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봄날들


박기범 http://blog.paran.com/gibumi


지는 봄볕에 개나리 노랗게 반짝였다. 분홍 꽃 매단 앵두나무 밑에서 딸기 한 소쿠리를 앞에 놓았다. 한참을 놀고 그만 일어서려다 본 옆구리 바깥 오줌주머니. 그제야 알았다. 쓰러져 사경을 헤매다 병원으로 업혀 가 열하루 만에 돌아오신 거라는 걸. 그 끔찍한 시간의 얘기를 듣고 난 뒤 나는 놀라 울먹였을 거고, 떼를 쓰듯 따져 묻기도 했겠지. 또 그런 일이 있으면 어떻게 하느냐고, 그날 태희 아저씨가 들러보지 않았으면 어쩔 뻔했냐고…… 그리고는 가끔 와 다녀가면 좋겠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선생님을 처음 찾아뵙고 다닌 지 십년 만에 처음 듣는, 다녀가 달라는 얘기.


올봄부터 나는 태백에 가까운 삼척 산자락 아래에서 목수학교에 다니고 있다. 실업자 자격으로 구직 신청을 해 밥이 되는 일을 하고자 모여든 이들이 제 몸의 몇 곱절 되는 나무를 지고 이고 날라 깎고 켜고 자르며 집 짓는 일을 배우는 곳. 끌밥 대팻밥은 날마다 발목 위로 차올랐고, 그렇게 닷새 일을 해 몸이 삐거덕댈 쯤이면 저마다 식구가 있는 고향집을 다녀오곤 하면서.

주말이 되면 일옷을 벗어놓고 조탑으로 가는 게 일이 되었다. 도계읍을 지나 태백 현동 봉화를 지나 가파르게 고불고불 이어지는 길. 할아버지, 왔어요. 외람된지 모르지만 언젠가부터 자연스레 그리 불렀다. 그러고 나니 할아버지도 ‘누구누구 선생’ 하던 것을 ‘누구야’ 하고 말을 놓으셨어. 빨래하고 계셨어요? 들은 체 만 체. 아니, 뭐 그거 내가 해드리겠다고 빼앗으려 그러는 거 아닌데…… 아, 맞다. 제비, 라디오. 그때부터 종알종알. 종알종알이라 봐야 워낙 말이 느리니 어, 어, 있잖아요, 거기 학교에 교수님도 할아버지거든요. 할아버지랑 나이가 같아. 올봄이 칠순이었대요. 어디 무슨 폼 나는 교수는 아니고요, 평생을 목수일만 했대요. 그런데 저는 배우는 게 너무 어려워, 아마 제가 목수학교에서 제일 못할 거예요……

한번씩 다녀가라고 할아버지가 얘기할 때 약속한 게 그거였거든. 누가 다녀가는 거 너무 힘들다 하는 할아버지한테 그냥 다녀만 갈 거예요. 왔다고 기척도 하지 않고, 왔으니 봐달라고도 않고, 할아버지도 일부러 일어나거나 나오거나 그러지 마요. 아님, 그냥 마을 할머니들 밭 보고 들어가다 잠깐 스쳐 인사 건네듯이, 그 길에서 어쩌다 머릿수건 내려놓고 앉아 저녁 바람 얘기하고 지나듯이 그 정도로만요. 아니면요, 할아버지 라디오는 잘 들으시잖아요, 라디오처럼 옆에서 혼자 떠들기만 할 거니까요. 그건 괜찮을 거 같은데, 응? 근데 그게 아니라네요. 라디오는 되어도 사람은 안된대요. 사람은 자꾸만 곁에 와서 이것저것 묻잖아. 아파 죽겠는데 와서는 어디가 아프냐, 얼마나 아프냐 자꾸 묻고. 또 이것저것 묻고, 밥은 어떻게 해 먹느냐고 묻고, 뭐는 또 어떠냐고 묻고…… 으응, 그런 거 안할게요. 옆에서 떠드는 것도 싫으면 라디오 끌 때처럼 제 코를 한번 비틀어요, 그럼 그것도 뚝 할 테니까요…… 그따위 얘기에 손 쓰다듬으며 앉아 있을 때 마침 창밖으로 제비 한 마리가 보여. 그래요, 저 처마 아래 날아든 제비 있지요, 제비가 다녀가는 건 할아버지 힘들게 하는 거 아니잖아요. 저 제비처럼 그렇게, 들고 나는 자리 없이 그럴게요.


위험한 고비를 지나고 집에 돌아온 할아버지는 한주 한주 달라 보이게 좋아졌다. 처음에는 방 안에서 겨우 몸을 일으켜 들어오라 하시더니 그다음에 찾아뵐 때는 섬돌 앞에 걸상을 내놓고 앉아 책을 보고 계셔, 그리고 또 그다음 주엔 수돗가에 앉아 빨래를 조물조물, 멀리서 온 손님을 맞아 일직으로 밥을 먹으러 나가기까지. 그 모든 게 고마울 뿐, 모든 게 봄 햇살 때문인 것만 같아 하늘을 보고 고맙습니다, 올라오는 흙 내음 덕인 것 같아 땅을 보고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라디오가 되고, 제비가 되기로 한 나는 그저 할아버지 곁에서 아무 얘기나. 만날 대팻날을 갈고 나무를 깎다 가니 그 얘기나 가만가만, 아니면 할아버지 궁금해하지 않을까 싶은 이런저런 얘기들을 듣거나 말거나 주섬주섬 떠들었다. 할아버지를 아프게 할 것 같은 세상 걱정 얘기들은 말고, 힘들고 속상한 얘기들은 빼고. 얘기하다 보면 나도 그 곁에 할아버지가 있는지를 까먹기도 하는 것 같아. 그 아래 일직교회 종탑이거나 아님 저 건너 차들 씽씽 고속도로에 멍하니 눈을 둔 채로, 그도 아니면 꺼내는 얘기 속 어떤 그림으로 빠져들어. 고맙게도 할아버지는 라디오를 끄거나 하지는 않았다. 그저 지나가는 얘기가 있는가 하면 그 말꼬투리에 우스갯말 한마디를 보태거나 그보다 더 긴 말씀을 잇곤 하면서.

그렇게 할아버지와 이 봄날을 함께 보냈다. 마지막 뵙던 날, 봄볕이 아주 좋아 할아버지에게도 봄날을 물었다. 봄날? 네, 할아버지가 살아온 날들에 봄날이다 싶은 때는 언제였을까 해서요. 그렇게 시작된 할아버지의 어린 시절, 승옥이하고 영부하고 책보를 메고 학교에 다녀오며 놀던 보리밭 사잇길. 이제는 다들 할아버지가 되었을, 키가 작고 나무를 잘 타 ‘쌀우유강아지’ 열매를 잘 따던 영부, 키만 멀쑥이 크고 순하기 이를 데 없어 만날 꼴찌여도 천하태평이던 승옥이, 그리고 잇달아 떠올리며 이어지는 그때 동무들 이름. 하지만 이내 할아버지는 그 그립고 평화로운 기억에서 지옥 같은 시간들을 떠올려야 했다. 전쟁이 있었어. 그 착한 수억이는 기차 바퀴에 깔렸고, 또 누구는 폐결핵으로, 며칠 사이에 또 누구도 폐결핵에, 말라리아에, 버려진 포탄을 만지다 그게 터져…… 사흘에 한 아이가 죽거나 어디론가 없어졌거든, 나중에는 한 반에 삼분의 일은 자리가 빌 정도였으니까. 군인들끼리 싸우는 전쟁은 끝나도 삶을 망가뜨리는 전쟁은 끝나지가 않아, 쫓겨나거나 숨어 살다가 목을 매는 사람들. 엄마 아빠를 잃어 그 조그맸던 동무들이 팔리듯 시집을 가거나 머슴을 살러 가. 사촌이고 이웃이고 서로가 원수가 되어 죽고 죽이면서…… 그때 할아버지 들려주던 이야기를 이렇게 몇줄 글로 담기에는 너무나도 모자라. 그 세월 너머 어딘가를 보며 마른 눈물 번지던 주름진 두 눈, 그리움에 젖어 힘없이 떨리던 목소리. 반짝이던 햇볕과 지나가던 바람, 멀리서 들려오던 새소리도 모두 하던 일을 멈춰 숨을 죽이고 귀를 기울이던.


아직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물론 마음을 놓지 못해 가까이 지낸다는 이웃집으로 쇠고기 한근 사들고 가 혹 무슨 일이 있으면 연락 달라 부탁해놓고는 있었지만, 다녀갈 때마다 몰라보게 좋아지던 낯빛을 보며 애써 먼 일로만 여기고 있었다. 그날도 나는 목수학교에서 땀에 전 몸으로 나무와 씨름을 했다 그날따라 톱에 손끝을 베어 입으로 핏물을 머금어 뱉어내고 있었다. 잇달아 걸려온 전화 몇통, 그 소식 앞에서 짐짓 겸허한 어떤 마음을 흉내 낸다거나 아득한 어떤 것을 생각하며 어른스레 숨을 고를 수는 없었다. 앞도 옆도 아무것도 보이지가 않아, 안동으로 내달리는 내내 어미 잃은 짐승의 거친 숨 사나운 울음이 그치지 않았다. 그리곤 슬플 겨를도 아플 힘도 없던 장례의 시간들. 잠깐씩 빈소 한구석에 앉아 꽃에 파묻힌 말간 얼굴을 눈으로 보듬거나 고개를 파묻을 뿐.


그 뒤로도 여전히 목수학교 일을 마치는 주말이면 나면 할아버지가 있는 곳으로 갔다. 새앙쥐와 고라니, 어치 들이 주인이 된 그 빈집과 빌뱅이언덕, 그리고 언젠가는 그조차 아무것도 아닐 할아버지 세월의 때가 묻은 모든 것들. 이제는 할아버지가 아니라 당신과 이웃해 살던 마을 할머니들을 만나 이야기를 듣고, 일직교회 반사 시절 청년이던 아저씨들을 만나 시간을 거슬러 할아버지를 더듬으면서. 그렇게 돌아가시기 직전 한 달 반 남짓부터 돌아가신 뒤 두어 달째 조탑을 찾으면서 더욱 아팠고, 더욱 떨렸다. 그리고 더 많이 웃었고, 더 많이 이상해했고, 안다고 여겨오던 것들이 자꾸만 뒤집어졌다. 하지만 그렇게 해 보고 들으며 담아온 이야기들로 섣불리 어떤 말을 한다는 것은 조심스럽기만 하다. 당신이 진정 원하는 것은 말해지는 것이 아니라 살아내는 것으로 이어지는 것일진대 부질없는 군말을 보태는 것으로 누를 끼치기만 하는 것은 아닐는지.

한가지, 할아버지와 마지막 시간들을 나누면서 아주 크게 놀란 것이 있어. 하루는 김중미 선생님 부탁으로 대신 여쭐 것이 있었다. 버마 난민촌 아이들을 위해 그곳 말로 그림책을 만들어 선물하려고 하는데 할아버지 동화 가운데 한 편을 쓸 수 있는지 하는 얘기. 사정을 자세히 말씀드려야 하겠는데 나는 그곳 역사나 난민들 처지 같은 것에 대해 잘 알지를 못해, 편지로 받은 내용을 미리 수첩에 적어가 그걸 읽어가며 말씀을 드렸다. 잘 모르는 내용을 전하려니 적어간 걸 보면서도 어려워 더듬거리며 읽었겠지. 괜히 먼 곳 잘 모르는 이야기까지 해 할아버지 힘들게 하는 것 아닌가 싶어 적잖이 죄송한 마음이 들기도 하면서. 깜짝 놀란 건 그다음이었어. 다 듣고 난 할아버지가 그곳 이야기를 더 자세히 들려주시는 게 아닌가. 그래, 거기 카렌족 사람들이 난민으로 태국에 가 많이들 살고 있는데, 카렌족이 쫓겨나는 게 미군 편을 들다가 지금은 그렇게 된 거거든. 그 사람들을 위해 우리가 뭘 어떻게 해줄 수가 있는지…… 그 나라 역사도 얼마나 힘들었다고. 일본 식민지가 되었을 때는 죽은 사람들 핏물로 강을 이룰 정도로…… 그 뒤로도 미국이고 어디고 들어가서는, 저 어디야, 인도네시아 동티모르처럼 거기 사는 사람들끼리 내전을 하게 해놓고는 뒤로 쏙 빠져서는…… 태국에 카렌 난민촌이 있는데 그것도 다 관광객들한테 보이려고 받아주고 있는 거거든. 카렌 여자들이 목걸이를 이렇게 겹으로 계속 채워서 목을 길게 늘이는데 그게 신기해 보러 오는 사람들이 많으니까. 그런 여자들이 있는 데가 아닌 다른 쪽에서는 카렌 난민들을 가둬놓고 외부 사람들 가까이 못하게 해놓고…… 막힘없이 자분자분 들려주는 할아버지 앞에서 그저 입이 벌어지기만 했다. 어떻게 할아버지는 저리도 세상 구석구석 일들을 자세히 알고 계신가 싶어서였다. 많은 이들이 더러 할아버지를 일러 '구석에서도 세상을 다 들여다보는 분'이라곤 하는데 아닌게아니라 정말 그러했다. 하지만 그건 그전까지 여기던 것과 아주 다른 차원에서였다. 단지 세상 돌아가는 이치를 근본에서 통찰해 내다보는 것뿐 아니라 그토록 세상 구석구석 일들을 낱낱이 알고 계신 모습에 놀랄 따름이었다. 할아버지는 그런 거, 세상 구석 얘기들까지 어떻게 그렇게 잘 알아요? 신기하다는 얼굴로 눈을 동그래져 물으니 할아버지는 더 놀리기라도 하듯 아이, 동화작가가 돼서 그 정도도 공부를 안하면 되나? 세계 지도 펴놓고 이 나라가 어딘가, 어디에 전쟁이 일어나나 다 공부하고 그래야지. 멍한 얼굴로 있다가는 이내 할아버지 장난기가 또 발동하셨구나 싶어 아유, 할아버지도 차암…… 하고 웃어넘기려 하는데 이어지는 말씀이 그게 아니었다. 나도 그전에는 잘 몰랐는데 하나하나 공부를 해서…… 세상에 하도 무섭고 불안한 일들이 많이 일어나니까 그중에서도 아시아랑 아프리카 쪽 나라들부터 지도 펴놓고 찾아보고 그랬지…… 아아, 그렇구나. 할아버지는 그렇게, 한 평도 채 되지 않는 오두막에서, 평생을 아픈 몸으로 앓고 지내면서도, 그 구석진 자리에서 세상을 살피고 계셨던 거다. 산과 들, 마당에 핀 푸나무들을 보면서, 일하며 가난하게 살아가는 이웃들을 보면서, 그 안에서 삶과 목숨, 자연의 이치를 일러주신 할아버지. 세상과 떨어진 자리에서 멀리하는 것이 아니라 누구보다 세상 현실에 관심을 기울이며 가까이 들여다보고 아파한 할아버지…… 할아버지는 아는 체하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몰라도 된다고 하지도 않았다. 아니나 다를까 돌아가신 뒤 방 한쪽에는 다 펼칠 때 방바닥을 덮을 만한 크기의 아시아, 아프리카 지도가 손에 잘 닿게 놓여 있었다. 그 곁에는 세상 온갖 문제를 지나치지 않고 공부해 적어놓은 공책들, 오려놓은 신문 쪼가리들. 그 아픈 몸, 다섯 평 오두막의 할아버지는 먹이 찾는 어린 벌레를 안타까이 여기듯 그렇게 저 멀리 지구 반대편 이웃과 아이들의 고통을 외면하지 않았다. 거창한 말일지 모르겠지만 당신의 고향은 지구였고, 그 위에 사는 모든 목숨붙이는 식구이자 이웃이었다.


돌아가시고 난 뒤 어느 신문에서 「권정생, 그의 반역은 끝났는가」라는 기사를 보면서 할아버지의 삶을 기리는 것으로는 그 글 하나면 충분하다 생각했다. “생활이라는 최전선에서” “무욕, 절제, 가난을 무기로 정면대결”해온, “혁명이 사라진 시대의 혁명가”로 살아온 삶이라는 말이 가슴을 두근거리게 했다. 얼핏 비장함이 지나치게 압도해 사뭇 낯설게 느껴지기도 했지만 오히려 그 낯섦이 더욱 반가웠다. 그동안 할아버지에게는 늘 '깨끗하고 맑은 영혼’이라거나 ‘아름다운 성자’ 식의 꾸미는 말이 따라붙었다. 허나 그러한 말들은 할아버지의 삶을 왠지 도덕이나 종교, 관념의 틀에서만 보고 있다는 느낌이 진해 못내 아쉬웠던 게 사실이다. 할아버지가 어떻게 이 사회와 긴장하고 대결했는가를 보지 않으면 진공관 속 맑은 영혼, 더없이 아름다웠던 한 인간을 신비롭게 추앙하는 데에 머물 수밖에 없다. 더욱이 당신이 전사의 영혼으로 대결하던 것은 다름아닌 우리 모두의 삶으로 말미암아 더욱 견고히 지탱되는 이 사회체제일지니, 실로 물어야 할 것은 지금 우리가 좇아 살고 있는 삶의 방식이어야 한다. 할아버지는 자본주의가 인간에게 끊임없이 새로운 ‘필요’를 주입하며 삶의 방식을 줴흔든다는 것을 깊이 꿰뚫고 있었다. 인간은 필요를 느끼는 순간 자본에 무력해진다. 그것 앞에서는 어쩔 수 없다는 말로 그밖의 모든 가치가 쉽게 허물어진다. 하기에 자본은 필요한 상품을 더 좋게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없던 필요를 끊임없이 만들어내는 것으로 인간을 지배해왔다. 우리 삶에 있어 필수품 목록이라 하는 것이 십년 안짝으로 걷잡을 수 없이 빠르게 바뀌어가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삼십년 전만 해도 부잣집에나 겨우 있던 승용차가 어느덧 집집마다 없어서는 안되는 것이 되었고, 나온 지 십년도 지나지 않아 손전화 없이 사는 일이 상대에게 불편을 주는 일처럼 되어버렸다. 머지않아 우리는 또다른 필수품을 갖게 될 거고, 그 목록은 아마도 한정 없이 늘어갈 것이다. 그것 없이는 적응할 수 없는 삶의 방식, 살아남으려면 어쩔 수 없이 따라야 하는 사회 얼개만 만들어낸다면 자본은 바라는 만큼 소비시킬 수 있으며, 그 어떤 것이라도 원하는 대로 개발할 수 있고, 아무리 추악한 전쟁이라 해도 뜻대로 벌일 수 있는 것이다.

할아버지가 넘어선 것은 바로 그것이었다. 자본이 만들어내는 필요, 어쩔 수 없이 끌려갈 수밖에 없는 욕망의 체제. 당신에게는 다섯 평 흙집 이상의 어떤 집도 필요하지 않았고, 당연히 승용차도 필요하지 않았다. 여벌의 옷가지와 이불도, 손쉽고 빠르게 몸을 대신해주는 어떤 것도 필요하지 않았다. 그러니 더 엄밀히 말하면 할아버지에게는 무욕이라거나 절제라는 말이 어울리지 않는지 모른다. 그 말에는 이미 필요한 것, 있으면 좋은 것이라는 바탕이 있기 때문이다. 그 바탕 위에서라면 애써 없이 살고자 하는 일이 몹시도 힘겨운 일이겠지만, 있어봐야 필요치 않은 삶의 방식에서는 전혀 이상할 일이 아니다. 그 ‘필요’들이 ‘필수’라고 확신하는 우리 삶을 기준 삼을 때나 불편을 견디는 고행처럼 보이는 것인지 모른다. 다시 말해 할아버지는 자본이 부채질하는 욕망을 견디며 싸운 것이 아니라 그 부채질이 닿을 수 없는 삶의 방식을 지켜낸 거였다. 자급공동체에 대형마트가 들어가 힘을 쓸 수 없고, 자립공동체의 마을에 첨단 교통과 통신이 필요치 않듯 할아버지 삶에는 자본이 넘볼 수도 끼어들어 휘저을 수도 없던 것이다. 하물며 자본의 방식으로 이루는 그 모든 것들의 생산과 유통, 관계의 방식과 속도라는 것이 힘없는 이웃의 땀과 피를 빼앗아 만드는 거며 인간 아닌 모든 생명의 죽음을 담보로 한다는 것을 모르지 않았으니 그것 앞에서 끝끝내 저항하고자 했던 것이다. 죽이고 빼앗아 잠시잠깐 즐겁고 편안한 자본의 삶의 방식이 아닌, 목숨으로 돌고 돌아 평화가 흐르고 기쁨이 넘치는 자연의 삶의 방식으로.

벌레 한마리, 풀 한포기를 내 몸처럼 여긴 할아버지의 맑은 영혼은 그러했기에 자본이라는 욕망의 체제에 맞선 전사의 삶을 살아낸 것이었다. 그 욕망의 굴레가 인간의 삶을, 자연을, 그리고 지구 전체를 어떻게 망가뜨리고 있는지 뼈저리게 들여다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빌뱅이언덕 맞은편 고속도로가 놓이는 것을 보면서, 그 위를 달리는 자동차에 기름 한바가지 더 채우자고 벌이는 잔혹한 전쟁을 보면서, 그것으로 얻을 수 있는 한줌 인간의 편리함을 위해 열병에 시달리는 지구를 보면서 그 절박함은 더할 수밖에 없었다. 혹시라도 바깥에 사는 우리가 할아버지 사는 모습을 보며 몸도 아픈데 그리 불편하게 어떻게 사나 걱정했다면 거꾸로 할아버지는 그러한 이들을 안타까이 여길 뿐이었다. 자유와 평화를, 자연의 행복이 주는 풍요로움을 그깟 자본이 주는 욕망에 맞바꾼 채 바동거리는 모습에 "승용차를 버려야 파병을 막을 수 있다"는 당신의 일침이 그렇게 큰 울림을 준 것이나, 골프장 짓는 것을 막겠다고 모인 이들이 몰고 온 자동차들을 보며 이래서야 자연을 지킬 수 있겠냐고 근본에서 되묻는 물음으로 고개를 들 수 없게 한 힘은 바로 당신 스스로가 그 싸움의 맨 앞에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평생을 통해 아이들에게 전하고자 한 것도 언제나 그와 다르지 않은 이야기였다. 자연을 닮은 마음을 스미게 했고, 어느 목숨 하나 하찮은 것이 없음을 울려 느끼게 했다. 반바지를 기워 입을 때 해님과 별님, 냇물에 사는 물고기와 들에 핀 꽃들이 기뻐한다는 것을 행복하게 깨닫는 어린 너구리의 이야기는 감히 할아버지가 아니면 아이들에게 들려줄 수 없는 이야기일는지 모른다.


어려서부터 할아버지를 친아버지처럼 따랐던 태찬 아저씨가 하루는 이런 얘기를 했다. 돌아가시고는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제자라고 다녀가는 걸 보면서 잔뜩 주눅이 들었다던 아저씨. 할아버지와 인연이 알려지면서 여러 곳에서 취재와 인터뷰가 들어오자 당황스러워하며 "나는 할 말이 없어요" "우리한테야 그냥 집사님이었죠 뭐" 하고 말씀을 아끼기만 하더니 그날은 만나자마자 얘기를 꺼냈다. 오늘 교회에 갔다가 설교를 듣는 내내 이 생각 저 생각을 하다가 딱 그 한 구절이 귀에 들어왔거든요. 예수가 맨 처음 설교를 하면서 한 말이라는데,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당할 것이다, 이 말을 듣고는 딱 권 집사님 생각이 났어요. 집사님이 그렇게 누구든 긍휼한 마음으로 봤으니 지금 돌아가신 뒤 그 많은 사람들이 집사님을 찾아오고 그러잖아요. 집사님은 한번도 누구를 나쁘다 한 적이 없어요. 좀 못되게 하는 사람이면 못된 대로 안타깝게 여기고, 잘못하는 사람이 있으면 그걸 그렇게 마음 아파했어요. 나도 이 말의 정확한 뜻은 잘 모르겠는데 긍휼이라는 말이 그런 거 아니에요? 지금 세상 사람들이 다들 집사님을 보고 선생님, 선생님 하면서 따르고 슬퍼하면서 안타까워하는 것도 집사님 그 마음이 퍼뜨려져 그런 걸 텐데요…… 그런데 집사님은 당신의 그 긍휼스런 마음이 자기한테 돌아오는 것을 바라는 게 아니라 더 가난하고 아픈 사람들한테로 이어지기를 바랐을 텐데, 허허허……

할아버지가 계시지 않은 조탑 오두막 앞에 앉아 다시 할아버지를 생각한다. 할아버지를 빗댄 수많은 거룩한 말들과 할아버지의 웃음과 눈물, 그리고 할아버지의 분노와 연민…… 할아버지의 생이 결코 행복했다 말할 수는 없겠지만 그렇다고 불행하기만 한 삶을 살았다 생각지는 않는다. 자칫 행복이라는 개념을 어떻게 두는가 하는 것으로 말꼬리나 물게 될지 모르겠지만 할아버지는 우리가 감히 따르기 어려운 것을 지켜냈다. 평생에 걸친 지독한 아픔과 전쟁의 상처, 식구들을 슬프게 잃은 사연만으로도 너무나 고통스러웠다. 하지만 할아버지는 끝끝내 존엄을 지켰다. 그 아픔 속에서도 당신은 스스로 자유로웠고, 세상의 온갖 헛것들이 판을 치는 속에서도 아프고 여린 목숨의 편으로 살았으며, 가난하고 서러운 이들에게 부끄럼 없는 사랑을 할 수 있었다. 완전한 자유가 아니고서는 할 수 없는 일, 존엄을 버리고 다른 것을 취하고서는 가능치 않은 일이었다. 당신에게는 분노와 사랑이 하나였고, 스스로의 존엄을 지키는 일은 곧 세상과 싸우는 일이었다. 누구보다 자유롭기를 원했던 분, 이제 할아버지를 떠올리며 그 말들을 생각한다.

할아버지가 처음 쓰러지고 난 뒤 진정으로 아파하고 걱정하던 이들이 당신 가까이에서 병간하는 것을 허락해달라거나 그 어떤 방식으로라도 불편치 않게 돌보고 싶다는 뜻을 전한 일이 있다. 물론 그전에도 비슷한 얘기만 나오면 얼굴을 찌푸려 고개를 젓곤 하셨지만 한번이라도 더 말씀을 드려보기는 해야겠다는 마음으로 아주 조심스럽게 꺼낸 말. 이번만큼은 할아버지도 아주 언짢아하지는 않으면서 그래그래, 그 마음은 모르지 않는다며 조용히 타이르듯 말씀하셨으니, 할아버지는 마지막까지 자유스런 마음을 다치고 싶지 않아했다. 그렇게 끝끝내 당신만의 존엄을 지키려 했다. 잘 가요, 할아버지, 안녕.


사람한테는 자유라는 거가 제일로 중요한 거거든. 그건 사람만 그런 게 아니고 짐승이고 뭐고 다 그런 거야. 아무리 누가 나한테 뭘 해준다고 해도 내 자유스러운 마음이 다치면 그것보다 힘든 게 없지. 병원에 가 있으면서도 그리 편하게 해주는 밥 먹고 편히 누워 있는다 하지만 그게 다 아무 소용이 없어. 어디 요양원 같은 데라 해도 같고, 누가 와서 뭘 해준다 하는 것도 다 그래. 의사가 옆에 붙어 있다 해도 아무것도 해줄 수 있는 게 없다니까는. 짐승이 아프면 아무도 없는 데로 찾아가 홀로 앓다가 죽는 것도 다 그런 거야. 아플 때만큼은 더 자유롭고 싶으니까. 그럴 때 누가 오면은 더 힘든 거, 그건 나중에 아파보면 알 거야. 아파보질 않은 사람들은 몰라.





Posted by 냉이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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