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기서도 추석이 있을까

어제 저녁 조탑에 올라갔다. 들어갈 때는 해가 막 저물고 있었는데 금세 어둑해져 걸음마다 발딛을 자리를 골라야 했다. 여기도 비가 적지 않게 왔을 텐데, 바람도 많이 불었지. 집 앞 평상을 덮은 노란 장판이 뜯겨 너덜너덜하다, 방에난 작은 창을 막아 놓던 비닐도 너풀너풀이다. 이미 결정내린 집 보존 문제에 다시 무슨 시비를 걸고픈 것은 아니지만, 이대로 모습은 너무도 쓸쓸하고 아프다. 깨끗이 그대로 풀과 나무의 땅으로 돌려 주었으면 좋으련…….


손수 심어 놓았다던 어린 포도나무에는 네 송이 매달린 것 그대로 쪼그라 들어 있다. 한 알 따다 입에 넣으니 지리한 비에 물을 많이 먹었는지 단 맛이 없어. 빌뱅이로 오르는 집 뒤꼍에는 무성한 풀숲을 끌어안은 넝쿨 가지가 누런 호박들을 품고 있어. 반 보다 조금 배를 불린 진노란 달이 떴고, 매미들도 이제는 다 갔나 봐. 스산한 바람 소리만. 추석이에요, 하얀 쌀 가루 빻아 어머니랑, 목생 형님이랑 즐겁게 드세요. 그 날 밤에 텔레비전에서 뭐 할 건데, 그거 보고 속상해하실지도 모르는데…….


25일이 될지 26일이 될지, 그 두 날짜 중 밤 열 시나 열한 시에 나가게 될 거라 하더니 편성일자가 정해진 모양이다. [추석기획] 어머니 사시는 그 나라에는 - 권정생, 한 시대의 고향, KBS1, 25일(화) 22:00

방송에는 할아버지를 기억하고, 할아버지의 삶과 작품에 대해 말하는 여러 사람들의 이야기가 나올 것이다. 할아버지와 가깝던 벗들이던 선생님들과 함께 살아온 마을 사람들, 그리고 여러 평론가 분들의 이야기들. 처음 방송국에서 목수학교로 찾아올 때는 나도 그 많은 둘레 사람들의 인터뷰 한 꼭지만을 하는 줄 알았다. 그러던 것이 방송을 찍는데 도움이 필요하다 했고, 방송 제작팀과 함께 할아버지가 살아온 길을 함께 더듬어 보면 좋겠다 했다. 감히 내가 할 일이 아닌 것 같아 머뭇거리기는 했지만, 내가 마음이 끌린 것은 방송에 얼굴을 비추게 되는 것이 아니라 할아버지가 살아온 길을 다녀볼 수 있다는 데에서였다. 그래서 그렇게 하겠다 하면서 촬영은 목수학교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장례와 영결실이 이어지던 때 방송국에서 나온 피디 분이 혹시 할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줄 수 있겠냐 해서 나는 이 블로그에 썼던 글들을 전한 일이 있는데, 프로그램 구성안의 배경은 그 글들을 바탕으로 해 짜여진 거였다. 목수학교부터 시작해 카메라는 내 뒷모습을 찍는 것으로 해서 38번 버스를 타고 들어가는 안동 길, 그리고 조탑의 집과 빌뱅이, 일직 교회, 마을에서의 모습들을 담는 것으로 시작해 그 뒤로는 아직 가보지 않은 곳들. 나병에 걸린 목생이 형님이 숨어 살다 굶어 죽었다는 의성 길안의 나환자 마을, 떠돌이 거지 시절 할아버지가 지났을 그 어느 새벽의 간이역들, 할아버지가 젊은 시절 부산에서 재봉기 상회 점원으로 일하던 곳과 책을 빌려다 읽었다는 계몽서점과 그곳을 대신하는 보수동 헌책방 골목, 초량동 어딘가, 그 시절 가난을 그대로 간직한 듯한 까치 고개 산비탈 마을, 바닷가……. 그렇게 방송국 팀이 일러주는대로 할아버지가 걸은 길을 찾으며, 그리고 지난 주까지 이어지고 있던 유물정리 일들을 하면서 새롭게 조각조각 맞춰지는 할아버지의 모습들에 나도 모르게 탄성을 내곤 했다. 아아, 그래서였구나, 그 말이 그래서였구나, 그 때 그러셨구나……. 그랬기에 방송 일로 다니던 그 시간들은 소중할 수 있었다. 할아버지와 다시 만나는 시간들, 그리고 보지 못한 할아버지의 또다른 날들을 만나는 시간들.


방송을 찍는다는 것에는 생각지 못하는 일들이 더러 있었다. 게다가 장면 하나 하나를 찍는 일은 무척이나 낯설고 어려운 일이었다. 논픽션 다큐로 만드는 것이기는 하지만, 그러면서도 짜임을 가진 이야기에 담아내게 할 때에는 장면을 만들어내는 연출이 있어야 했던 것. 나는 마치 어설픈 배우가 되기라도 한 듯 걸은 길을 걷고, 또 걷고, 되돌아와 다시 걷고, 한 번 더 걷기를 많게는 십여 차례 해야하기도 했다. 조탑 큰 길에서 집으로 올라가는 데까지만 삼십 분도 넘게 걸렸던가. 걸음이 너무 빨라요, 길 안 편으로 걸으세요, 이쯤 와서는 길 가운데로 나오세요, 미안해요 한 번만 더……. 거기에다가 방송을 하는 분들로서는 화면 밝기 같은 것을 맞춰야 했기에 힘들여 조명을 맞추어 놓으면 구름이 지나 해를 가리거나, 흐리던 하늘에 잠깐 볕이 비추거나 하면 그것도 엔지, 다시 가야 하는 일이 되곤 했다. 십여 미터 안 되는 길을 걷는 것만도 다시, 다시, 다시, 한 번만 더, 한 번 더요……. 변소에 들어가는 것만도 한 열 번은 더 들락날락했던가. 그 변소 문을 계속해 여닫으면서 내내 할아버지가 이걸 보며 뭐라 하실까 하는 생각이 돌아 마음이 무거웠다. 하지만 어차피 하기로 한 거 방송하는 분들 처지도 생각할 수밖에. 그 분들로서는 가장 잘 보여질 수 있게 하려 애를 쓰는 것일 텐데. 방송이라는 걸 잘 모르기는 하지만 영상도 하나의 언어라면 말로 얘기하는 것만큼이나 화면에 담는 장면의 구도와 빛깔, 속도, 떨림 같은 것 모두가 다 그 언어를 구성하는 것일지니. 힘들었다면 그런 것이었다. 너무도 익숙치 않은 카메라와 그 앞에서 몇 번이나 다시 해야 하는 일. 한껏 마음을 모아 할아버지를 떠올리고 있노라면 몇 번 되풀이하게 되는 똑같은 움직임에 어느덧 나도 모르게 마음은 할아버지가 아니라 카메라를 의식하게 되기도 했으니. 자전거를 타고 언덕길을 허덕이며 오르는 것도 몇 번을 다시, 또 다시, 한 번 더. 웃으며 할 일이 아닌데도 돌아서면 낯선 그 일들에 웃음이 나기도 했다.


그런데 걱정은 촬영이 거의 끝나갈 쯤부터였다. 말 없이 그런 장면들을 곳곳에서 찍고 있기에 나는 그저 그러한 장면들이 화면으로 나가면서 어떤 나레이션 같은 것이 함께 흐르겠거니 했는데 우연히 보게 된 자세한 구성안을 보니 그 아래 흐르는 이야기가 나를 대신한 성우가 내 독백으로 이야기를 하는 것으로 되어 있었다. 그런데 그 이야기라는 것이, 전혀 내 마음도 아니고, 내가 할아버지를 생각하는 것과도 아주 달랐다. 할아버지의 작품이라거나 할아버지의 삶을 독백해 말하는 그것은 전혀 내 것일 수가 없었다. 자꾸만 할아버지가 남긴 유산 십억과 다섯 평 오두막에 초점을 맞추는 얘기들에, 할아버지의 가난하고 불편한 삶을 보며 가슴 아파하는 모습이랄지, 심지어는 마지막 맺음을 당신이 남긴 책들에 우리의 구원이 있을 거라는 식의 그 무엇들까지……. 놀라 피디 님에게 얘기를 했다. 적어도 이건 아니라고, 아무리 방송 제작진 나름의 의도가 있고 기획이 있다지만 제가 하는 독백으로 내 보내는 것을 이렇게 제 마음과 다르게 할 수 있는지. 내게는 할아버지가 남긴 것이 십억이 아니라 십원이어도 권정생은 권정생이고, 당신이 다섯 평 오두막이 아니라 열다섯 평 연립주택에 살았어도 권정생은 내게 권정생일 거라고. 나는 그의 가난한 살림이 눈물겹지도, 안타깝지도 않았다고. 그건 가난을 선택한 선생님 삶을 어떻게 바라보는가의 문제일 텐데요, 아니에요, 그리고 그 결말, 선생님이 남긴 책들이 우리를 구원할 거라는 말조차 너무도 달라요. 책이 책으로만 남는 한 그것은 아무 부질없는 거라는 건 선생님이 늘 하신 말씀이기도 하고요…… 그리고 자동차를 타는 것에 대해, 환경에 대해, 선생님은 그렇게 말씀하신 일이 없어요, 오히려 선생님은…… 이러한 것들은 선생님을 진정으로 모시고, 가까이 했던 이라면 누구나 잘 알고 있어요. 그런데 어떻게 제가 그러한 내용의 독백을 하는 것으로 방송에 나가게 되어야 하는지…….


그 뒤로 머리가 너무 아팠다. 마음이 무거웠다. 이걸 어떻게 해야 하나, 어쩌지……. 피디 님은 내가 한 얘기들을 듣고 난 뒤 얼마 전 구성안을 보내줘 이것을 직접 수정해봐 달라 했고, 나로서는 나름껏 짜여진 구성안의 틀 안에서 최소한으로 고쳐 보내기는 했지만 그 뒤로 아직 연락이 없다. 다시 편지를 보내 어떻게 되고 있는지를 묻는데도 아직. 막상 당일 날 방송이 나와봐야 알 수 있는 것인지. 방송이라는 것은 속성상 그럴 수 밖에는 없는지.


여전히 걱정이 놓아지지는 않지만 이제는 내 손을 떠난 일이고, 그 방송으로 해서 져야할 무게가 있다면 고스란히 져야 하지 않겠냐는 생각이다. 그리고 피디 님과 함께 다니는 시간 동안 그 분으로서 할아버지께 갖는 진정이 누구 못지 않다는 것도 충분히 느끼고 있었으니 너무 걱정하는 것도 예의가 아닐 것 같아. 다만 할아버지의 모습, 할아버지의 삶이 텔레비전이라는 네모상자 안에서 굴절되어 비춰지지 않기만을 바랄 뿐.


하얀 달빛에 실바람이 일고

초가 지붕 위엔 박꽃도 필까

누나 얼굴 같은 하얀 박꽃이 필까

조롱조롱 애기박이 열리고

그렇게 또 가을이 찾아오는 걸까

바가지가 둥글둥글 굵어지는 가을이 오는 걸까

어머니는 사기 요강에 오줌 받아

박넝쿨 구덩이에 부어 넣으실까

바가지에 딴딴하게 영글라고

오줌 받아 부으실까

바가지 타서 말리시며

어머니는 시집간 귀분이 생각하실까

거기서도 추석이 있을까

설날이 있을까

어머니는 추석에도 외로우시겠지

어머니는 설날도 외로우시겠지

아직도 아들딸 이승에 두고 가셔

어머니는 문구멍에 귀 기울이시며

눈물지으실까


- <어머니 사시는 그 나라에는 / 권정생> 가운데 열 다섯 번째 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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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냉이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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