냉이로그

[가의도에서 0118] 서러운 바위 절벽

냉이로그 2008. 1. 19. 14:13

[가의도에서 0118] 서러운 바위 절벽

새로 만난 청년들

오늘은 섬에 계신 주민 분들이 모두 군민 궐기대회 차 육지로 나오신다 했으니 들어가면서 뭔가 점심거리라도 챙겨야 할 것 같았다. 그런데 여기 신진항에는 어디 김밥이라도 파는 데가 없네, 저 쪽 끝에 편의점을 본 것 같아 삼각김밥이라도 살 수 있는지 그리로 나가보았다. 어, 그 앞에 하얀 방제복을 입고 있는 청년 둘이 있어. 반가워라! 일단 간단한 끼니라도 마련하려 편의점 문부터 밀고 들어가려는데 문이 닫혀 있어. 어, 이를 어째! 청년들 하는 말이 아주머니가 조금 전 문을 닫고 나가 아홉 시 경에나 들어온다는 거였다. 이런, 배는 여덟 시 반에나 나가는 걸. 어쨌든 그렇게 청년들과 말을 트면서 오늘 일을 같이 하자 했다. 청년들은 오늘 배가 뜨는지도 잘 모른 채, 여객선 선착장이 아닌 유람선 선착장에서 배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니, 저리로 가요, 저 쪽으로 가면 배가 있고, 아, 내가 어제 면에서 무임승선표 얻어온 게 있으니 여기에 동생들 이름이랑 주민번호 같은 것도 어서 써요. 안 그러면 배삯을 내야 할 거야, 아마 오늘은 우리 셋이 전부일 것 같으니 같이 다니면서 일을 해요, 배에 내려서도 일할 곳을 찾자면 한참을 걸어 들어가야 하니까…….급한대로 빵이나 몇 봉지 사 들고 배에 올랐다. 배에는 우리 셋 말고도여행 짐을 든 어느 식구가 더 있었고, 우체부 아저씨가 더 있었다.

잘다녀오세요!

섬에 닿아 배에서 내리려는데 선착장에 마을 어르신들이 꽤난 많이 나와 계셨다.궐기대회하러 가려면 우리가 타고 들어간배를타고 나가야 하셔. 층계를 올라 섬으로 오르는데 여기저기에서 어제 하루 낯을 익힌 어른들이 어, 그려, 또 왔그먼, 우린 시방 데모허러 나가는 길인디, 오널도 날이 춰서 워쩐댜…… 네에, 할아버지 잘 다녀오세요, 할아버지도 날 추운데 데모하려면 고생이겠어요, 잘 하세요, 으응, 내일이랑 모레까지 또 들어올 거예요……. 섬 어른들의 절망어린 눈물과 한숨을 가득 싣고 배는 육지로 떠났다. 정말 섬에는 이제 아무도 없는 것 같아. 그래도 다행이지 뭐야, 함께 언 손에 입 바람을 불어가며 일을 할 동생들이라도 만났으니……. 그리고 또 혹시 싶어 배에서 같이 내린 어느 식구에게도 여쭤보았다. 저기…… 방제 일 하러 오신 거예요? 그런 거면 저희하고 같이 다니시면 좋겠는데……. 근데 잘은 모르겠어. 아저씨 하시는 말이 그냥 여기 댕기러 오는 길인데 방제 일도 조금 허구…… 말끝을 흐리시니 잘 몰라 더 붙잡고 묻지는 못했다. 아님, 섬에 아는 분이 있어 다녀가시는가 싶기도 했고.

어제, 거기

언덕을 하나 넘고 또 하나 언덕을 넘어 길을 걷는데 섬에는 까만 염소들 뿐이다. 아, 아니 허리 굽은 할머니 몇 분이 보이기도 해. 마을 분들이 다 나가신다 해도 그래도 너무 힘든 분들은 계시는가 봐. 아까 배가 들고 나던 길 엇갈리면서 주민 분들께 다시 한 번 제곤이 형네 집이 어디냐고, 무슨 빛깔 지붕에 대문인지를 여쭸더니 할 할머니 말씀이 "어, 제곤네, 저그 언덕 너머 두 번째 집이여, 팽나무가 있잉께 그 집 찾아가면 될 거여……." 어허, 참. 팽나무가 어떻게 생겼는지를 내가 알아야 말이지. 하여간 가는 길에 다시 묻다 보면 찾을 수는 있겠지. 아, 아까 육지로 나가던 어르신들 가운데 형네 부모님도 계셨을지 몰라. 어쨌든 뭐……. 제곤 형은 모임 까페에서 '팽나무열매'라는 별명을 쓰고 있다, 아, 그래서 팽나무열매구나, 그 그늘에서 보낸 어린 시절……. 언덕 둘을 넘으며 어제 일하던 자갈 바닷가로 내려갔다. 제일 반가운 것이 어제 내놓고 있던 뜨거운 물통이랑 컵라면 상자 따위가 그대로 있어. 휴우, 하마트면 하루종일 빵 한 봉지로 때울 뻔 했네, 그래도 라면 국물이라도 먹을 수 있겠어. 어제 마을 어르신이 가르쳐 준대로 물끓이는 통에 스위치를 올려 커피들을 한 잔씩 했다. 함께 간 청년들 인상이 참 좋아,

더 추워

어제보다 더 추워, 바람이 얼마나 부는지 바람을 대고 서는 것조차 힘들어. 다들 바람을 등지고 아무 곳이나 앉아 기름덩어리가 끝적하게 붙은 자갈을 닦기 시작했다. 날이 차니 기름덩어리들은 더 굳게 응고가 되어 있어 잘 닦이지가 않아, 아, 날이 얼마나 추웠냐 하면 컵라면 옆에 있던 생수병의 물들이 다 땡땡히 얼어 있는 정도였거든. 장화를 신으려 해도 이게 구겨진 채로 얼어 발이 제대로 들어가지가 않아, 접혀 있던 자리 발목아지는 한동안 얼마나 배기고 아팠나 몰랐으니까. 하루종일을 앉아 일했어도 역시 앉은 자리에서 한 발작도 떼지를 못했다. 자갈 하나 들어내 닦으면 그 아래로 계속 시커먼 덩어리들이 나와, 그것을 닦아 들어내면 그 밑으로 또 시커먼 덩어리가……. 손은 얼어 곱아들지, 발은 시렵지(아, 어제 다짐대로 양말 두 짝을 겹쳐 신언는데도 하나 소용이 없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부터 물코는 질질 흘러내리지, 추워 몸을 웅크리느라 어깨 근육이 아파. 춥다, 춥다, 으으으으 춥다 소리가 절로 나와 아무 생각 없이 그 말만 내뱉으면서 자갈 돌을 닦았다. 자리가 불편해도 돌아앉지는 못해, 바람을 마주해서는 잠깐도 견딜 수 없을 것 같으니.

어제 그 여학생들과 배에서 만난 식구도

커피 물을 데우다 보니 저 위 언덕에서 방제복을 입은 분들 둘이 내려오고 있었다. 어쩐 일이지? 배를 함께 탄 사람들은 아닌 것 같은데, 혹 여기 마을 아주머니들인가? (아, 방제복을 입고 모자를 뒤집어 쓰면 멀리 봐서는 아주머니인지, 학생인지 구분이 되지 않거든. 그저 남자이거나 여자라는 것 정도만 가려볼 수가 있지.) 가까이 내려와 웃으며 인사를 하는데 어제 만나 같이 일을 하던 학생들이다. 그 학생들은 오늘 올라갈 거라면서 어제 신진항으로 나오려다가 하룻 밤을 신세 진 마을 분 댁에서 하루를 더 자고 아침 배로 나갈 거라 했는데, 나가지를 않고 오늘 하루 더 일을 하기로 했다는 것이다. 또 반가운 마음. 이 여학생들도 참으로 인상이 좋지. 그렇게 다섯이 일을 하고 있는데 자갈을 닦다 허리를 펴며 일어나 보니까 몇 사람이 더 있네. 바람에, 추위에 눈 앞 자갈 닦는 데에만 정신이 팔려 누가 오가는지조차 몰랐던 게지. 아아, 아까 배에서 만난 그 식구 분들. 아들인 청년은 군 복무 중인 하사라 했고, 그 부모님과 함께였어. 잠깐 쉬면서 아저씨가 꺼내어 주는 소주를 한 잔씩 받아먹으며 얘기를 들으니 아주머니 친정이 여기라 하시네. 군인인 아들은 어렸을 적 늘 이곳 외갓집에 와서 놀며 자랐다 했는데 이렇게 되어 있는 바다를 보며 가슴이 아프다 해. 그렇게 모두 여덟이 되었다. 그 여덟이 섬의 자갈밭에 쪼그려 앉아 검은 덩어리들을 닦아내었다.

북항, 자갈을 삶아내는 통

배 시간을 조금 남기고 일어서면서 섬의 다른 곳들을 돌아보려 나섰다. 어르신들 말씀으로 아직 손이 전혀 닿지 못한 곳들도 많다고, 절벽 너머로 가면 더 심한 곳들이 있다 하던데 그곳들은 어떠한지를 둘러보고 싶었다. 먼저, 북항이라는 곳. 우리가 배를 타고 내리는 곳이 남항이면 북항이라는 곳이 따로 있다던데 거기는 여학생들이 알고 있대. 아아, 이장님 댁 가는 길로 내려간 곳, 거기가 북항이구나. 내려가 보니 여기에는 불을 지피는 가스 시설이 되어 있는 커다란 드럼통 같은 것들이 놓여 있어. 그리고 그 곁으로는 시커먼 자갈들이 쌓여 있고, 아마도 그 자갈들을 퍼올렸을 포크레인도 있어. 그래, 맞아.용역업체들에서는 이 작업을 한다 했다. 자갈들을 포크레인으로 퍼내 드럼통에 가득 담고, 물을 부어뜨겁게 삶으면 자갈에 붙은 기름덩어리들이 위로떠오른다고.자갈은 거의 말끔히 씻어지고, 그 위로 떠오르는 기름들만 떠내면 된다 했어. 그 곁에서 삶은 자갈에도 혹 남아 있는 기름이 있으면 그걸 걸레로 닦아낸다 했지. 어제 자갈을 닦고 있을 때도 한 어르신이 나와 이 말을 했다. 이거 손으로 할 일이 아니여, 파고 들어가면 계속 나오는 걸, 워치케 손이루 이걸 다 닦아낸댜, 여그두 포크레인으로다가니 다 퍼내고 드럼통에 삶아야 혀, 사람들 수천 명이 와 들러붙는다 혀도 이걸 다 닦지는 뭇혀……. 하지만 북항에도 어제오늘은 용역 업체의 작업이 멈춰 있는 상태, 어제는 날이 춥다고, 오늘은 주민들이 육지에 다 나가느라.

자갈 삶는 작업장 쪽 말고 북항 선착장 너머로 가 보니 바위 절벽들은 아주 시커먼 채 그대로다. 어디 발 딛을 곳조차 없으니 저기는 어떻게 달라붙어 닦아야 하나. 자갈이야 드럼통에 퍼 놓고 삶는다지만 바위들과 섬의 절벽들은 그걸 깨부숴 삶을 수도 없는 걸. 찰랑거리는 바다에 우뚝 선 절벽과 바위들은 그렇게 시커먼 것을 뒤집어 쓴 채 서러운 모양으로 서 있었다.

한 아주머니 댁

북항에서 올라와 또 다른 절벽 쪽을 가려다 어느 아주머니 한 분이 들어오라 손짓을 하셔. 오늘두 기름 닦는 거 했느냐고, 아이고, 허는 줄 알았으면 내다 보기라두 헐 틴디, 몰렀다고, 다덜 육지로 나가느라 오늘까징 일을 뭇허는 줄만 알았다며 말이다. 한 댁에 한 분 이상이 나가기로 해서 아저씨만 나가고, 아주머니는 뭘 캐느라 산에 다녀왔다는 것이다. 아주머니 댁 부엌에 앉아 끓여내주는 커피를 마시면서 이 얘기, 저 얘기. 속상하시지요? 그럼유, 속상한 거야 말루 뭇허쥬, 우덜이야 바다만 바라보고 살아온이들인데 바다가 저릏게 되얐으니 앞으루는뭘 해 먹는대유, 거그다가 여기는 죄늙은이들 뿐이지, 우리는 바닷일 말고는 어디 나가서 딴 일두 뭇해유, 여그 있는 할머니들은 거진 다 한글도 읽을 줄 모르그든유, 육지 나가면 버스 혼자 탈 수 있는 이가 을매 없시유, 아저씨들도 한글 모르는 이가 많그유.언제 하루는 한 아주머니가 그려유,우리 섬에서 노래자랑 있느냐그유, 배 들어오는 디서부터 섬 여그저그에 현수막이펄렁거리니까 그게 노래자랑 하느라 그런 거 아니냐면서 말이쥬……. 하여간 바다가 저릏게 되고 우덜은 먹고 살 일이 망망해유. 그 전에는덤치 캐고 굴 따고 해서 잘 살았그든유. 사리 때 나가면 하루 한 앞에 삼사십만 원 어치는 캐가꼬 들어왔시유, 그게 그르니께 매일은 뭇허구 보름 사리 때 한 엿새허구 그믐 사리 때 엿새 정도, 그릏게 열이틀은맨손으루 나가 하루 삼사십만 원씩 캐갖구 들으오곤 혔는디, 이제 덤치구 굴이구 암 것도 할 수가 웂잖아유……. 덤치가 뭔 말인지 몰라 여쭸더니 섬에서는 홍합을 그리말한다고 했다. 아주머니는금방이라도 눈물을 보일 것 같았다. 아주머니, 따뜻한 거 잘 마셨어요, 저희가 큰 힘은 못되어 죄송해요, 내일 다시 들어오면 인사드릴게요…….(아, 그 아주머니 댁을 나오면서 다시 한번 제곤이 형네집을 물었더니 손짓으로 가르쳐 주셔, 저그 저기 초록색 지붕 있는 디가 그 집이유, 제곤이는 아주 얌전한 아이였쥬……. 장난스런 마음이 들어 제곤 형 흉 좀 봐 달라고, 나중에 만나 놀려먹을 만한 거 없느냐 했더니 그런 거 아주 없다 하시네, 저기, 뭐야, 오줌 쌌다고 소금 얻으러 오구 그런 적두 없어요? 에이, 없어유.아주 얌전하고 착하기만 했지, 그 분 어른들도 다그르유, 식구가 모두 얌전허구 착혀,제곤네는 오늘 두 내외가 다 육지 나간다고 혔는디,낼이나 오믄 들러봐유…….)

뱃고동 소리

배가 들어왔다. 늘 몇 사람 없이 가볍게 들어왔을 그 배에는 어르신들이 가득했다. 어르신들 말고도 손바닥만한 갑판 위에는 한 짐이 쌓여 있어. 어휴, 저거 날라 드리고 가야겠다, 동생들하고 같이 선착장 층계에 벌려 섰어. 배에서 내리는 어른들도 그 틈으로 서고, 앞뒤로 더 늘어서니 줄잡아 스무 명 정도가 되었다. 쌀 포대만 십 킬로 이십 킬로로 백 포대는 되는 것 같아, 거기에 라면 상자들이 또 그만큼, 그리고 오랜만에 육지에 나갔다가 장을 봐온 아주머니들 장바구니들. 다 옮기고 나니 팔이고 허리고 삐그덕삐그덕 한다. 팔이 올라가지가 않아. 짐을 내리느라 너무 오래 서 있었다며 어서 배에 타라며 맨 밧줄을 풀고 있는데 그 길에서 제곤이 형 아버님을 뵈었다. 아버님이세요? 네, 제곤이 형 동생이에요. 배가 막 멀어져가려 하고 있고, 어른들은 어서 타라구 소리를 지르는데, 네에, 내일 들어와 찾아뵐게요, 겨우 배에 올라 탔다. 부우웅, 뱃고동 소리.군인 식구들은 섬에서 잘 거라 했으니 배에는 우리 다섯에 우체부 아저씨까지 여섯이 전부. 나는 그대로 쓰러져 눈을 붙였는데 신진항에 배가 닿아서야 동생들이 깨워줬다. 그대로 곯아떨어졌어. 하루종일 추워 그렇게 몸을 웅크리고 있던 데다가 막판에 그 짐을 나르느라 아주 뻗어버려, 게다가 어젯 밤에도 세 시간 뿐을 못 자고 나왔는 걸. 형, 진짜 잘 자대요.

불꽃 민박

그리고는 함께 일한 동생들과 같이 저녁을 했다. 여기 섬에서는 이렇게 만나지고, 함께 어울리게 되는 일은 없겠지 싶었는데 이미 오랜 형, 동생, 후배들 같은 느낌이었어. 동생들은 어디 다른 민박 방을 얻어 이틀 값을 냈다 하는데, 하루 방값은 돌려 받고 내 방에 와 같이 지내자 했다. 방이 얼마나 큰지 몰라, 이 방에서 같이 지내자, 야. 여학생들도 그 민박집에 따로 방을 얻어. 그리고는 민박집 옆 고깃집에 가 삼겹살을 굽는데, 민박집 아주머니도 거기에 놀러와 계시네. 아주머니도 여기 앉으세요, 같이 드세요. 어제는 아줌마가 저녁이라도 같이 먹으려 찾았다는 거야, 그런데 어디 갔는지 몰라 못 먹었다면서. 그래, 그렇게 고생하러 와서는 방 값 내고 다니는데 밥이라도 챙겨주고 싶으셨다고. 실은 동생들하고 같이 자는 건 어제그제처럼 나 혼자 이만 원에 방을 얻어 몰래 같이 들어가 자야지 했던 건데, 그냥 아주머니께 털어 놓고 말씀을 드렸다. 흔쾌히 그러시라 하시네. (좀 전에 네이버봉사 까페에 들어가보니몇 사람이내 글을 보고 그곳 숙박은 어떻게 하는지 들을 묻는메일과 쪽지를 보내왔던데,거기, 불꽃 민박이면 좋을 거예요, 추천합니다.)그렇게 둘러 앉아 소주 한 잔, 또 한 잔, 자꾸자꾸 한 잔, 술병이 쌓이고, 고기 불판을 치워 찌개를 올려 놓고, 술병들이 구르고, 어이구 그 상태로 나는 맛이 가 버렸어. 동생들이 어찌나 얘기도 그렇게 재미있게 하는지, 다들 착하고 정다웠다.

못 지킨 약속들

이제는 조금 창피한 얘기, 오늘은 섬에 들어가지 못했다. 새벽부터 얼마나 화장실을 들락거려야 했는지, 정말 지난 밤 술을 무지하게도 많이 먹었어. 밥은 한 끼도 제대로 못 먹은 채 아침은 거르고, 점심은 컵라면, 저녁에 고깃집에 들어서도 동치미만 맛있다고 그것만 들이켰으니 그 빈 속에다 술을 왕창. 어휴, 새벽 내내 토해내느라 얼마나 괴로웁던지. 겨우 알림 시간에 맞춰 일어나 씻고 나오는데 그나마 상태가 괜찮은 동생이 그러네. 형, 그 몸으로 하실 수 있겠어요? 얘(막내)도 허리가 아프다고 못 일어나겠다고 하는데, 오늘 하루는 아무래도 쉬면서 회복을 하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어휴, 속으로 그 말이 얼마나 고마웁던지, 차마 내가 먼저 그러자고는 말하지 못하고 억지로 몸을 일으킨 거였는데, 그저 나는 못이긴 채 그러자고 했다. 오늘은 좀 더 쉬다가 어디 육지 쪽에 일할 것 찾아보자면서.) 어쩌나, 제곤 형 아버님께도 내일 다시 찾아뵙는다고, 커피를 타주던 그 아주머니께도, 나올 때 손을 흔들어주시던 마을 어르신들께도 내일 아침 다시 뵙겠다고 했는데……. 그리고 말이 잘 통하던 그곳에 외가가 있는 군인하고도 오늘은 일하면서 데꼬리 하나 같이 마시자는 약속도. 휴우, 이것 참. 술 좀 작작 마셔야지, 왜 이러니 인간아……. 봉사자들 까페에 들어가보니 받은 쪽지 가운데에는 오늘 아침 배롤 가의도 들어갈 거라는 이들도 몇 있었다. 다행히 오늘은 바람이 그리 세지도, 날이 그리 차지도 않구나. 글을 읽고 연락을 준 이들하고도 만나 같이 일을 했더라면 참 좋았을 텐데, 하여간 술이 웬수다. 뭐, 어쩔 수 없는 일, 내일 들어가 열심히 해야지, 그나마 같이 일하던 동생이 해 주는 말이 위안이 되네. 형, 그 동안 너무 무리했어요, 하루 쯤 쉬고 들어가는 게 일하는 데에도 더 나을 거예요. 인터넷 뉴스를 살피니 어제 집회에서 주민 한 분 몸에 불을 붙였다 하시네, 그런데도 왜네 놈들은 눈 하나 깜짝 않는지, 나쁜 놈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