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0213] 걸어걸어
[서울, 0213] 걸어걸어
어디 그것 뿐이랴
어디 남대문만 잿더미로 내려앉았나, 쩐의 전쟁이 판을 치는, 자본의 세상에서 훈민정음은 너덜너덜 다 구겨져 휴지통에 버려질처지에 놓였고, 이미 삼천리 금수강산은 동강나 파헤쳐져 신음을 앓고 있는 걸.가 본다 해야 무얼 볼 수 있겠냐만 지하철을 타고 남대문으로 나갔다. 남대문이라니, 나서 삼분의 이를 서울서 나 자랐건만 남대문을 보겠다고 길을 나선 건 처음이었다. 그래서인지 왠지 그 길이새삼스럽고 뜬금없어 보여. 그저 남대문 시장이거나 남산, 명동, 서울역을 드나들 때 버스를 타고 앉아 내다 보던 게 다였겠지. 내게는 별스런 의미를 주지 못하던, 오래된 건축물 가운데 하나 정도였을 뿐. 그런데 텔레비전으로 한 순간 내려앉는 그 모습을 보는데 왜 그리도 가슴이 철렁이던지. 자꾸만 되풀이해 보여주는그 모습은마치 구일일로 쌍둥이 빌딩이 폭삭 주저 앉던모습을보던 기억을 떠올리게 했다. 왜지, 왜, 저 장면을 자꾸만 되풀이해 보여주는 걸까, 무언가를 예고라도 하듯이…….철렁, 내려앉는 것 같은 이 느낌은 도대체 뭐란 말이지? 정초부터 도대체 이게 무슨 일인지, 애궂게도 새 정권이 가져올 일들에 어떤 불길한 암시가 되는 건 아닌지 미신스런 생각이 들기도 하다가, 쩐의 시대가 허물어뜨리는 것을 고속촬영으로 압축해 보여주는 거다싶기도 하다가,그에 대해 쏟아내는 말들을 보며순간 짜증이일기도 했다. 대부분의 글들은 마치 이때다 싶기라도 한 듯 명박이를 욕해대고 있으니, 이건 마치 지난 오 년 교통사고만 있어도 무조건 노무현 욕을 해대던 꼴과 무엇이 다른가 하며 말이다. 적어도 나는 한 번도 이 나라 정치, 행정을 맡은 이들에게 문화재 보존에 대해 더 열심히 해 줄 것을 당부한 일도, 그것들에 대해 특별히 애틋한 마음을 가져 보지 못했으니 말이다. 손가락질이야 할 때 하는 것이지, 그래서는 신자유주의와 제대로 싸울 수 없다. 무조건 누군가를 향해 욕해대고 떠든다 하여허망한 가슴이야 어찌 채워질 수 있을까, 그저 잿더미가 된 그 오래된 집 앞에서알 수 없는 미안함에 마음이 불편할 뿐이었다.
흰 옷의 사람들
사람들이 많았고, 사진기가 많았고,피켓도, 꽃들도 많았다.여기저기에는 상복을 입고 다니는 사람들, 어느 자동차에는 방송 장치까지 해 상여를 틀어놓기도 했다. 어제 본 사진에만 해도 문 둘레를 가리는 펜스는 그리 높지 않았는데, 벌써 꼭대기까지 가릴 정도로 허연 판넬과 아시바는 높이 올라가 있었다. 어딜 가면 좀 더 볼 수 있으려나, 돌아보니 십 층 높이 빌딩이 있어 그 끝으로 올라가 봤지만복도에는 내다 볼 만한 창이 없었다.땅 밑으로 내려와 남대문을 한 바퀴 다라 도는데어느 구석 잠깐안전 요원들이 비어 있는 틈으로라도 펜스 안을 잠깐 들여다봤다. 그냥, 뭐 다 폭삭. 더 볼 것도, 볼 수 있는 것도 없으니 멀찍이 물러나 거기 모여드는 사람들 구경이나 했겠지. 그러다간 그냥 저거, 육백 년 전에 저 집을 지을 때는 어떠했을까 하는 망망한 생각만. 금강송을 베어다 다시 복원한다 했던가, 그럼 육백 년 전에도 그 나무들로 지었던 걸까? 울진 소광리의 그 금강송? 아님, 봉화, 삼척의 그 춘양목들? 실어 나를 거라곤 수레 밖에 없었을 텐데 그 나무들은 어떻게 다 지고 올라왔을까, 아님, 서울 가까운 산 어디에서 베어왔을까, '철갑을 두른 듯' 했다던 남산 위의 저 소나무들……? 기둥과 대보부터 해서 부재 하나하나마다 열, 스물 씩 달라 붙어 어깨에 목도채를 걸고 지어 나르던 흰 옷의 목수들 그림이 그려져. 어휴, 얼마나 힘이 들었을지. 엔진톱이니 전기대패니 그런 건 하나도 없었을 텐데, 도끼와 자귀질만으로 그 굶은 나무들을 치고 다듬어 대장간 쇳물을 두드려만든 손공구들만으로 그것 하나하나를 자르고, 깎고, 다듬었을 그 흰 옷의 사람들…….목수 일을 배우는 어설픈 아이 하나 그냥 그렇게공상의 세계로 빠져 들다가.
공구상가
칼바람이 제법 매웠지만 그 길로 해서 걸었다. 실은 오늘 가보려 한 곳은 남대문이 아니라 청계천 공구상가였어. 전에 산 엔진톱 대리점에도 들러 뭣 좀 물을 게 있기도 했고, 전기대패 조깃대를 잘못 만져 각이 살짝 틀어진 것 같았는데 그것도 잡아 달라 해야겠고, 그리고 또 아직 정하지는 못했지만 더있었으면 하는 어떤 공구들도 구경할 겸. 멀다 느껴지기는 하지만 실제 걸어 보면 한 걸음. 역시 시장은 좋아. 퀵 오토바이 아저씨들이 붕붕붕 날고, 밀차에 한 가득 짐을 싣고 아저씨들이 곡예를 하며 운전을 한다. 가게마다 발길이 머무네. 일을 할 때는 아, 저건 정말 쓰임새가 많네, 저거 하나 있으면 좋겠다, 이것도 있으면 뭐에 잘 쓸 수 있을 텐데 하던 게 많았다. 그런데 막상 가게에 들어가 보면,가만 보자, 뭣 부터 봐야 하나, 내 주머니에는 지금 돈이 얼마나 있나……. 그렇게 시장 안에서만 두 시간을 구경하며 다녔나 보다. 메이커를 물어보고, 사양을 물어보는데 그런 거에 아직 제대로 대답을 할 줄을 몰라. 그냥 다 보여주세요, 이건 뭐가 좋아서 더 비싼데요? 그럼 이쪽 거는 힘이 달려 부하가 잘 걸리나요? 그럼 이걸로 몇 미리까지 작업을 할 수 있는데요? 집 짓는 목수들이 많이 사 가는 건 어떤 거예요? 아, 몰라, 몰라, 몰라. 나는 왜 이렇게 뭘 사는 걸 잘 못하는지, 할 줄 아는 거라는 건 술집 들어가 안주 고르는 거 밖에, 빵집에 들어가서도 종류가 많으면 골치가 아파 뭘 골라야 할지를 모르니. 그렇게 물어보기만 하다가 얼굴이 빨개져, 고맙습니다 하고는 나와 다른 가게에 들어가서는 또 똑같은 걸 물어보고 있다. 이거는요, 저쪽 거는요, 또 다른 건 없어요……? 결국은 주머니에 손을 넣어 돈을 만지작거리다가는 그냥 다 돌아나와. 나중에 더 물어보고 나서 사야지, 그냥 눈 딱 감고 다른 사람 쓰는 거 그대로사야지 내가 고르는 건 정말 못하겠다. 전동공구 골목을 지나, 전기재료 골목을 지나, 옷가게 가방가게 늘어선 길을 지나, 지나지나다 보니 완구도매상가들 있는 곳이 보인다. 진우가 엊그제부터 장난감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형이 퇴근 길에 사온다는 걸 이틀 째 못 사왔는데, 그거나 사 들고 가자. 진우가 그렇게도 갖고 싶다던 브루마블(아, 이거 부동산 놀이인데!)이랑 서빈이에게 줄 아기양 인형 한 개. 공구는 하나도 못 샀지만 그거라도 사들고 걸으니 배가 부르다. 아, 좋다. 배 불러.
걸어걸어
그러고도 계속 걸었다. 조금 더 걷다 보니 동대문.동대문은 멀쩡하니? 글쎄, 저것도 요 한동안 천막으로 덮어 놓고 무슨 개보수 공산가 뭔가를 했으니 아마처음 그대로는 아니겠지.동대문아, 너 동무 잃어 슬프겠다. 많이 슬퍼? 어렸을 땐 저녁먹고 골목에 나가 동동동대문을 열어라, 남남남대문을 열어라 하고 놀곤 했는데.그나마 너라도 이렇게 있어 다행이다.고맙고, 미안해. 걸으니까 좋아. 칼바람이 맵고, 손이 시려워, 발이 시려워 했지만 걸으니까 좋았다. 한 며칠을 마시거나 비틀거리거나 뒹굴기만 했으니 몸이 꾸덥다꾸덥다 하고 있었겠지. 자동차 매연이 싫기는 했지만 사람들 구경하는 것도 좋다. 동대문을 지나 이번에는 혜화동 쪽으로. 글쎄, 뭐라도 마땅한 게 있으면 아무 데나 들어가 영화든 연극이든 하나 보고 가는 것도 좋겠다 했는데 확 끌리는 건 없어. 시간도 잘 맞지를 않고, 에이 이거 볼 거면 끌 한 자루 더 살 텐데 하는 계산이 들기도 해. 와아, 술집들은 많기도 하다. 저런 데 들어가 마시면 술맛 좋겠다 하는데만 자꾸 나오니 누구 아는 얼굴 하나 우연히 만나지지 않을까 싶건만그런 행운은 없었다. 쩝. 명륜동 골목으로 들어가 풀무질에 찾아갔다. 작년에 가게를 지하로 옮겼다 얘기는 들었는데 한 번도 가보지를 못했어. 땅 밑으로 내려왔다지만 툭 트인 게 훨씬 좋다. 내려서는 계단부터 해서 책방 아저씨가 여기저기 같이 하는 모임 사람들이 꾸며준 벽걸이며 간판 따위들도 아주 예쁘다. 와아, 아저씨 좋으네요, 하하. 아저씨는 인동초 차를 타 주었고, 후릅후릅 마셨지. 이 얘기 저 얘기에 남대문 얘기가 나오기도 했는데 아저씨 하는 얘기가 책방에 가끔 다녀가는 손님 가운데 한 분이 그런 얘기를 했다지. 거기가 소중한 옛집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사람은 살지 않는 곳 아니냐며 이야기를 꺼내는데 솔직히 거기까지 들을 때는 아니,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어떻게 그리 말을 할까 싶기도 해. 그런데 이어지는 말이, 이 추운 겨울에도 살던 집이 헐려 내쫓긴 사람들이 많을 텐데 그 사람들은 지금 마음이 어떨까 한다며 말이야. 게다가 그걸 새로 짓는다며 몇백 억 얘기가 나오고 있는데 그걸 보는그이들 마음은…….그제서야 속으로 아아, 했다. 못해본 생각이었어. 그래, 아마도 지금 산동네에서, 재개발지에서 집이 헐려 내쫓기는 가난한 백성들은 아마도 육백 년 전에 저 양반들의 대문을 짓느라 목도채를 어깨에 지고 나무를 나르던 흰옷의 백성, 그이들의 자손들일지 몰라. 언제 텔레비전에서 살던 집 때려 붓고, 허물고, 불지르고 하는 모습은 비춰주기라도 했나, 그리고 또 그 아픔에는 얼마나 함께 나누려 해왔는지.
아름다운 비행 / 비행선 (음원은 rock 사랑님 블로그에서)
책방에서 나와 버스를 기다렸다. 버스 노선이 바뀐 줄도 모르고 서지 않는 정거장에서 이십 분을 넘게 떨었다. 에이, 그냥 걸었으면 덜 추웠을 걸. 정거장을 다시 찾아 또 이십 분을 기다렸고, 사람들 꽉 멘 버스를 타고 덜컹덜컹. 집으로 올라오는 골목에서 소주 두 병을 사서 장난감 봉지 안에 담았다. 딩동, 조카 녀석들 우당탕 뛰어내려오더니 손에 든 것부터 내 놓으라고 좋아라 한다. 얌마, 잠깐 기다리라구, 거기엔 내 것도 있어! 저녁 상 앞에서 형이랑 소주를 마셨다. 바깥에서 몸이 얼어 들어오니 밥보다 소주가 급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