냉이로그

서른일곱 살의 털

냉이로그 2009. 1. 7. 13:31

열일곱 살의 털

책을 잘 읽지 않으니 그나마 몇 권 골라 읽을 때마다 나름 신중에 신중을 기한다. 그래봐야 다른 이들이 먼저 읽어 소개해주는 감상이나 서평 따위 그리고 혹하는 광고 문구에 기대는 게 다이겠지만 글쎄 어느덧 선구안이좋아진 것인지읽어 아깝지 않은 책들을 보게 된다. 요사이 읽은 몇 권의 책 또한 그랬다. 열일곱 살의 털이라니, 그즈음이면 가지게 될코 밑 검스레한 것이나 겨드랑이며 사타구니 깊은 곳 맨질함을 감춰주는 것을말하는 것일까, 그리해서 어른이 되어가는 어떤 성장통을 상징하는 것일까. 허나 이 소설에서 말하는털은기대와 달리어떤 성숙이나 은밀함의 그 털이 아니라 머리털에 대한 이야기였다.단순무식하게 요약하면머리를 짧게 자르는 학교의 폭력,그것에 저항하며 자신을 찾아가는 청소년 아이의 이야기. 아,그렇담 성급히 넘겨짚을 때 그 얼마나 진부한 글감에 해묵은 주제이겠는가.중고등학교 시절을 보낸 이라면 누구나 크거나 작게 겪었을 이야기일 테고,청소년 인권을말함에서두발규제라는 의제는 언제나첫번,두번 째에 놓이는 익숙한이야기이니 말이다.하지만 이것은 청소년 인권지침서가 아니라 소설이다. 청소년 인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열일곱 살 송일호라는 아이와 그 아이를 둘러싼 이들의 삶을그려보이는 것이다.아이를 둘러싸고 일어나는 일들 속에서 아이 내면으로 겪는 갈등과성찰, 그것들이 안팎으로 조응해가면서 찾아가는 길찾기. 비로소 아이는자신을 만나게 되고 또한 세상을 만난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면 자신을 둘러싼 세상 속에서진정한 자아라는 것을 찾아가는 것이다.

이야기의 미덕 가운데 뭐니뭐니 해도 가장으뜸이 되는 것은 긴장이겠지.책장을 덮을 수 없게 만드는 긴장, 손에 땀을쥐어가며 빨려들게 하는 힘. 이야기 속에 나오는 인물들에독자의 마음이투사되면서그 모든 벌어진 일들이 내 것처럼 느껴져 대응의 방식에 마음 졸이게 되는 것.그리곤나도 모르게 흘러가는 내 머릿속의 행보보다반발짝씩 앞서가거나 빗겨나는앞서가는 인물들의 모습에가슴 철렁이거나시원하게뚫리는 느낌을 갖게 되는 것. 때로는 애를녹이며, 때로는 안도의 숨을 내쉬며, 때로는깜짝 놀라며.

청소년 소설 열일곱 살의 털은 꼭 그런 이야기였다. 주인공 아이 송일호부터 그 아버지와 할아버지, 할머니와 어머니 모두 살아있는 인물로 모자람이나 어색함 없이 아이의 집안 풍경부터 아이의 내면과 자아가 형성되어가는 모습을 그럼직하게 그려주고 있었고, 일호의 동무인 정진과 재현의캐릭터 또한 그 아이들만의 개성을 가져 살아있는 아이들 그 모습이었다.가장 매력있는 인물 가운데 하나인 오광두 선생과매독이라는 별명의 체육 선생, 그리고 아주 잠깐 등장할 뿐인 나이여교사인 담임 선생의 모습까지 어느 하나자기 성격을 오롯이 가진 인물들이었다.

서른일곱 살의 털

객쩍은 소리이긴 할 텐데 나는 요즘 '털' 때문에소리를 듣곤 한다. 어젯 밤 읽은 소설의 제목을 빌면 서른일곱 살의 털이라 해도 좋겠다. 물론 더 정확히 말하자면 지난 시월부터 면도기를 얼굴에 대지 않았으니 서른여섯 가을부터라는 말이 맞겠지만 말이다. 석달 남짓 그대로 내버려두었을 때는 코 아래 수염이 입술을 덮어 무얼 먹을 때마다 수건이나 휴지를 두고 닦아내야 할 정도였다. 애당초 수염이라는 것을 멋을 내어 기를 생각 같은 건 없었으니 눕고 나면 자라 있는 털을 어떻게 손댈 생각은 못하고 비죽비죽 자라는대로 내버려 둘 뿐이었다. 벌써부터 여기저기에서 지저분하다, 보기 싫다, 깎아라, 밀어라 원성이 자자했지만 그냥 두었다. 그 계기라는 것이 없지는 않았지만 굳이 그것까지 드러내고 싶지는 않고, 어쨌든 자라는대로 내버려둔 입가의 털은 그런대로 정이 들고 익숙해지게 되었다.입가로 비죽비죽, 턱으로 북술북술 그리고 뺨으로 숭숭 자라있는 털들을 비춰지는 유리로 보게 되거나 손으로 만져 가슬함을 느낄 때면 시간 속에 묻혀 잊어가는 무언가를 문득문득 떠올리게 해주는 것 같았다.

엊그제 꽤 여러 달만에 만난 모임 사람들도 첫 반응은 다들 우습고 낯설다며 한참이나웃어댔다. 게다가 내 입성이라는 것이 언제나 후줄근에 꾀죄죄이니 거기에 정리되지 못한 머리며부숭하고 비죽이 나 있는 수염까지,이런 비유를 쓰는 것이그분들께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아주 노숙자 같다는 거였다. 목수 같네, 작가 같네, 거기에 한 술 더 떠 예수 같네 하는 소리들도 아주 없지야 않지만 내가 봐도 그 쪽보다는 아무래도 어느헐벗은 사내의 차림에 다름 아니다, 쩝. 그러나 나는 그러한 눈길들에 하나개의하게 되지 않으니 좋기만 할 뿐이다. 며칠 뒤 설에 만날식구와 친척 어른들에게 몇 소리를 듣게 될까싶기도 하지만 에이 그것도 뭐.

그렇게 얼굴에 난 털을 내버려둔 뒤로 이제껏 두 번 면도 바리깡이라는 걸대 보았다. 그런 기계가 다 있다는 걸 신기해하면서.그렇다고 뭐 그 털들을 어떤 식으로 단정반듯하게모양을 내고 싶어서는 아니, 그냥 적어도 입술을 덮어 먹을 때마다 반찬 양념이 묻고 국물에 젖는 건 좀 어떻게 해야겠다 싶어찾게 된 것이다. 이발 바리깡보다 조금 작게 생긴 그것을 위이이이잉 얼굴 털에 갖다 대면툭툭쳐내준다.기술이랄 게 없으니고르게 쳐낼 줄을 몰라 외려 바리깡을 대고 나면 더 비죽비죽 엉성하고 지저분해보이기도하는데, 그 전까지 비누거품을 묻혀 싹싹 베어낼 때하고는 또 다르게 재미가 있다. 글쎄, 언제까지 얼굴 털을 이렇게 자라게 하고 다닐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요즘은이것이 좋다. 짧지 않은 시간 내가 잃어버리고 지내온 어떤 것을 이제는 다시 놓치고 싶지 않다는 마음을, 그리고 너무나 자주 무감해지거나 흔들림에 놓이지 않을 수 있게 나를 지키고 싶은 어떤 것이 여기에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시작한 내 서른일곱 살의 털.

무릎베개 / 백현진

(얼굴에 털 자란 사진 좀 보자고, 올려보라 하기도 하는데, 따로 찍은 것은 없고 지난 번 대전 행사 때 찍힌 것들이 있어대전동화읽는어른 홈페이지에 올려 있어 거기 사진들을 주욱 긁어다 놓는다. 이 때도 바리깡을 한 번 대 그나마 짧게 쳐냈던 때. 기연아, 설날에 오빠 보면 너무 놀라지 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