하게 무슨 말이건 해줄 수도 있었겠지만, 굳이 그런 말들에 대응이 될만한 얘기같은 건 삼가하기만 했다. 힘들어요, 라고 말을 건넬 때에도 섣부른 위로나 격려 따위의 말 같은 건 그냥 저버려두었다. 내내 나는 사오정처럼 못알아들은 시늉만을 하면서 이야, 돈벌면 아저씨 맛있는 거 사줘야겠네, 이거 언제 뜯어먹으러 가야 하나, 하면서 눙이나 쳐댔다. 아이는 중3교복을 입고 알게 되던 때부터 늘 감동이었고, 아이가 쓰는 글, 편지들은 신기할 정도로마음을 울리는데가 있었다. 진보정치연구회에 들어가 이것저것 많이 배우고 싶다는, 제 몸으로 일을 하며 노동계급성이라는 걸 배우고 싶다는, 그런 말들이, 솔직히 나로서는, 기특하다거나 그렇다기보다는 안쓰러운 마음이 더 컸던 것이다. 너는 그렇게 저를 둘러싼 알의 껍질을 깨고 나오려 하고 있구나, 몸살 같은 어떤 것, 성장통에 가까운 그것. 아파야만 지날 수 있는 것, 아프지 않고서는 건널 수 없는 것, 누가 대신 해줄 수도 없고, 그 길이 아니라 이 길이야 라고 말을 해줄 수도, 해준다 해도 들릴 수가 없는 그런 것.

- 이렇게 좋은 봄날, 아저씬 뭐해요?

- 공부도 안되면서 도서관에만 하루종일, 바깥에만 내다보네. ㅠㅠ아가씬 뭐하시나요?

그렇게 문자를 주고받다 통화를 하게 되었는데 춘천엘 갔다 원주로 돌아가고 있는 길이란다. 이번 지방선거에서 선거 운동원을 하기로 했다나. 얌마, 그럼 너 아저씨한테 잘보여야 되는데. 아저씨가 뭔데요? 뭐긴 뭐야, 임마. 나도 강원도 선거에 한 표가 있는데. 너 하는 거 봐서 엄머시긴지 하는 그쪽 찍어버린다. 아, 안 돼요, 이번에는절대로OOO이되는 걸 막아서…. 구구절절이 옳은 소리만을 하는 아이에게 나는 잇달아 딴청을 피우면서, 그럼 출근길에 줄 서서 하얀장갑 끼고 춤도 추고 그러는 거야? 로고송은 뭘로 했어? 아이유 노래로 하자 그러지…. 어쨌건 아이가 내내 밝게 말을 하니 반갑고 좋았다.그 선거판을 지나고 어쩌면 너는 또 더 많은 것에 좌절하게도 되겠지. 이기면 이기는대로, 지면 또 지는대로. 다시 또 절망하기도 할 테고, 허망한 것들은 부정한 것들만이 아님을 알게 되기도 하겠지.

얼마나 컸나 궁금하다 했더니"아저씨, 저 이만큼이나 자랐어요!"라고 문자를 찍어 보내온 사진.

윤정이

그 때 윤정인 더 어린 꼬맹이, 초등학교 4학년 아이였다. 그 때 그 반 담임을 맡던 달래네 반 교실에서 만나게 되었던. 살람 아저씨랑 같이 그 교실을 찾기도 했고, 그 교실 아이들과 별음자리표 음반 녹음을 함께 하러 들르기도 했을 거다. 그 교실에 있던 꼬맹이 중 하나가 이 아이인데, 맨날 야구모자 같은 거를 푹 눌러써서 얼굴도 잘 보여주질 않고, 다정히 얘기라도 나누고 싶어 말을 건네면 기어드는 목소리로 수줍어하기만 해서, 낯선 어른이 말 거는 거 싫어 그런가 보다 싶기도 했다. 그런데 요 녀석, 얼굴 보고 있을 때는 건네는 말에 대답도 그리 않기만 하더니, 편지를 자주 보내오곤 했더랬다. 그런데 더 놀라운 건 편지의 횟수가 아니라 그렇게 글로 쓸 때는 얼굴을 싹 바꾸어 재잘거리기를 좋아해. 아저씨, 아저씨 해싸면서, 냉이 아저씨 어쩌구. 더러 아이들 글을 읽곤 하기에 고 또래 아이들이 쓰는 글이 어떠한지를 대충은 알 텐데, 요 녀석에게는 남다른 신비한 매력이 있었다. 엄마가 아마 울진 시장에서 생선 장사를 했더랬지, 엄마 가게에 일 도와주러 갔다 왔다는 얘기며, 학교에서 있었던 얘기며, 아까 낮에 일인시위하는 곳에 찾아갔다 길 건너편에서 보고왔다며 쓰는 얘기며, 그러한 이야기들을 꾸밈도 숨김도 없이, 전혀 어른을 흉내내지 않은 목소리로 건네곤 했던 것이었다. 아저씨에게 선물을 보내고 싶어요, 제가 용돈 모아서 산 거예요, 요즘 아이들은 선물이라는 것도 "엄마, 선물살 돈 좀 줘." 해서 하는 줄만 알았더니, 그렇게 모았다는 돈으로 목도리를 상자에 담아 보내오기도 해. 고 말 수 적은 꼬맹이 아가씨가.

그러던 고 꼬맹이 아가씨에게도 지난겨울부터다시 메일이 오기 시작했다.고등학교에 입학할 날을 기다리고 있다며.그 가운데 몇 개.

저를 기억하실까요?

혼자 거실에서 빨래를 개다가 문득 현선 선생님이 생각났고 또 아저씨가 생각났어요.

시간이 정말 많이 흘렀어요.

아까 바끼통 카페에 들어가서 아저씨가여전히 열심히 활동하고 계신 것 보고놀랐어요.

그에 비해 저는.....참 부끄럽기도 했답니다.

살람 아저씨도 생각이 나네요..앗살람 알라이쿰?..노래도 기억이 나고...

저는 11살 때 아저씨를 만나고 이라크를 위해 기도했던 생각들을 하면 마음이따뜻해져요.

비록 지금은 시간이 흘러서 제겐 빛바랜 것들이 많지만 그때는 참 순수했는데.

아, 아저씨가 선물해주신 황소아저씨 동화책이 옆에 있어요.

아저씨가 이 동화책을 주시면서 '난 이 황소아저씨가 정말 좋아' 하시던 게 기억나요.

아저씨는 정말 순수하고 따뜻한 분이셨어요. 물론 지금도 그러실거라 생각해요!

요즘도 글을 쓰시나요? 저한테 아저씨 책은 두권 있답니다. 문제아랑 어린이와 평화.

아저씨 책들을 다시 읽어봐야겠어요.

아저씨는 어떻게 지내시나요?

저는 이제 곧 고등학생이에요. 가까운 울진고등학교로 가구요!

아저씨는 울진에 계신가요? 어디에서 무엇을 하며 지내실까요?

저는 예전 집에서는 이사를 해서 울진중학교 바로 옆에서 살고 있어요. (2010. 12. 31)

오늘 과외를 가려다가 무심코 우편함을 보았는데 소포가 와있더라구요.

그래서 뭐지 하고 보았더니 '박기범 아저씨가' 라는 아이같은 글씨가!

흑흑�ㄱ 아저씨 저는 감동을 먹었답니다.

얼른 보고싶은 마음에 걸어가면서 뜯어서 편지도 읽었어요.

정말 감사해요.

동화같이 좋은 느낌의 달력도 감사하고 삐뚤삐둘 아이같은 글씨로 적어주신 편지도 감사해요.

저도 조만간 답 소포를 보내드릴거랍니다.(봉투에 적혀있는 아저씨 주소로 보내면 되죠?) (2011. 1. 11)

저는 드디어 고등학생이 되었어요!

아직 실감이 잘 안나서 그냥 체험캠핑 가는 기분이랍니다.(밤까지 학교에 있으니까요. 크크)

아침 7시 45분까지 등교해야 해서 아침에는 정말 바빠요.

밥 먹을 시간이 부족한데 일찍 일어나는 것도 쉽지 않고.

저녁 6시까지 수업을 하고 밥 먹고 7시부터 3시간 동안 자습을 해요.

아직 어떻게 공부할 지를 잘 모르겠어서 거의 반은 놀고 반은 공부하고 그런답니다.

새로 사귄 친구도 있고 알게 된 친구들도 있어요.

고등학교에 가보니까 현실이 이런거구나 하면서 더 느끼게 되었어요.

정말 열심히 하지 않으면 안되는 구나 라는 생각이 들게 된답니다.

저는 문예동아리에 들었어요. 글짓기랑 문학을 다루는 동아리요.

고등학교에 올라와서 더 많은 경험을 하게 될것 같아서 기대되고 기뻐요.

그런데 또 한편으로는 조금 슬프기도 하고 허탈하기도 해요.

아침에 눈 뜨고 후다닥 학교 가서, 학교 마치고 후다닥 집에 오면 눈 감고 잘 일만 남았으니까요.

하루가 어떻게 가는지도 모를만큼 빠르게 지나간답니다. (2011. 3. 8)

신기한 일이다. 그 몇 년 동안 아마 나는 이 아이들을 거의 떠올릴 일 없이 지냈다 해도 좋을 텐데, 이렇게 훌쩍 큰 모습으로 다시 연락을 해오고, 시간을 건너뛰기라도 한 것처럼 다시 친구가 되고 있다니.이 애들과 내가 무슨 교사와 제자 같은 관계였다면 또 모르겠지만, 나는 그저 오다가다 만난옆 마을아저씨이기만 했을 뿐인데. 게다가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둘이 비슷한 때에 다시 연락을해오기 시작한 것도 참 신기하지.

요 깜찍한 여고생이 된 윤정이는 메일을 보낼 때마다 눈사람이며 솔방울 같은 사진들을 하나씩 담아보내더니 오늘 열어본 메일에는 며칠 전 제주로 수학여행을 다녀왔다며 거기에서 찍어온 꽃사진들을 잔뜩 담아주었다. 요 꽃은뜯은 게 아니고 떨어진 걸 주운 거라나. 꽃도 예쁘지만, 그걸 받쳐들고 있는 네 손바닥이 더 예쁘다, 욘석아.

오늘도 이렇게 두 녀석의 연락을 한꺼번에 받는 큰 선물을 받았다. 오늘은 정말 날이 너무 좋아, 꽃들이 너무 좋아 도서관에 쳐박혀있기가 괴로웠더랬는데, 너희가 이렇게나 고마운 꽃이었구나,꽃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