냉이로그

유리디스

냉이로그 2008. 10. 14. 15:06

이제는 아침에 일어나 책가방을 챙기고 도시락을 싸면 도서관으로 나가지 않고 샘골 논 농막으로 오른다. 먹통 엉아의 꿈이 서린 곳, 사랑한 그곳. 지난 주말로 벼를 다 베었으니 샘 아래로는 빈논들 뿐이다. 멀리로는 산 고개 사이로 바다가 보인다. 엉아는 석 달 남짓, 참을 수 없는 고통이 올수록 더 이곳 농막에 와 있으려 했지. 발이 조금 시리다 싶으면 난로에 나무를 태우고, 잠이 온다 싶으면 고개를 떨궈 잠을 청하기도 한다. 해가 다 저물기도 전에 전기가 들지 않는 농막은 일찍 어두워지곤 하지. 그 때 쯤이면 김경희 선생님이 퇴근을 하고 하늬네 식구와 하은이가 함께 농막에 올라와. 그리고 그 시간 마을에 있을 식구들, 마리아 선생님과 상근이까지 함께 엉아를 모신 진전사로 올라가 백여덟 번 절을 한다.

농막 안 평상 위로 끝이 헤져가는 교정지 한 뭉치가 있다. 다섯 해 전 글과그림 모임을시작하면서 우리끼리 돌려보는 작고 초라한 잡지를 내면서 거기에 엉아가 연재한 글. 모두 아홉 번에 나누어 연재한 그것을, 솔직히 나는 아직 읽지 못하고 있었다. 고요한 농막 안에서 천천히 곱씹어 가며 그 글을 읽는다. 짧지 않은 그 글에는 작가 아누이에 대한 이야기도 많고, 작품을 들려주며 그 안의 인물들, 혹은 아누이가 이제껏 여러 작품들에서그려온 인물들 - 유리디스, 오르페, 앙띠곤느, 떼레즈 -에 대한 이야기들이대부분이겠만 실상 내가 본 것은 엉아의 모습이었다. 왜 여태 그것을 읽지 않은 채 있었는지, 가슴을 치면서.

언제나 엉아가 끝에 닿았던 말들 -초라함, 진정, 순정, 헐벗음, 반역, 극한의 싸움-을 비로소 한덩어리로 보게 되는 것 같았다.고작해야 내해석과 추정 속에서나 분절된 채로 존재하던 그 낱낱의 말들이 하나를 이루면서 만져질 수 있을 것처럼 구체로 다가왔다. 진작 이랬으면, 이럴 수 있었으면 물어볼 수 있었을 텐데.그게 맞느냐고, 지금 내가 손에 잡아 쥘 수 있을 것 같은 그것이 엉아가 말해온 그것이 맞느냐고….

헐벗음이란 순수를 훼손하는 어떤 것도 다 벗어버리는, 동시에 그것을 감추거나 숨기려는어떤 요식마저도 다 털어버리는 벌거벗은 상태를 뜻하는 것이었을까. 혁명조차도 타협과 속됨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다.그것에는 불가피하게도 전략이나 전술을 짜야 할 거며 그 목적에 다다르기 위해서는 때에 따라옷을 갈아입어야 할 때도 있겠지.그러나 반역이라는 것, 끝끝내 그 어떤 타협도없이 자신을 지켜내는 싸움에 전 존재를 거는 것이다. 깨지고 부서져 한 줌 흙으로 남을지언정 한 치 구부림도 용납치 않는 것.그 끝이 절망이라 할지라도, 삶에조차 반역하는 죽음이 된다 할지라도. 결국 비극일 수 밖에 없는 불가능의 꿈, 절대에 대한 집착. 역설적이게도 그 절망에 대한 꿈은 헐벗은 눈꼽쟁이로 살고 싶다는 바람에 빠져들게 해 주고 있다. 엉아, 맞는 건가요, 엉아가 그토록 지키고자 했던 초라한 진정, 그리고 헐벗은 순정의 싸움이라는 것이, 혁명마저 반역하는 그 극한의 투쟁이라는 것이, 우리 눈꼽쟁이로 살아내자는 거라는 거, 그게 맞는 건가요? 초라하지만 그 끝으로 닿고자 했던 꿈의 시작이 바로 글과그림이었고, 사잇골 모둠살이였던가요?

너덜너덜해진 <유리디스를 읽으며> 교정지를벌써 닷새 째손에서 놓지를 못하고 있다.이러다가 종이 끝이 너무 헤져버리겠어. 이제 그만창이드는 상 위로 올려두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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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리디스를 읽으며>(글과그림 7호~16호, 황시백) 가운데에서.

타고난 페시미스트 아누이가 자신의 희곡집에 붙인 이름 그대로 '검은 희곡'이다. 순수에 대한 갈망, 순수를 훼손하는 모든 것에 대한 피흘리는 싸움, 순수의 패배… 아누이가 모든 작품에서 붙드는 단 하나의 주제를 그는 이 <유리디스>에서도 애처롭도록 끝까지 물고 늘어진다.

1991년 2월 13일자 '빠리 마취(Paris March)'에, 그 해 프랑스에서 공연한 <유리디스>에서 유리디스 역을 맡았던 여배우의 인터뷰 기사가 실려 있다. 인터넷에서 그 기사를 뽑아 훑어보는데 그 여배우 말 중에 이런 구절이 있다.

'나는 유리디스다'라고 내가 말 할 때는, 그 쥐스꼬부띠스트(jisqu'au-boutiste)의 메시지가 나 자신의 것이기도 하다는 것을 분명한 사실로 받아들였다는 뜻입니다. 나는 아직도, 그리고 언제나 '절대'에 목말라요.

그 여배우는 뜻밖에도 쏘피 마르쏘다. 이 글을 쓰면서 <유리디스> 공연 기록이나 무대 사진 같은 걸 좀 찾아보려고 인터넷을 뒤지게 되었는데, 인터넷에 떠 있는 프랑스 공연 기록은 1991년 조르쥬 윌슨이 연출하고 쏘피 마르쏘가 유리디스 역을, 연출자의 아들인 랑베르 윌슨이 오르페 역을 한 연극 한 편이다. 그리고 이런저런 잡지의 그 연극에 관한 기사나 인터뷰 기사들이다. 거의 '컴맹'인 내가 어찌어찌 인터넷을 뒤져 찾은 미국과 영국의 공연 기록들, 그리고 유리디스 역을 맡았던 쏘피 마르쏘란 배우에 대한 생각 따위는 혹시 뒤에라도 쓸 자리가 되면 써보기로 하자.

위에 옮긴 쏘피 마르쏘의 말을 읽다가 jisqu'au-boutiste란 단어에 밑줄을 쳤다. 'jisqu'au-bout'라면 '끝까지'라는 뜻이다. 끝까지! 아누이 희곡의 대사 중에서 가장 창끝처럼 찌르는 단어라 할만하다. 그 '끝까지'라는 말 뒤에 'iste'를 붙였으니 '끝까지 가는 인간'이다. 단어를 이렇게도 만들어 쓰는구나. 나로서는 처음 본 단어다. 사전을 찾아보았다.

jisqu'au-boutisme [정치][구어] 극한주의; (제1차 세계대전 당시의) 철저한 항전주의

jisqu'au-boutiste [정치][구어] (위)의 주의자

끝까지 가는 인간. 극한주의자. 아누이의 주인공들을 가장 정확하게 나타낸 말이 아닐까. 여러 불문학사 책들의 아누이를 다룬 페이지에서보다, 나는 그 여배우가 쓴 단어 하나에서 아누이의 주인공들을 분명히 본 듯 싶었다. 아누이는 물론 정치적 극한주의자가 아니었다. 평생 정치적 태도를 가지지 않았고, 극장이라는 세계에만 박혀 살았다 한다. '그에게는 극장만이 인간적 삶이 지속될 수 있는 유일한 곳이었다.'

아누이의 주인공들은 무엇보다도 타협과 속됨에 대한 철저한 항전주의자, 타협과 속됨을 받아들여야 하는 비루한 세상에 끝까지 반역한 족속, '절대'에 목마른 인간들이다. 아누이가 <유리디스>보다 1년 뒤에 쓴 희곡 <앙띠곤느>에는 이런 대사가 나온다. '우리는 질문을 끝까지 던지는 그런 족속이야!'

끝까지… 끝은 어디인가. 아누이의 주인공들은 사라진다. 죽음 속으로, 혹은 삶 속으로. 현실주의자들, 합리주의자들의 정의가 넘치는 세상이라는 무대에서 사라지는 것이다. 앙띠곤느나 유리디스는 죽음 속으로 사라진다. 다른 희곡들, <야성녀>나 <짐 없는 나그네>의 주인공들은 삶 속으로 사라진다.

이어지는 유리디스와 오르페의 이른바 '사랑의 맹세' 장면. 좀 길더라도 옮겨 실어보려 한다. 처음 사랑을 시작하는 장면도 그렇지만, 이런 데를 번역하기가 가장 힘이 든다. 아무래도 쑥스럽다. 가령, '맹세해 주세요'란 말이 되풀이해서 나오는데 참 쑥스러운 대사다. 우리는 이런 식으로 말하는 일이 없다. 어쩔 것인가. 이 작품을 번역극으로 공연한다면, 유리디스 역을 맡은 배우가 기름기라고는 없는 아주 헐벗은 목소리로 이런 대사를 해야 할 것 같다.

과연 그럴까? 상대방에게, 그리고 자신에게 '절대'를 요구하는 사랑이야말로 비극의 지평으로 사라져갈 수밖에 없는 사랑이 아닐까. 순수에 대한 갈망이 사랑의 힘으로 태어나서 존재를 바꾼다… 그렇다면 그 존재의 자리는 타협에 몸바쳐야 하는 이 세상이 아닌 것이다. 사랑에 낙관주의가 깃들 곳이 없다. 아누이가 '사랑에 대해서, 그리고 존재를 바꾸는 사랑의 힘에 대해서는 철저한 낙관주의자였다'고 할 수는 없겠다.

여기서 불쑥 오래 전에 읽었던 글 한 대목이 떠오른다. 책을 뒤져보았다. 유종호 씨가 1991년에 쓴 <한국의 페시미즘>이란 글 거의 끝 부분이다.

니이체는 페시미즘은 퇴폐의 징후요, 옵티미즘은 천박성의 징후라고 다같이 배격하였다. 그가 찬양하고 권유한 것은 차라리 '비극적 옵티미즘'이었다. 그것은 고뇌를 무릅쓰고 강렬하고 폭녋은 경험을 추구하며 또 투쟁이 인생의 법칙임을 발견하고 기뻐하는 굳센 용자의 무드였다. (<<현실주의 상상력>>, 나남, 64쪽)

아누이의 페시미즘도 퇴폐의 징후일까. 니체가 투쟁하는 옵티미즘을 말하고 있다면 아누이가 붙잡은 것은 투쟁하는 페시미즘이 아닐까. 나한테는 그게 혁명가와 반역자의 차이로 읽힌다.혁명이 '굳센 용자'의 몫이라면 반역은 극한주의자의 몫이겠지. 아누이 비극의 주인공들은 극한주의자 왕국에 살고 있다. 거기도 기쁨은 있다. '비록 절망의 끝일망정 그 어디에 다다랐다는 것은 흐뭇한 일이다.' 앙띠곤느는 그 왕국의 공주, 유리디스는 그 왕국의 3류 극단 배우다. 3류 순회극단 배우 유리디스가 떠돌이 악사 오르페를 만나 사랑을 확인하는 말들 속에는 이미 왕의 딸 앙띠곤느의 저 외침이 들어있다. '난, 당장 전부를 원해요. 통째가 아니면 다를 거절하겠어!' 그리고 유리디스의 안쓰러운 다짐 속에도 이미 끝까지 가는 인간, 쥐스꼬부띠스트의 모습이 들어있다. '내가 섬뜩해 보이기를 바라세요? 눈을 크게 뜰게요. 화장도 더 진하게 하고요. 우울해지려고 애쓸게요. 담배도 피우고…'

…'질투를 주제로 한 희곡'이란 말을 어떻게 보아야 할까. 질투, 너절한 말 아닌가. 그러나 희곡을 읽어 가면 여기서 질투란 '절대에 대한 집착'과 다른 말이 아니다 싶다.

'절대에 대한 집착'이란 말은 어떻게 보아야 할까. 이해와 적응의 논리에 등을 돌리고 바라보는 지평 끝의 꿈, 순수를 지키며 살고 사랑하고 죽는 인간에 대한 꿈, 비극일 수밖에 없는 이 불가능한 꿈의 정체는 무엇일까.

얼핏, '낭만주의'라는 말이 떠오른다. <유리디스>공연의 논평들 중에서 더러 '로맨틱'이란 단어가 나온다. 2000년 5월, 뉴욕 'The Storm Theatre'에서 올린 <유리디스>에 대한 논평이 인터넷에 떠 있는데 이런 구절이 보인다.

…낭만적이지 못한 세상의 가혹한 현실에 맞선, 한 낭만적인 영혼의 순수하고 절망스런 외침. (…the pure, despairing outpouring of a romantic soul confronted with the harsh realities of an unromantic world.)

<유리디스>가 미국에서 초연된 해는 1951년인 것 같다. 'Internet Broadway Database'란 데에 공연 기록이 나와 있다. 오르페 역을 리차드 버튼이 맡았다. 유리디스 역은 도로시 맥과이어. 1959년 10월 28일자 뉴욕타임즈에도 공연 기사가 실렸고, 거기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희랍신화에서, 유리디스가 죽고 오르페는 그 여자를 되돌려 달라고 죽음(의 신)을 설득한다. 그러나 죽음은 한 가지 조건을 내건다. 오르페가 절대로 그 여자를 봐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아누이는 한 낭만적인 떠돌이 악사와 지방극단의 허드렛역 여배우를 등장시켜 이 전설을 다시 썼다. (in the Greek legend, Eurydice dies; Orpheus persuades death to restore her to him. But death extracts one condition: Orpheus must never look at her. M. Anouilh has restarted the legend in terms of a romantic street musician and soubrette of a provincial theatre troupe.)

'로맨틱' '로맨티시즘' 따위의 말은 또 어떻게 봐야 할까. 어쩐지 들먹이기 쑥스러운 말이다. 그래도 공부를 좀 해 보자고 이런저런 문학사 책들을 뒤적이고 있었다. 그러던 중에 책방에 들렀는데 우연히 '낭만주의'라는 제목의 얇은 책이 눈에 띄었다. 덩컨 히스 지음, 주디 보럼 그림. 글과 그림이 어우러진 책이다. 김영사에서 나왔고 '하룻밤의 지식여행' 시리즈 11권. 참 재미있다. 이 책 뒷표지에는 이런 글이 적혀 있다.

낭만주의를 생각할 때, 바이런이나 셸리같이 불꽃처럼 살다 간 인물들이 자연스럽게 떠오른다. 하지만 낭만주의와 연관지어 나폴레옹이나 헤겔, 터너나 블레이크, 바그너나 마르크스에 대해서는 얼마나 알고 있을까.

여기서 낭만주의에 대해 이런저런 얘기를 해 볼 수는 없겠다. 이 책 뒷부분, '카를 마르크스 : 마지막 낭만파?'라는 장에서 몇 구절만 옮겨 보기로 하자.

이 해에 마르크스는 친구 프리드리히 엥겔스와 함께 쓴, 전 시대를 통들어 가장 영향력 있는 정치 팜플릿 <공산당 선언>을 발표했다. 마르크스가 사용한 비유는 철저하게 낭만적인 것이다. <공산당 선언>은 고딕 스릴러 선언처럼 시작한다. 마치 반항하는 햄릿 역을 맡은 마르크스가 엘시노어 성벽에서 읇조리기라도 하듯이

이 글 밑에는 엘시노어 성벽에서 햄릿 복장을 한 마르크스가 이런 대사를 하는 그림이 있다. '하나의 유령이 유럽을 떠돌고 있다. 공산주의라는 유령이…'

어쨌거나 로맨티시즘이란 말이, '절대'에 목마른 인간이 꾸는, 비극일 수밖에 없는 불가능한 꿈의 정체를 짐작하게 하는 실마리는 될 듯하다. 극한주의, 철저한 항전주의, 쥐스꼬부띠슴의 한자락일 듯도 하다. 그렇다면 <유리디스> 공연 논평들에 나오는 '로맨틱'이라는 말도 그냥 받아들이기로 하자.

레인코트 입은 젊은이가 죽음의 사자 같은 앙리다. 친절하고 정다운, 죽음처럼 따뜻한 사람이다. 앙리가 알려준다. 그 사람 기관차에 몸을 던졌다고. 죽었다고. 앙리는 3막과 4막에서 오르페에게 죽음을 안내하는 인물로 다시 나온다. 그는 여기에서도 죽음에 대해 조금 얘기한다. 고통스럽지 않고, 두렵지 않은 거라고. 죽음을 친구처럼 믿어야 한다고. 그리고 유리디스와 오르페에게 '용감하고 조그만 두 마리 짐승, 아침이 올 때까지 함께 싸우고, 함께 피 흘리고, 함께 쓰러질 두 마리 작은 짐승' 같다고 말해준다. 연인들에게 할 수 있는 최고의 축복이다. 그는 곧 다시 만나게 될 거라는 말을 남기고 떠난다.

'아누이는, 어린 시절부터 죽을 때까지 연극에 몸바칠 운명을 타고 태어났다. 쉼 없이 창조해 낸 인물들로 그는 그의 나라와 그의 시대를 넘어섰다.' -아누이의 생애를 쓴 글 중 한 구절이다. 평생을 극장이라는 세계 안에서 살았다는 아누이는 나찌가 프랑스를 점령한 시기에도 그 세계 속에만 틀어박혀 있었다. 한다. 그는 레지스땅스가 되지도 못했고 대독 협력도 거부했다. 그리고 그 시기에 <유리디스>(1942>와 앙띠곤느(1944>를 썼다.

1942년 가을, 뽈 꼴레뜨(Paul Collette)라는 젊은이가 대독 협력 지도자들의 모임자리에 총을 쏘았고, 우두머리 삐에르 라벨(Pierre Lavel)과 또 한 사람에게 상처를 입혔다. 그 젊은이는 어떤 레지스땅스 조직에도, 어떤 정치 운동에도 속하지 않았다. 혼자서 한 일이었고 거의 효과도 없는 저항이었다. 아누이는 영웅적이기도 하고 헛되기도 한, 그 보상 없는 행위에 충격을 받아 <앙띠곤느>를 썼다 한다. 그런데 <앙띠곤느>에는 삶을 던져 저항하는 인물의 순수성뿐만 아니라, 어쩔 수 없이 인생을 받아들이는 인물의 고뇌까지 들어있어 끝없이 논란이 되고 있다. 이런 아누이를 어떻게 봐야 할까. 랑송(Gustave Lanson)의 말대로 '필연적으로 일시적일 수밖에 없는 사회 문제의 저쪽에서, 인간 조건의 영원한 수수께끼를 본다'고 해야 할까… 해방 후, 아누이는 한 대독 협력 작가의 구명 운동에도 나섰고, 그 작가가 처형당하자 깊이 절망했다고도 한다.

아누이가 어릴 적, 양복쟁이였던 아버지는 일차대전에 종군하여 집을 떠나 있었고, 시골 공연장을 돌며 피아노와 바이올린을 연주하는 가난한 음악가인 어머니와 둘이 살았다 한다. 가난이 준 상처가 평생 낫지 않았고, 젊은 시절 연출가 루이 쥬베의 비서가 되었을 때, 그 사람이 꾀죄죄한 아누이를 '눈꼽쟁이(le mitesx)라고 불러 상처를 더 후벼팠따고 한다.

아누이가 평생 쓴 50편이 넘는다는 희곡 중에서 <유리디스>는 2급쯤 되는 작품이지 싶다. 3급이라고 할만한 작품이 있는가. 글쎄. 난 아누이를 몇 권 읽지 않았지만, 인생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로 체념한 듯한, 씁쓰레하고 기교가 지나친 훈연의 작품들을 그렇게 말해도 될지. 아무튼 <유리디스> 대사에는 살아있지 않은 말이 많은 편이다. 주로 대사가 해설로 쓰인 경우다. 그러나 <유리디스>는 때때로 보이는 2급 대사까지 싸안아서, 너무나 안쓰러운 작품이다. '대가' 아누이가 아닌, '눈꼽쟁이' 아누이의 작품이다. 나찌에 점령된 빠리, 극장 구석에서 <유리디스>를 쓰고 앉은 아누이는 그 때 영혼마저 눈꼽쟁이였을 것이다.

아누이가 쓴 다른 작품들의 여주인공, <앙띠곤느>의 앙띠곤느, <야성녀>의 떼레즈, <메데>의 메데 들과 유리디스는 같은 왕국에 사는 자매들, 극한주의자 왕국의 자매들이긴 하다. 그러나 유리디스는 그 왕국에서도 어두운 구석자리에 조그맣게 서 있다. 유리디스의 대사는 초라하다. 앙띠곤느나 메데의, 왕의딸다운 오만하고 당당한 외침과 다르다. 유리디스와 가장 닮은 떼레즈조차 사랑하는 사람 앞에서 이렇게 외친다.

"열네 살 때, 나한테 남자가 있었어. 그랬어. 내가 잘 알지도 못하는 어떤 머시매가 나랑 잤어. 난 그냥 하는 대로 내버려뒀어. 사랑이 있었던 것도 아냐. 남자를 원한 것도 아냐. 당신은 아무래도 이해 못할 무기력 때문에, 체념 때문에 그랬어. 그 남자애를 딱 한 번 봤을 뿐이야. 난 임신했더랬어. 내가 그걸 알았을 때 걔는 떠난지가 오래였어. 난 방 안에서, 단지 나 혼자 애를 낳았어."

"…단지 나 혼자서, 피를 줄줄 흘리며 네 발로 기어다녔어!"

"…그리고 보이는 것마다 이빨로 물어뜯었어, 소리치지 않으려고! 봐, 이제 내가 당신한테 그 말을 했어! 당신한테 그 말을 했어! 누구한테도 결코 한 적 없는 말이야. 이제 이렇게 그 말을 해버렸어. 난 이제부터는 결코 당신을 볼 용기가 없을 거야."

유리디스의 다른 자매들은 외로움을 타고 무서움을 타더라도 '젊음의 투쟁'을 잃지 않는 것이다. 그러면 여기서 왜 하필 <유리디스>인가. '눈꼽쟁이' 아누이가 가장 제 모습으로 쓴 희곡이기 때문이다. 우리들, 같은 눈꼽쟁이 아닌가.

우리 몸과 영혼에 들러붙은 진짜 더러움은 무엇일까. 나로서는 유리디스의 물음 가운데 '자기를 만진 모든 손들' 따위보다 '추하게 터뜨린 모든 웃음들'이란 말이 훨씬 마음에 걸린다. 아니다. 이렇게 쓰고 보니 그것도 아니다. 1막 앞부분, 유리디스가 오르페를 처음 만났을 때 한 말이 떠오른다. 이 글 두 번째 연재 분, <<글과 그림>> 8호 124쪽에 두 사람이 처음 만나 주고받는 대사가 조금 번역되어 있다. 번역하지 않은 그 아랫부분을 여기 좀 더 옮기는 것이 좋겠다.

오르페: 난 당신을 절대로 떠나지 않을 거예요.

유리디스 :제게 맹세해 주시겠어요?

오르페 : 네.

유리디스 : 내 머리에 대고?

오르페 : (웃으며) 네.

(그들은 서로 바라본다. 유리디스가 불쑥, 조용히 말한다.)

유리디스: 당신 웃는 모습이 참 좋아요.

오르페 : 당신은, 당신은 웃지 않는데요?

유리디스 : 나는, 행복할 땐 결코 웃지 않아요.

아누이는 허술하지 않은 것이다. 이렇게 되면 '추하게 터뜨린 모든 웃음들'조차 더러움이 아니다. 그것은 반역이다. '조그맣게 웃으며'라는 지문이 붙은 유리디스의 대사도 다시 읽어 보니 쓰라린 말들이다. 유리디스가 무슨 짓을 했건 무슨 짓을 겪었건, 아누이는 한 점 더러움의 자국도 남지 않은 여자를 그려 볼 작정일 테지. '순수'만이, 세상에 대한 아무런 낙관적 전망도 가질 수 없었던 이 눈꼽쟁이 페시미스트의 꿈이었을 텐지. 어쩌겠는가.

알베레스(Alberes)의 평론집 <<20세기 지적 모험>>(정명환 역, 을유문화사, 1963)에 아누이에 대해서 짤막하게 말하고 지나간 부분이 있다. 그 중 한 대목이다.

삶은 인간을 위해서 마련된 것이 아니고 우주는 인간에 대해 무관심하고 사회는 부패되고 인간을 ㅌ타락시키며 사랑은 불가능하다는 것, 그렇지만 이런 더러운 운명에 대한 싸움은 고귀한 일이고, 그 싸움에서 여태껏 알지 못한 기쁨을 찾아낼 수 있다는 것을 인간은 이해해야 한단 말이다. "비록 절망의 종점일망정 그 어디에 다다랐다는 것은 흐뭇한 일이다."

'절망의 종점', 이 말은 한 세대의 작가들의 역설적인 테마를 요약하고 있는 말인데 그들은 이런 테마를 빌려 세인의 반발을 일으킬 정도로 신랄하게 자기들의 감정을 표현했던 것이다. 까뮈, 아누이, 싸르트르 등, 서로 판이한 작가들이 이 시기에는 인간이 자기 자신을 속여 스스로를 위안하거나 달래는 일이 없도록 촉구해야 한다고 다같이 생각했다. (297쪽)

'비록 절망의 종점일망정…'이란 말은 아누이의 희곡 <로메오와 자네뜨>에 나오는 대사다. 알베레스는 까뮈, 싸르트르…이른바 실존주의 작가들 가운데 아누이를 넣었다. 2차대전을 겪은 동시대 작가들이다. 2차 대전이라는 전쟁은 인류가 그때까지 경험한 적 없었던 사상전, 총력전이었다. 그 전쟁 후 인류는 모리악(FrancoisMauric)의 표현에 따르면 '끔찍하게 늙었다.' 모리악의 말을 마저 옮겨 보자. '인류는 차디차고 꿈을 잊은 얼굴로 새로운 피의 욕탕에서 나오고 있다. 송장 구덩이에 웅크려 앉아, 죽은 한 소녀를 - 뻬기(Peguy)가 희망이라고 부른 소녀의 시체를 가슴에 안고 있다고나할까.'

아누이도 까뮈나싸르트르와 함께 그 시대 한가운데 살았다. '인간이 자기 자신을 속여 스스로를 위안하거나 달래는 일이 없도록 촉구해야 한다'는 실존의 문제로 아누이 희곡들의 한 면을 볼 수도 있겠다 싶다. 그러나 굳이 그러자면 아누이의 세계에는, 어느 연구자가 한 것처럼 '절망적 실존주의(existentialisme desespere)'라는 이름을 붙여야겠지. 싸르트르도 까뮈도 절망의 전도사는 아니다. 인간에 대한 책임, 인간에 대한 사랑으로 세계의 허무, 존재의 허무와 어떻게든 맞서 보려 한 쪽이겠지. 그래서 '일류 작가'라고 하겠제.

아누이에게는 길이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사랑이 있고, 사랑의 적인 삶이 있었을 뿐. 여기서 '사랑'은 인간에 대한 사랑이 아니다. 한 남자와 한 여자의 사랑, 삶이라는 적에 둘러 싸인 두 마리 작은 짐승의 껴안음일 뿐이다. 삶에 반역하는, 죽음밖에는 알맞은 기후가 없는 불가능한 사랑이다.

아누이도 이런 말은 한다. <야성녀>의 마지막 대사다. '어디엔가 길 잃은 개 한 마리가 있을 테고, 그것이 내가 행복해지는 걸 방해할 거야.' 그러나 이 말 역시 '책임'의 논리는 아니다. 더러운 행복을 거부하는 죽음과 사라짐의 논리일 따름이다. 아누이에게는 사상이 없는 것이다. 일류 작가일 수가 없다. 게다가 <유리디스>에는 얼핏얼핏 통속성까지 비쳐 어떤 때는 읽어 나가기가 겁이 난다.

그러나 <유리디스>를 읽는다. 길을 가리키는 글들은 워낙 많다. 그런 책을 늘상 책상 위에 펴놓고, 그 밑에 <유리디스>를숨겨서 읽는 꼴이다. 길이 보이지 않는 글을.

무슨 '주의'란 말이 자꾸 나와 좀 우습지만, 아누이의 극작 기법은 극장주의(theatricalism)라 할만하다. 배우와 관객이 현실 속이 아닌 극장이라는 공간 안에 있다는 전제를 받아들인 연극이다. 인간적 삶이 이어질 수 있는 유일한 곳이 극장이었다는 아누이로서는 당연한 일이겠다. 진실이 말해질 수 있고 진정이 드러날 수 있는 곳, 극장.

이어서 유리디스가 말한다. '그래서 내가 조금 웃었던 거야. 당신 생각을 하며…' 이런 진실이 무대 위에서가 아니면 말해질 수 있을까? 이 희곡에서 되풀이되는 '너무 어려워…(C'est trop diffcile…)'라는 말은 결국 진정을 드러낼 수 있는 방식을 현실 속에서는 찾을 수 없다는 얘기겠다. 그따위로 비루한 게 현실이라면 받아들이지 않겠다 - 그래서 극장주의도 반역이 된다.

(3막 끝부분 유리디스가 버스에서 쓴 편지 전문을 읽는 장면을 번역한 뒤)

잘 옮겨 보고 싶었는데, 나도 유리디스를 위하여 적어도 원문이 너무 다치지는 않게 옮겨 보고 싶었는데, 하루종일을 꼬박 매달렸는데도 마음에 차지 않는다. 이 편지에서 어떤 사람은 통속성을 읽겠지 싶다. 어떤 사람은 헐벗음을 읽기도 하겠지. 난 헐벗음 쪽이었다.

<유리디스를 읽으며>를 이번 호로 끝낸다. '그냥 줄거리도 써 보다가, 아프게 닿는 부분은 번역도 해 보고, 그러다 떠오르는 생각이 있으면 적어 보기도 하면 될는지.' 하고 시작한 연재다. 번역은 힘에 부쳤고 떠오르는 생각은 가닥이 잡히지 않았다. 글을 마무리하려니 오히려 온갖 의문이 생겨나기 시작한다. 순응주의와 맞선 싸움에 대해, 반역에 대해 얘기해 보려고 펴든 책일 것이다. 그것이 '검은 희곡'의 주제다. 그런데 이제 책을 덮으면서 순응주의란 말이 또 다른 모습으로 머리를 어지럽힌다. 아누이는 너무 쉬운 길을 택한 것일까. 절망으로 가는 길은, 비록 '절망의 끝'까지 간다 해도 그것 역시 결국은 순응주의자의 선택일까. 페시미즘 역시, 아무리 '투쟁하는 페시미즘'이라 해도 결국 순응주의자의 선택일 따름일까. '이제는 희망이, 그 더러운 희망이 없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으니까요'라는 <앙띠곤느>의 대사 역시 순응주의자의 말에 지나지 않는 것일까. 절망의 품도, 조화와 평안의 품과 마찬가지로 순응주의자가 달려가서 안기는 곳일까. 가령 베르나노스(Bernanos)에게서처럼 '절망의 유혹을 넘어서는 희망, 허무에 대한 갈망을 물리치고 살아남는 희망'으로 삶을 껴안는 싸움들 앞에서 아누이의 절망, 아누이의 반역은 무엇일까. '검은 희곡'의 주인공들은 진정한 반역자였을까. 절망의 끝에는 휴식이 있다고 아누이는 말했다. 그 휴식조차 거부하는 것이 진정한 반역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