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편
전화를 받은 게 봉정사에서 내려오던 길이었으니, 벌써 한 달도 더 되었겠다. 가물 기억이 나는 번호인 것도 같은데 하면서 받았더니 세상에나, 어머니학교 교무실이었다. 벌써 십 년이나 지났구나. 십 년 전 그곳, 종로구 숭인동 동경약국이 있는 건물 4층, 서울어머니학교.
놀란 마음에, 반가운 마음에, 그리고 어느만큼은 미안한 마음에 전화를 받아 지금 계시는 선생님이 들려주는 학교 얘기를 들었다. 더 깜짝 놀랐던 거는 그 때 내가 들어가던 저녁 달반으로 나오시던 성남의 어머니 한 분이 얼마 전 다시 나오기 시작했다는 거다. 그러면서 혹시 내 연락처를 알고 있느냐며 물으셨다고. 아, 그렇게 지금까지 계속 교실에 나오고 계시는구나. 감기에 걸려 기침을 콜록대고 있으면 슬쩍 교문 밖으로 나가 감기약을 사다 주시던 어머니, 첫 눈이 내린다고 아이처럼 좋아하면서 오늘은 공부 그만하고 노래방에라도 가서 놀자고 부추기던 어머니. 어머니들마다 사연이 남달랐지만, 말하자면 그 어머니는 당시 마흔 조금 넘은 나이에 이제라도 한글을 배우겠다고 나오던 분이셨다. 어려서는 몸이 너무 아파 학교를 보내주지 않았다고, 지금은 미용실을 하고 계시는데 이웃들한테는 영어 배우러 다닌다 하면서 일부러 멀리 서울에 있는 한글 교실을 찾아오신 거라고. 손님없는 미용실에서 글씨 연습을 하다가 누가 갑자기 문 열어 들어오기라도 하면 다급히 공책을 감추느라 심장이 뛰곤 하신다는.
지금 계시는 선생님이 전화를 주신 것은 봄 학기를 마치면서 어머니들 글쓰기 잔치를 열었는데 심사를 보아줄 수 있겠냐는 거였다. 그래서 번호를 물어물어 연락을 하게 된 거라면서. 요사이에는 다른 곳에서 오는 어떤 연락이든 죄송하다는 말로 다 잘라내고 있었지만, 그 부탁만큼은 못하겠다 할 수가 없었다. 오히려 영광일 뿐. 그 퀴퀴한 교실이 다시 떠오르고, 비뚠 글씨를 한 자 한 자 공들여 쓰던 어머니들 얼굴이 너무나 떠올라. 그 어머니들 글을 한 데 받아 읽어볼 수 있게 된 것만으로도 기쁘고 감사한 일이었다.
학교에서 보내준 소포 상자를 열어 한 분 한 분 어머니들이 쓴 글을 읽다가 또 한 번 아주 깜짝 놀라고 말았다. 영순 어머니. 구리시에 살아 새벽 다섯 시면 서울로 빌딩 청소 일을 하러 나오셨다가 오후 대여섯 시면 퇴근을 하고 늘 빈 교실에 가장 먼저 와 계시던 어머니. 내가 들어가던교실은 일곱 시가 넘어야 시작하는 저녁, 달 반이었다. 영순 어머니하고는 일 년 반을 만났다.어머니는 영감한테 편지 한 번 써보는 게 소원이라고 얼굴이 붉어지며 말씀하셨다.그렇게 쓰면 이불 밑에 넣고 나올 거라며. 어머니로부터 청소 일 다니는 이야기를 들었고, 가족들 이야기를 들었고, 어려서 전쟁을 맞아 피난다니던 이야기를 들었다. 얼굴이 잘 빨개지면서도웃기를 잘하시던 어머니였다. 수업이 마치면 계단을 다 내려갔다가 살짝 올라와 사과를 가방에 담아주던 어머니였다. 그걸 들고 내가 교무실로 들어가려 하면, 안 된다고, 집에 가져가서 혼자 먹으라고, 눈을 찡긋거리시던 어머니였다. 그 때 벌써 예순 서넛이셨으니 지금은 그보다 열이 많은 나이가 되셨겠구나. 어머나, 어머나, 어머나. 영순 어머니가 아직도 그 교실에.
솔직히 지금 마음에 여유가 없지 않아, 학교에서 보내온 소포를 받고도 바로 열어보지도 못한 채 책상 한 쪽에 올려놓고만 있었다. 그리고는 이제야 미뤄놓은 숙제라도 하듯 잠깐 시간을 내어 어서 해서 보내야겠다 하고 꾸러미를 열었는데, 한 편 한 편 어머니들이 쓴 글을 읽다 보니 그런 식으로 가졌던 내 마음이 얼마나 미안하고 부끄러운지. 서른다섯 편 글이라 해야 분량으로 치면 사실 얼마 되지 않는 것, 어서 해보내기나 해야겠다고 생각했으니 말이다. 글자 하나 하나에 새겨진 이평생의 이야기들을.
그 가운데 몇 편.
나에게는 친구들이 지여준 별명이 하나 있다.걸어다니는 종합병원이라고들 한다.왜냐면 나는 여러가지 병으로 고생을 많이 했다.그 중에서도 제일 무서웠던 병은 백혈병이였다.하루하루 수혈을 밭지 않으면 살기 힘들었기 때문이다.두 딸들은 한참 공부를 해야 하는데나는 아무 것도 해줄 수가 없었다. 남편은 많은 병원비로 빛을 엍어야 했고시어머님과 친정엄마도 집안 살림하랴병원에 다니느라 고생이 말이 아니였다.지금 새각해보니 우리 가족들이 나에게는정말 소중하다고 늘 느끼고 있다.이글을 쓰면서 남편에게 감사의 말을전하고 싶다. 여보 고맙습니다 라고.이젠 내가 이렇게 건강해져서하고 싶었던 공부도 할 수 있으니 항상감사하며 살아야겠다.내가 다시 태여난다면 가족들에게건강한 아내로 엄마로 태여나서공부도 많이 해서 서울어머니학교선생님들처럼 좋은일을 하면서 살고싶다.(배움반 OOO)
제목 - 내 이름 석자
옛날에 난 내 이름도 쓸 줄을 몰라서창피하고 얼굴이 붉어질 때가 많았다. 예를 들어 집으로 우편물이 와서 싸인을 해야할 때 은행에서도 그리고 투표를 해야 할 때 역시 내 이름 석 자를 적어야 하는데 나에게 너무도 힘든 일이였다. 하지만 이젠 난 당당하게 내 이름을 쓸 수 있어 너무도 행복하다. 얼마 전 선거가 있어 난 투표를 하러 갔다. 그리고 너무도 당당하게 내 이름 OOO를 쓰고 기쁜 마음으로 투표소를 나왔다. (2010년 6월 12일 배움반 OOO)
주제 배우(배움) 저억반(저녁반) 2010 - 28일 OOO
나가 만약에 부잣집에 태여났다면 공부를 했을 탠대 가나한 집에 태여나서 내눈이 감고 살알습니다. 내무내무 억울하있다. 인제를 서울어머니학교가 있습니다. 일러게 할 수 있다 이 정말 정말 감사한 있다. 선생님이게서 공부를 하게 된열습니다. 내 인생을 바꼬었습니다. 이제라도 조금씩 눈을 볼 수가 있습니다. 나는 지금은 눈 보지 못한 사람이 있다면 눈을 보며 봉사활동을 할 수 있다면 정말 정말 봉사활동을 할 수 인된도야 주게습니다.
제가 나종에 봉사활동을 할 수 있다면 지긍은 공부를 못해서 하고 싶은 거를 못해서 조긍하고 보니까 선생님처렁 봉사를 하고 싶습니다. 얼마나 해야 봉사를 할 수 있을까요. 일었게 공부가 힘들 줄 못랐습니다. 하지만 열심히 하면 된 거지요. 일었게스숩니다. 어쩌나 손자을 열심이 잘 키워야 한다. 소원이 있다면 소너가 열심이 잘주는 겄시 소원있다. 나는 공부 못해도 손자들을 잘해주어서 좋아요.
2010년은 나에게 뜻깊은 일이였다. 서울어머니학교에도 가고 친구도 만나고 공부도 하고 나도 공부를 많이 하면 서울어머니학교 선생님처럼 공부 못하는 분들 도와주고 싶다. 서울어머니학교 선생님 감사합니다. 서울어머니학교에 다니기 전에는 친정 엄마에게 원망도 많이 했지만 이제 원망할 엄마도 안계셔서 엄마가 하늘나라에 가신지 일년이 지나서 서울어머니학교에 가게 되었어. 엄마 조금 기다려주지 그랬어. 엄마에게 편지 한 번 안써보고. 엄마 보고싶어. (샛별반 OOO)
내 자신에게 물어보자.
과연 내가 어러서 양친보모 및에서 잘먹고 호강하면 자랐다면 어렵고 배고프고 가난한 이들을 생각이나 했겠나. 아니다. 나 역시 오만하고 목에 힘주고 거들먹거리고 살았을 것이다. 그래 못 배워서 목에 힘주지 않고 잘 살아요. 지금은 서울어머니학교에 잘 다니고 있습니다. 작년에 수학여행가서 선생님께서 무었이 하고 십야고 무르신다. 나는 걷침없이 대학에서 종경받는 교수가 되고십다고 말씀드렸다. 하지마 내가 대학교수가 되였다면 배우지 못해 글을 보아도 그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모르는 사람들 마음을 짐작이나 했을까요. 그래요. 지금은 종경하는 선생님들께 많은 것을 잘 배우고 있어요. 나는 내 것을 하면서도 빠지기 일 수 인데 선생님들은 수업에 빠지지 안으려고 몸이 아프셔도 항상 웃는 얼굴로 가르치는 선생님 감사합니다. 그리고 사랑합니다. (지혜반 OOO)
환경미화원
제일로 사람들이 하지 않는 쓰레기 지저분한 음식물 쓰레기들을 비가 오나 눈이 오나 깨끗히 치워주시는 미화원분께 감사드린다. 예전엔 냄새나고 챙피하다고 안하는 사람들이 많았는데 요즘엔 미화원 들어가기도 힘들다고 하더라. 대학나와 취업이 안 돼서 다니는 사람도 있고, 미화원도 공무원이라 전보단 남들 시선도 한결 가벼워진 거 같다. 한 겨울이건, 한 여름이건 이 동네, 저 동네 다니시면서 고생하시는 환경미화원 분들이 있기에 깨끗히 살아갈 수 있어 감사드립니다. 2010년 6월 11일 (지혜반OO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