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석사 무량수전

아무래도 부석사 무량수전에 대해 정리를 하는 일은 고건축박물관에서 찍어온 사진만으로 하기는 어렵겠다. 그곳에서 볼 수 있는 것은 워낙 골조에만 한정이 되어 있기도 한 데다가 그걸 다 나타나도록 사진을 찍기도 어려웠기 때문이다. 무량수전 자체가 커다란 규모여서 그랬는지 모형 또한 비교적 크게 만들어져 있었는데, 좁은 공간 안에 그 크기를 전시해놓았으니 원하는대로 사진기에 담기에도 어려웠기 때문이다. 그러니 이 건물에 대해 공부한 것을 되살리는 것은 인터넷에서 퍼온 사진들과 함께 보며 하는 것이 나을 것 같다.

많이 알려진대로 부석사 무량수전은 봉정사 극락전이 13세기 초 만들어졌다는 것이 밝혀지기 전까지만 해도 명실상부 가장 오래된 목조건축물로 교과서에까지 올라 있었다. 비록 그 자리를 봉정사 극락전에게 내주기는 했지만, 여전히 그 뒤를잇는 오래된 고려시대 목조건물로잘 알려져 있다. 또한팔작지붕으로서는 가장 오래된 건축물이다. 역시 잘 알려진 내용들일 텐데, 부석사는 의상대사가 통일신라 때 창건, 화엄종의 주된 사상이 건축적으로 반영된 것이라 할 수 있다. 화엄종에서 말하는 10품을 반영하여 산지에 입지해 있고, 그래서 그것을 나타내려 석축은 9층으로 되어 있다. 산지에 지어지다 보니 앞뜰은 비교적 좁은 편이고, 그러다보니 무량수전 건너편에 있는 안양루라는 누각도 예불 공간으로 쓰곤 한다. 현존 유일의 고려시대 팔작 건물이라 하지만 아마도 그 당시 개성 주변에는 더 장엄하고 화려한 건축물이 있지 않았을까 막연히 추정해 볼 수도 있겠다. 개경을 도읍으로 하고 있던 당시로 치자면 영주의 부석사는 말하자면 그야말로 촌에 있는 절 아니었겠는가? 뚜렷한 건립연대는 알 수 없지만 이것을 13세기 중반에 건립되었을 거라 추정하는 것은 묵서명에 나오는 지붕 가구 수리 시점으로부터 통상적인 기간을 거슬러 짐작하는 것이며, 또한 이 건물에 쓰인 고식의 수법들에 근거를 두는 것이다. 부석사 무량수전 역시 기둥 위에만 포를 짜 올리는 주심포 양식의 건물인데, 이것은 당시 많은 주심포 건물들과 다르게 지붕 가구를 팔작으로 하고 있다. 사실 주심포 양식에서 팔작지붕을 올린다는 것은 구조적으로 불안하다 할 수 있겠는데, 그 말은 역으로 이 건물이 얼마나 잘 만들어져 있는가를생각하게 해 주는 것이다. 그 불안한 조건 속에서도 천 년 가까운 세월을 버틸 수 있도록 불안함을보완해 지었음을 반증하고 있으니 말이다.

우선 정면의 모습. 하나는 사진이고, 그 다음은 정면을 그린 도면, 그리고 또 하나는 모형도를 그 위치에서 찍은 것이다.모형도에서는 나타나지 않지만 사진과 도면으로 보면 정면의 모습이 같은 시대, 비슷한 양식인 봉정사 극락전과 확연히 다름을 알 수 있다. 봉정사 극락전은 판문과 살창이라는 다소 폐쇄적인 입면 모습을 띄고 있는데,부석사 무량수전은 전면이살창으로 가득하니 말이다. 그렇다고 부석사 무량수전은그 시대 전형적인 입면 양식을 아예 무시하고 지은 걸까? 그렇지 않다는 건 뒷면의모습이 증명하게 된다.어쨌든, 이렇게 부석사 무량수전은 시대 전형에 벗어난 입면 모습을 띄는데 그 까닭은 무엇일까? 그것을 알려면 평면을 잘 이해해야 한다. 부석사 무량수전을이해하고 해석하는 모든 단서는 이 건물만이 가지고 있는 평면의 특징에 있기 때문이다.

또 하나, 정면의 모습에서 봉정사 극락전과 확연하게 다른 모습은 기둥과 기둥 사이의 포벽이 왠지 허전해 보인다는 것이다. 봉정사 극락전은 어땠나? 그 사이사이마다 복화반이라는장식적인 부재가 가로지르는 인방 부재를 받아주고 있질 않았던가? 그러나 부석사 무량수전에는그런 것은 찾을 수 없고, 기껏해야 조그마한 소로가 하나씩 붙어 있을 뿐이다. 그것을두고 그냥 소로도 아니고 쪽소로라 하는데, 그렇게 부르는 까닭은 온전한 하나의 소로가 아니라 반을 잘라 바깥면에만붙인거기 때문이다. 모양을 내기 위한 것, 장식재인 것이다. 다시 말하면 그 쪽소로들은 어떠한 상부 구조를 받아주거나 하는 구조적 역할 따위는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후 조선시대에 가면 소로수장집이라 하여 이처럼 쪽소로로 장식을 하는 집들이 보이게 되는데, 이것은 지금도 서울의 북촌에 있는 식당들에 가보면 적지 않게 볼 수 있다. 그렇다면 부석사 무량수전에서는 기둥 사이의 포벽에 이와 같은 쪽소로들을 왜 쓰게 되었을까? 그것을 살피자면 봉정사 극락전과는 다른 공포 형식을 봐야 하는데, 부석사 무량수전의 공포는소첨차와 소첨차의 십자결구 위로 바로 대첨차와 대첨차가 한 번 더 십자결구를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에 비해 봉정사 극락전은 소첨차의 십자결구 위로 뜬장혀라는 가로 인방재가 한 번 지나가고, 그 위로 대첨차가 올라가기 때문에포벽 자체가 한 차례 분할이 되고 있다. 다시 말해 부석사 무량수전은 창방 위에서 장혀까지의 포벽이 넓게 만들어지지만 봉정사 극락전은포벽이 분할되면서 좁은 포벽부가 만들어진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봉정사 극락전은 기둥과 기둥 사이의 분할된 포벽에 복화반이라는 부재를 넣는 것으로 나름 장식의 효과를 가질 수 있었지만, 부석사 무량수전의 커다란 포벽에 복화반을 쓰자면 그 포벽만큼이나거대한 복화반을 끼워넣을 수밖에 없다. 이랬을 때는오히려 공포보다 복화반이 더 강조되어 애초 구조적 역할과 장식의 기능을 수행하는 공포부의 멋이 살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아무래도 그 넓은 포벽부에 복화반을 쓴다는 것은 어울리지가 않다. 그러다보니 그 넓은 포벽부를 그냥 두는 것 또한 허전하여 장식재 기능만을 하는 쪽소로를 하나씩 끼워넣은 것인데, 아마도 건립 당시에는 이 쪽소로도 지금처럼 그냥 붙어 있는 것이 아니라포벽부에 단청을 하여마치 쪽소로와 이어지는 적당한 부피감의 구조재가 있는 것처럼표현했을 거라 보기도 하는 것이다.

기둥들을 보면우리나라건축물 가운데 가장 아름답다고 말해지는 배흘림이뛰어난 균형과 조형미를 갖추고 있고,네 군데 귀퉁이에 있는 귓기둥들은 평기둥들보다아주 조금 키를 더 세웠다. 대충 봐서는 그 차이를 찾기 어려운데, 정면을 나타낸 도면에서 보자면퇴칸에 있는 창방들이 귀퉁이로 가면서 휘어지듯 올라가 있는 차이를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일부로 귓기둥을 조금 높게 하는 것을 '귀솟음'이라 하는데, 이렇게 하는 까닭은 멀리서 건물을 봤을 때 귀퉁이가 처져보이는 착시 현상을보완해주기 위한 것이다. 마치 지붕에서 앙곡을 넣거나 안허리곡을만들어 착시 현상을 보완하듯이 귀솟음 또한 그러한 계획에 의한 것이다.귀솟음 말고 안쏠림이라는 것도 있는데, 이 또한기둥들이 양쪽으로 벌어져 보이는 착시 현상을 보완하면서 안정적으로 지붕을 받치고 있는 느낌을 주기 위한 의도인데 이 건물에서도 귓기둥의 안쏠림 방식이 쓰였다 한다.

건물을 바깥 정면에서 볼 때 더 얘기할 수 있는 것으로는 기단에 대한 것과 추녀 밑을 받치고 있는 활주라는 기둥을 말할 수 있겠는데, 마침 그것들은 자료 사진이 있으니 그것을 보며 기억하는 편이 더 도움이 될 것 같다.

이것이 네 귀퉁이의 추녀 밑을 받치고 있는 활주라는 것인데, 보통은 기단 바깥쪽 세우는 경우가 많은데 부석사 무량수전은 기단 끄트머리에 세워놓았다.

부석사 무량수전은 면석을 이용한 가구식 기단이다. 가구식 기단이라면불국사 대웅전에 쌓은 것처럼우주석과 탱주석까지 쓰는 것을 말하는데, 여기에서는 사진에 보이는 것처럼 간략하게 면석만을 써서 기단을 쌓았다. 이처럼 면석만으로 기단을 쌓은 것은 익산 미륵사지 터에서도 발견이 되는데 그것으로 미루어 백제 시대에도 이와 같은 양식이 쓰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 기단은 수덕사 대웅전이나 봉정사 극락전의 기단에 견줘많이 낮은 편이다. 그리고 이 기단에서 또 한 가지 특이한 점이라면 정면의 동쪽 두번째 칸 면석에 이 기단을 쌓은 석공의 이름이 새겨져 희미하게 남아 있다는 것이다. 고려시대에 성을 가진 사람이 전체 국민의 오분의 일도 안 된다 했으니, 이렇게 기단에 이름을 새길 수 있을 정도면 그 시대에 석공이 나름의 사회적 지위가 높았음을 말해준다 할 수 있겠다.

이제 측면의 모습을 보겠는데, 먼저 사진에서 보이는 것처럼 지붕 가구의 맨 윗 부분. 솟을합장을 보면 사진에서는 얼핏 직선의 부재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안으로 살짝 굽은 내반곡을 가진 부재를 썼다. 이 솟을합장의 기능이라면 그 하나가 도리의 이격을 막아주는 것이고, 또 다른 하나는 혹시라도 도리가 굴러떨어지지 않도록 방지해주기 위함인데, 이 건물에서는 솟을합장을 쓴 방식이 다른 건물들과 많이 다르다. 말하자면 이 건물에서는 솟을합장재가 도리들을 직접 받고 있지를 않고 뜬장혀니 단장혀 같은 도리의 하부구조에서 시작해 또다른 도리의 하부구조에 이어진다. 어쨌든 이렇게 함으로써 도리들의 이격을 잡아주기는 하겠지만, 그러면 도리의 구름 방지 역할은 나 몰라라 하는 것인가? 그래서 보이는 것이 종도리 밑에 나비 모양으로 되어 있는 받침목이다. 이 받침목은 이 시대에 크게 유행을 했는지 비슷한 시기에 만들어진 건물들에서 반복적으로 나오고 있다는데 보면 볼수록 귀여운 받침이다. ^ ^ 아, 예쁜 게 또 많이 있네. 상중도리 밑을 받치면서 솟을합장에 대고 있는 초공도 둥글둥글 몽실몽실 귀여운 모습이고, 대공 위에 놓여 솟을합장을 붙잡고 있는 초공도 둥글둥글 몽실몽실.

위에서는 사진이 부분만을 보여주고 있어서 솟을합장에 대해 한 가지 얘기를 빠뜨리고 있었는데, 이제 이 사진을 보면서는 할 수 있겠다.그게 뭐냐면, 부석사 무량수전에서는 솟을합장이 종도리에서 상중도리로만 갈 뿐, 그 아래로 중중도리나 하중도리, 주심도리로는 이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이 점은 부석사 무량수전의 특이점이 아니라 오히려 종도리부터 주심도리까지 이어지는 봉정사 극락전의 특징으로 말하는 것이 옳겠다. 왜냐하면 그렇게 종도리부터 주심도리까지 솟을합장이 계속 이어지는 예는 그 건물에만 있으니 말이다.

도리의 숫자를 보면 외목도리부터 하여종도리부터상중도리, 중중도리, 하중도리, 주심도리, 외목도리까지 모두 1, 3, 5, 7, 9, 11……열한 개가 놓이고 있다. (종도리는 하나지만 나머지 도리들은 전후면으로 두 개씩이니 둘씩 더했으니 말이다.) 그런데 보통 가구의 크기를 말하는 량 단위로 셀 때는 외목도리는 세지 않으니 그것을 빼면 아홉 개, 부석사 무량수전은 9량집이 된다. 사실 이 부분에서 어떤 학자들은 외목도리도 량 수에 넣어야 한다고, 외목도리야말로 처마의 길이와 깊이를 결정지어 주는 중요한 부재이므로 중요하게 여겨야 한다고도 하지만 통상적으로는 외목도리는 세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내목도리 또한 량 수를 셀 때 세지 않는데, 가구 구조에서 역할이 중요한 내목도리 같은 경우는 세기도 하고 있다.

외목도리 얘기가 나와서 말인데, 이 사진에서는 외목도리의 크기가 다른 도리들과 그닥 차이가 나지 않게 보인다. 사진이 이래서 그런 건지 아님 모형 자체가 그래서 그런 것인지, 아무튼 이 사진에서는 잘 나타나지 않고 있지만 부석사 무량수전에서는 외목도리의 크기가 다른 도리들보다 조금 작다. 그래서 외목도리 위로 서까래를 올리기 전에 받침목을 하나 두게 되는데 이 모형에서는 아무리 찾아봐도 보이지가 않았다. 말하자면 이 건물은 팔작지붕이니 추녀 옆으로 놓이는 선자서까래 구간에는 갈모산방이라는 받침목이 놓여지는 것이며, 평서까래 구간에는 지금 말한 외목도리 위의 받침목이 반대편 추녀쪽 갈모산방이 나올 때까지 쭉 이어진다고 배웠는데 이 모형에는 그것이 생략되어 있었다.

다른 도리들보다 외목도리를 얇게 쓴 까닭에 대해 설명을 하자면 부석사 무량수전 가구구조의 특징에 대해 먼저 짚어 얘기를 해야만 한다. 이 건물의 가구 구조에 있는 특징으로는 몇 가지를 꼽을 수 있겠지만, 부분에 대한 특이점이 아니라 전체 구조면에서본다면 "작은 단위의 부재들을 중첩하여 사용" 했다는 것이다. 위에 있는 사진만 보더라도 뭔 놈의 부재들이 저리 복잡하게 가로지르고, 또 가로지르고, 그 위로 또 가로지르는지……그렇다고 굵고 긴 부재가 쓰이는 것도 아니다. 짤닥하고 가는 부재들이 가로로, 가로로, 또 그 위에서 가로로……. 그렇다고 이 건물이 작은 건물이냐? 그것도 아니다. 9량이나 되는커다란 건물이다. 게다가 맞배집도 아니고 팔작지붕을 올렸으니 하중은 훨씬 더 나갈 것 아닌가? 그런데부석사 무량수전은 크고 굵직한부재들로 이 건물의 크기와 하중을 받아내는 것이 아니라 거꾸로 작은 부재들을여러 차례 중첩시키는 것으로 하중을 자연스럽게 분산, 완충시키고 있다.

자, 그럼 다시 외목도리를 보자. 외목도리의 기본 역할은 처마내밀기가 되어 있는 곳에서 처마를 받아주는 것이다. 그 말은곧 처마의 하중을 받아 공포를 통해 기둥으로 전달시킨다는 뜻도 된다. 쉽게 말해 처마의 하중을받아내는 것이다. 그런데 이 건물은여러가지 면에서 처마로 내려오는 하중이 크다. 일단 집의 규모가크고, 지붕 양식 또한 팔작으로 되어 있다. 그렇다면 그 큰 하중을 받는 외목도리는더 크고 단단한 부재를 써야 하지 않겠는가? (아, 이 대목도 수수께끼로 남겨둘까? 에이, 뭐. 봉정사 극락전수수께끼에도 풀었다는 꼬리말 하나 없는데 ㅠㅠ.상품이 너무 별로였나? 쩝.) 암튼 상식적으로 생각하자면큰 하중을받아야 할 테니더 크고단단한 부재를 써야만 할 것 같던 외목도리가 실제로는 더 작게 쓰이고 있다. 왜 그렇겠는가? 수수께끼니까 답은 말하지 않고힌트가 되는 말을 보탠다면, 힘이라는 것은 끝내받아내는 것만이 아니라 전달하는 거라는 거다.이 외목도리 같은 경우 지붕 처마에서 오는 하중을 자기가 받아 공포를 통해 기둥으로.

아무튼 이러한 사정 때문에 외목도리는 작아졌고, 작아진 이 외목도리 위로 바로 서까래를 거는 것이 아니라 서까래를 얹기 전 받침목을 두고 있다.

(아, 그런데 드디어 확인했다. 이 사진이 전면 어칸 포벽부에 현판이 걸려 있고그 위에서 가로로 지나가는 외목도리가 겹처마를받고 있는 걸 보여주는데, 자세히 보면 외목도리 위에 얇은 받침 부재가 놓여져 있는 것이 보인다. 서까래들은 외목도리에 바로 걸려 있지 않고, 그 받침재들 위로 놓여 있다. 히야아~이렇게 눈으로 확인할 수 있게 되니 가슴이 다 시원하다.어서 부석사에도다시 찾아 이것들 모두 눈으로 직접 확인해야 할 텐데 말이다.)

중첩하여 사용하고 있는 가로형의 받침재들을 하나하나 살펴보자. 뭣도 모르고 볼 때는 그저 어지럽기만 하게 얽기설기 엮여 있는 것 같기만 해도 하나하나 천천히 살피면그것들 나름의 원칙과 질서를 가지고 있는 것이 보인다. 그러니 공부라는 것은 결국 그 원칙과 질서를 들여다 볼 수 있게끔 눈을 씻는 일이겠다. 어디이러한 건축물의 구조에서만 그러하겠나, 어지러이 돌아가는 세상 일이라는 것도 결국은 그 질서와 구조를 알게 되면맑고 또렷하게들여다보게 되지 않겠는지. 물론 그 눈을 갖추려면 그만큼 눈을 씻는 세상 공부를 해야겠지만 말이다. 얼마 전 재미있게 읽은 이갑용 전 위원장의 책 <길은 복잡하지 않다>라는 제목이 갑자기 떠오르는고나! 아무튼 뻘소리는 집어치우고, 저 사진과 그림들을 보자. 맨 위에 있는 모형 사진에서 보 방향의 가로재라는 것은 툇보가 맨 맽을 가로지르고 있고, 그 위로 외목도리를 받치는 초방과 주심도리를 받치는 초방이 차례로 지나간다. 그리고 그 위에는 하중도리를 받치는 계량(포인방)이 지나가고, 그 위에는 중중도리를 받치는 계량이 두 겹으로 지나간다. 일단 모형에서 보이는 것은 그 뿐이다. 그렇담 중중도리를 받치는 이중의 계량 위로 또 무엇이 지나가는지는 그 다음에 있는 도면 그림에서 확인할 수 있다. 중중도리를 받치는 이중의 계량 위로는 종보가 지나간다. 그게 끝이다. 사실 여기에서 용어의 통일이 되지 않았기에 외목도리와 주심도리의 받침목은 초방, 하중도리와 중중도리를 받는 것은 계량이라 달리 말해 그런 것이지, 그것들은 결국 높이 차를 극복시켜주면서 하중을 바깥으로 전달해주는 받침목에 다름 아니다. 그렇다면 더욱 단순하게 얘기할 수 있다. 툇보 위로 외목도리 받침목이 있고, 주심도리 받침목이 있고, 하중도리 받침목이 있고, 중중도리 받침목이 두 겹으로 있고, 그 위에 종보가 지나간다는 것! 그리고 주심도리의 초방과 하중도리의 계량 사이에 대들보가 가고 있다는 것까지. 더 단순하게 말해볼까? <툇보와 종보 사이에 외목도리, 주심도리, 하중도리, 중중도리 들이 있는데 그 도리마다 받침목이 있다.>는 것이다. 단지 중중도리 밑에만 그것이 두 겹으로 놓였다는 것 뿐. 여기에 한 가지를 더 보탠다면 하중도리 받침목 밑에는 초공이라 하는, 위에서 '둥글둥글 몽실몽실 예쁜 모양'이라 말했던 초공이라는 부재가 한 번 더 받쳐준다는 것 뿐이다. 그 뿐이다. 받침목과 그 위의 받침목이 닿는 자리마다 소로가 놓인다는 것까지 기억하면 거의 다 설명이 되고 있는 것이다.

외목도리와 주심도리는 받침목이 하나씩인데, 하중도리는 받침목 밑에 둥글몽실한 것이 하나 더, 중중도리 밑에는 받침목이 이중으로 쓰였다는 것, 이게 복잡하고 헷갈리려나? 그렇담 이것까지 이해를 하고 나면 그것도 별로 복잡하거나 헷갈리게 느끼지 않을지 모른다. 그렇담 그림으로 된 도면을 보자. 외목도리를 제외하고 종도리부터 주심도리까지 모든 도리들의 간격이 일정하다. 이 또한 부석사 무량수전의 특징이 되는 것인데, 도리들 간의 간격이 일정하다는 것은 도리들 간의 높이 또한 일정하다는 것이 된다. 그 높이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무언가 받치는 것이 둘씩 필요하다. 하중도리는 받침목과 둥글몽실 초공을, 중중도리는 두 겹의 받침목을, 상중도리는 종보와 초공을……. 쩝, 이런 식으로 기억하는 게 더 어려우려나? 어쨌든 그리 어려워할 일이 아니다. 부석사 무량수전에는 외목도리와 주심도리를 받치는 초방, 하중도리를 받치는 계량과 초공, 중중도리를 받치는 이중의 계량, 상중도리 밑에 있는 예쁜 초공……. 어쨌든 이렇게 부석사 무량수전은 수많은 초방과 초공, 계량들이 일정한 질서를 가지고 짜여지면서 그 커다란 지붕 하중을 완충, 분산시키고 있다.

기왕에 보방향의 가로부재들을 살폈으니 보머리 초각까지 함께 보고 가는 것이 낫겠다. 앞서 봉정사 극락전의 보머리는 이분두로 짤둑하게 깎아낸 거였으나 여기 부석사 무량수전에서는 나름 멋스러운 초각을 하고 있다. 퇴량 뺄목 부분은 마치갈고리 모양처럼 끝이 날렵 뽀족하게 위로 휘어져 올라가게 깎아놓았고,대량과 종량의 모리들은구름 모양의 운공형으로 깎아놓았다. 이러한 모습은오로지 부석사 무량수전에서만 볼 수 있다 하는데, 이 비슷한 운공형 장식은 조선 후기 다포양식 건물의 내부에서보아지(雲宮形)를 이루는 쪽에서도 볼 수 있다.하여간 이 건물에서는 종도리를 받는 나비 모양의 초공이나 상중도리 밑의 초공, 하중도리에 있는 초공들에서도 둥글둥글 몽실몽실 깎아놓더니 보머리들도 둥글둥글 몽실몽실 구름 모양을 하고 있다. 계랑들에서도 모양이 그러하기는 마찬가지.

위에서 짚어 본 부분을 이 사진에서 한 번 더 확인해 보면, 전퇴칸을 이루는바깥 기둥과 내진 고주 사이 맨 아래에 가로걸린 것이 퇴량, 그 위로 사다리꼴의작은 받침목이 있고, 그 위로 지나가는 것은퇴량과 주심도리 사이의 높이 차이를 극복하기 위해 받침목을 두는 초방이다. 그리고 그 위로 한 쪽 끝은 꼬부라져 올라가 있고, 반대쪽은 둥글몽실 구름 모양인 초공이 놓여 있고, 그 위에 계량이 놓여 있다. 그렇게 높이를올려준 뒤로는 아마도 하중도리가 올라갈 테고 말이다. 그러나 사진에서는 하중도리는 볼 수 없고, 그 밑에길게 놓인 뜬장혀에 가려져 있다.

횡단면의 그림과횡단면을 보는 각도로 내부에서 찍은 사진이다. 우선 그림에서빗금으로 단면을 표시해놓은 것이 보의 모습인데 굵게 처리되어 있는 대들보나 그 위의 종보나 모두 역항아리형의 단면 모습을 하고 있다. 이것은 봉정사 극락전도 그러했고, 뒤에 살펴볼 수덕사 대웅전이나 강릉 객사문 같은 고려시대 건물에서는다 같은 모양을 띄고 있다. 그만큼 고려시대 전형적인양식이라 할 수 있는데 이렇게 단면을 항아리 모양으로한 것은 기둥의 귀솟음이나 안쏠림, 처마의 안허리곡을 쓴 것과 마찬가지로 시각적인 불안함을 해소하기도 하고, 부재 사이의 결구를쉽게 하기 위해 쓴 것으로 보인다.

횡단면을 보면 맞배와 다른 점이 눈에 쉽게 띈다. 그것은 바로 측면으로 처마가 나가는 모양새인데, 말하자면 팔작지붕은 지붕 하부가 우진각처럼 되어지다가 중간부에서 바뀌어 지붕상부는 맞배집처럼 되어 있다 할 수 있겠다. 그러니 우진각에서 맞배로 변하는 부분을 어떻게 처리했는가가 팔작지붕 건물에서 가장 중요한 지점이 되는 것이며, 그것을 안정적으로 하기 위해 다양한 방법의 온갖 노력이 기울여지고 있는 것이다. 그중에서도 우진각에서 맞배로 바뀌면서 갑자기 측면경사가수직으로 올라가게 되는데 그 부분을 합각이라 하고, 그 합각의 하중을 어떻게안정적으로지반으로 전달하게 하는가가 언제나 중요한 관건이다.(그런데 이 합각부의 구성이랄지, 부석사 무량수전의 팔작지붕 구조에 대해서는 이후 수업 시간에 팔작지붕 양식이라는 테마로 따로묶여 있기에 여기에서는이 정도로 넘어간다. - 실은 아직 그 부분에 대한 복습까지는 못하고 있어서 말을 할래야 할 수가 없다. ^ ^;)

또 한 가지, 횡단면도나 사진을 보면서 가장 눈에 띄는 것 가운데 하나가 도리 밑을 받치고 있는 단장혀들인데, 아래 사진이 축소 모형에서 단장혀가 도리를 받고 있는 모습을 찍어놓은 것이다.

사진 맨 아래의 외목도리부터 주심도리, 하중도리, 중중도리 해서 원기둥 모양의 도리들이 층층이 걸려 있다. 그리고 그 도리의 밑을 짧은 장혀, 단장혀가 받치고 있다. 부석사 무량수전에 쓰인 단장혀들 또한봉정사 극락전에서와 같이 구조재의 기능 없이 받침재의 역할만 갖는데, 이 모형도에서는 그것을 설명해줄만한 중요한 것이 빠져 있다. 이 단장혀들이 받침재의 역할을 한다는 것은 단장혀 위에서 도리들이 이음새 맞춤을 하고 있어야 하는데, 박물관 모형에서는 워낙 축소 모형을 만들다 보니까 건물의 측면 끝에서 반대쪽 측면 끝까지 하나의 부재로 깎아 올려놓은 것이다. 실제 건축물에서는 그렇게 긴 도리라는 것을 구하기도 어려울 뿐더러, 흔히 칸의 간격마다 도리 하나씩을 올려놓고 서로 장부 맞춤으로 이어나가는 것이다. 그러니 단장혀는 그 도리와 도리의 이음부가 있는 부분을 안전하게 받아주기 위해 받침재로 들어가 있는 것인데, 이 모형에서는 그것을 표현해주지는 못하고 있다. 어찌했든, 그러니 물론 여기에서도 도리와 장혀를 밀착하도록 치목하는 방법은장혀 윗면을 오목하게 깎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 더, 고건축 박물관에 갔을 때 이 부분을 확인하려고 몇 번이나 모형 건물 안으로까지 기어들어가면서 사진을 찍고 하던 것인데, 도면을 보면 측면의 처마 양끝에서 서까래가 종보까지 올라가고 있음이 확인된다. 외목도리를 지나 주심도리, 그리고 외기도리를 거쳐 종보까지! 그런데 박물관의 모형에는 서까래가 외기도리까지만 올라가 얹혀지는 것으로 표현이 되어 있는 것이다. 그래서 다시 교수님께 질문하고, 그러면서 확인. 부석사 무량수전의 측면 서까래는 종보까지 올라간다. 아래 사진이 박물관에서 밑으로 파고 들어가 찍은 것인데 각도도 나오지 않았고, 워낙 많은 부재들이 겹쳐 있어서 사진 상으로는 잘 알아보기 어렵다.


사진 맨 밑 부분이 대들보이고, 그 위로 그보다 조금 얇게 있는 것이 종보다. 그런데 서까래는 외기도리라 하는 것에만 걸린 채 종보까지는 올라가고 있지 않지를 않은가! (그러니 이 부분은 모형의 오류라 하겠다.)

전면 다섯 칸 가운데 어칸의 폭과 양 옆 협칸의 폭이 같다는 점은 눈여겨 봐야 할 대목이다. 보통은 어칸이 가장 넓고, 그 다음이 협칸, 가장 좁은 것이 퇴칸으로 공간의 위계가 짜여지곤 하는데, 이 건물에서는 어칸과 협칸이 같은 길이로 되어 있다. 이것은 또 어떤 의도를 품고 있는 것인가?

그리고 위의 횡단면도를 보면서 한 가지 더 이야기하고 지나야 할 것은 바로 불단이 놓인 위치와 방향이다. 내부 공간의 가운데를 어칸, 그 양 옆을 협칸, 양 끝을 퇴칸이라 할 때 불단은 왼쪽 협칸에 자리한 것이 보여진다. 일반적으로는 사찰의 어칸에 불단이 놓여 정면을 바라보고 있을 텐데, 이 부석사 무량수전에서는그 형식을 완전히 파괴하고 있다. 불단이 놓인 자리는 협칸이며, 그것이 바라보는 방향 또한 정면이 아닌 오른쪽을 보고 돌려앉은 형세다. 앞서 말했듯 부석사 무량수전을 해석, 이해하려면 이 건물의 평면 구성을 이해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했는데, 바로 이 불단의 위치와 불상의 방향이 그러한 평면을 나오게 하는 까닭이다. 일단 여기까지만 말을 해놓고, 불단의 위치와 불상의 방향을 비롯한 평면 구성 양식은 평면도를 보는 자리에서 다시금 자세히 살피기로 한다.

대신 저 불단에 모셔진 불상에 대한 이야기로 잠깐 돌려보면, 저기에 모신 불상 또한 중요한 보물 문화재이다. 소조아미타여래불상이라 하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크고 오래된 소조 불상. 이름에서 드러나듯 아미타여래를 모셔두었다. 아미타여래는 서방세상이라 하는 서방극락을 관장하는 부처이다. 그와 관련되어 동방세상을 관장하는 부처는 약사여래불이고, 현세를 관장하는 부처는 석가모니불이다. 그런데 부석사라는 사찰은 의상이 화엄종을 널리 퍼뜨리기 위한 본찰로 창건한 것이 아닌가? 화엉종이라면 비로자나불에게 예불을 올리고, 비로자나불을 모신 대적광전이 주불전이 되어야 할 텐데, 화엄종의 본찰이라 하는 사찰에서 비로자나불이 아닌 아미타여래불을 모시고 있는 까닭이 무엇일까? 그것은 의상이 귀족들에게 화엄사상을 전파하고자, 귀족들을 대상으로 포교를 하려 했기 때문이라 보여진다. 귀족들이라면 현세에서는 나름 안락하고 편안한 생을 살고 있는 사람들이다. 그들이 무언가를 바란다면 그것은 현세에서처럼 저 세상에서도 편안하고 안락하게 살고 싶다는 것일 텐데, 바로 그러한 바람을 관장하는 부처가 서방세계, 서방극락을 관장하는 아미타여래불인 것이다. 이에 반해 현실의 삶이 힘겹고 고달픈 서민, 백성들은 당장의 현실에서 몸 아프지 않고 살아가는 문제가 더욱 절실할 테니 질병없는 세상을 관장하는 약사여래불을 더 찾게 된다 하겠다. 아무튼 이와 같은 배경이 있기에 부석사는 서방세계를 관장하는 아미타여래불을 모신 무량수전이 주불전이 된 것이다. '무량'이라는 말이 바로 '극락'과 같은 의미를 지니고 있으며, 무량수전 앞에 있는 '안양루'라는 누각의 '안양'이란 말 또한 다 같은 의미를 지니고 있으니 (무량 = 극락 = 안양) 이러한 점을 염두에 두고 부석사를 바라보면 조금은 더 이해의 폭이 깊어지는 것도 같다.

측면부의 도면과 사진이다. (아, 간단하니 얼마나 좋은가! ㅎㅎ) 봉정사 극락전과 비교를 해보면 이 건물에는 가운데 올라가는 어미기둥이니 하는 것이 없다. 어미기둥이 올라가니 대들보라는 것도 맞보형식으로 들어가야 했고, 이 건물보다 훨씬 작으면서도 중고주까지 양쪽에 두고 있어 다섯 칸으로 측면벽을 분할 했으니 훨씬 복잡해보이지 않았겠는가. 수덕사 대웅전도 가운데 각기둥이라는 것이 들어가고 양쪽으로 중고주가 있어 툇보를 걸고 있는 등 이보다 복잡한 모습을 보이는데, 부석사 무량수전은 기특하게도 간결하게 되어 있다. (실은 벽면에서만 그렇지 저 합각 아래가 얼마나 복잡한지를 나중에 알게 되고는 머리가 팽팽 돌았다는 ^ ^") 암튼 이렇게 커다란 건물의 측면부 기둥이 단지 네 개(활주 빼고)만 서 있다는 것은, 이 건물은 횡력의 취약함을 보강해주어야 하는 맞배지붕 건물이 아니기 때문이다. 봉정사 극락전은 전면 세 칸, 측면 다섯 칸인 건물인데 반해 부석사 무량수전은 전면 다섯 칸에 측면 세칸인 건물이다. 측면부만 보고 말하자면 그만큼 측면의 가운데 내진 공간의 폭이 넓다는 뜻도 되겠다. 보라, 이 사진은 건물의 왼쪽 측면에서 찍은 것이니 저 벽을 뚫고 들어가면 불단의 후불벽, 불상의 등이 나오게 될 터이다. 전면에서는 기둥과 기둥 사이에 쪽소로라는 것이 하나씩 붙어 있는데 측면의 가운데 칸에는 쪽소로도 둘 붙어 있지를 않은가?

이 측면부를 보며 말할 수 있는 또 한 가지는 내부 가구 구조가 측면부까지 동일하게 이어져 있다는 것이다. 봉정사 극락전만 해도 내부에는 전면으로 중고주가 없던 것이 측면부에는 있었고, 내부에는 없는 어미기둥이 서 있어서 대들보의 양상 또한 달라졌지만, 부석사 무량수전은 측면부에서 보이는 모습이 내부 공간의 기둥열에도 그대로 이어져 있다. 수덕사도내부에 없는 가운뎃 기둥이 측면부에는 각기둥으로 서 있으니 내부가구 구조와 아주 똑같다 말할 수는 없을 텐데,오히려 부석사 무량수전에서는 아주 그대로 이어진다. 여기에서 내가 '오히려'라고 말을 한 것은, 내부 가구 구조가 측면까지 동일하게 이어진다 하는 것은 고려시대 맞배 지붕 건물의 특성인데, 이 부석사 무량수전은 맞배가 아닌 팔작지붕 건물이면서 오히려 봉정사 극락전이나 수덕사 대웅전보다도더 그것에 들어맞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여기에서 또 한 가지 놓치지 말고 보아야 할 것은 측면부에 개구부가 하나도 없다는 것이다. 조금 뒤에 평면도를 보면서 사찰 진입의 동선을 살필 텐데, 측면부에 문이 없다는 뜻은 정면 어칸에 나 있는 문으로 드나들어야 한다는 뜻이 될 게다. 그런데 그랬을 때 내부에서의 동선, 혹은 정면의 방향이 어떻게 달라지는지를 염두해 두어야 한다. 기억하라, 측면에는 문이 없다!

박공부의 이음 처리는 거멀정이라 하는 것으로 마치 스테이플러를 찍어놓았듯 간단한 꺽쇠철로 잡아주고 있는 게 보인다.이러한 것이 조선 시대로 가면 좀 더 화려한 장식재가 되는 지네철이 된다고 했지……. 사진 상으로는 어렴풋하게 보이고 있는데,박물관에 있는 모형에서 이 부분을 사진으로 찍어온 것이 있다.

간단, 단순한 형태의 꺽쇠로 된 거멀정으로 고정하고 있다.

그런데 애초 이 사진은 합각부의 모습과 박공, 그 이음 양식을 보고자 찍어둔 사진이었는데 가만히 사진을 들여다 보고 있자니 정말로 측면부 서까래가 너무 아래 걸려 있다는 게 느껴진다. 종보의 위치라면 합각면에 가려진, 좀 더 올라간 곳에 있어야 할 텐데 서까래는 그보다 훨씬 낮게 걸려 있는 것처럼 말이다. 아까 말한 것처럼 축소 모형에서는 본래 건물과 다르게 외기도리에 거는 것으로 만들어져 있다.

건물 뒷면을 그린 도면을 배면도라 하더라. 배면도와 뒷면의 사진. 문과 창의 모양을 보면 뒷면의 모양이 봉정사 극락전 정면과 닮았다. 고려시대 전형적인 입면 양식, 판장문과 살창의 창호. 창과 문을 꼭 그것만 남겨 놓고 나머지 부재들은미장으로 처리한 방식. 그러니 이것으로 부석사 무량수전도 고려시대 전형적인 입면 구성 양식을 아주 무시한 건 아니었다. 전면을 모두 살창으로 처리한 것은 그 어떤 계획에 의해 의도적으로 그렇게 했다는 것이다.

마치 허공에 붕 떠 있는 것처럼 미장으로 가려진 벽에 창이 덩그러니 걸려 있다.

뒷면 역시 앞면과 같이 기둥과 기둥 사이 쪽소로가 장식재로 붙어 있고, 그 밖에 특이할 사항은 없다. 아래 그림들에서 보이는 것처럼 판장문이들어가는 문틀에 신방목이라는 것이 그처럼 끼워져 있고, 하인방 밑으로 초석과 초석 사이의 공간은 고맥이석으로 받쳐주고 있다.

신방목

하인방을 받치고 있는 초석과 초석 사이의 고맥이석.

드디어 아기다리고기다리던 평면도를 꺼냈다. 이미 앞서 횡단면을 통해 왼쪽 협칸으로 치우쳐 있는 불단의 위치를 확인했으니 그리 새로울 것 없게 느껴질지 모른다. 하지만 불단이 가운데 어칸에서 정면을 보고 있지 않다는 것만으로도 이 건물의 평면은 일단 굉장한 파격으로 시작한다. 그럼 차근차근 앞서 질문을 던져 놓고 뒤로 미룬 것들을 살펴보자.

1. 맨 처음에 정면을 모두 살창으로 만든 것에 대해 질문을 남겼더랬다. 왜 고려시대 전형적인 입면 양식을 따르지 않았느냐며 말이다. 게다가 고려시대에는 사찰 내부가 예불 공간이 아닐 뿐더러 일반 신도들은 사찰 안에 있는 불상을 들여다보아서도 안 된다고 해놓고는 왜 그렇게 많은 창을 만들었냐는 말이다. 결론부터 말하면 전면의 살창들은 모두 광창 역할을 한다. 사찰 내부로 빛을 들이게 하려 그렇게 살창으로 만들었다는 말이다. 그러나 아무리 살창을 내었다 해도 바깥에서 신도들은 그 창을 통해 불상의 정면 모습을 볼 수 없다. 판문으로 가리지 않는다 해도 기껏해야 옆모습을 볼 수 있을 뿐이다. 그러니 전면에는 광창 역할을 하는 창을 넓게 두고 사찰 내부의 내진 영역까지 빛을 들이게 하는 것이다. 살창을 통해 은은하게 투과시킨 빛은 퇴칸을 지나면서 녹유전(원래의 바닥 형태)이라 하는 유리 바닥에 산란하면서 그 은은한 빛은 더욱 신비롭게 감돈다.

2. 그 다음, 불단의 위치와 불상의 방향에 대한 질문을 남겼더랬다. 이미 살피고 지나온 것처럼 무량수전은 아미타여래불을 모시는 불전이다. 다시 말해 서방 극락정토를 관장하는 부처를 모신다는 말이다. 그래서 불상을 서쪽에서 동쪽을 바라보게 놓았고, 이렇게 되면 배례자들이 동쪽으로 돌아서 서쪽에 있는 불상, 다시 말해 서방 극락정토를 향하도록 의도적인 계획에 의해 그러한 배치와 방향을 마련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3. 측면에 문이 없다는 것도 기억해두자고 했다. 측면에 문이 없으니 당연히 사찰 내부로 들어가는 사람들은 어칸에 난 문으로 들어갈 수밖에 없다. 그러나 보자, 정면 문을 열고 들어가면 그 앞에는 있어야 할 불전이 있질 않고 왼쪽, 다시 말해 서쪽으로 치우친 자리에서 불상이 동쪽을 바라보고 있다. 그러니 정면으로 진입한 사람은 자연스럽게 동쪽으로 돌아 서쪽을 향해 예불을 올리게끔 되어 있다는 것이다. 바깥에서 볼 때의 정면과 안에서의 정면이 달라진 것이다. 이렇게 이 건물은 평면의 배치에서도 예불자의 동선까지 치밀하게 계획하여 만들었다는 것이다.

4. 어칸과 협칸의 기둥 간격이 동일하게 해 놓은 것은 또 어떠한 의도였겠는지에 대한 답도 미뤄두고 있었다. 다시 한 번 예불자의 동선을따라가 보면, 예불자는정문으로 들어가 동쪽으로 돌아서 서쪽에 돌아앉아 있는 불상을 바라보게 된다. 이 때 예불자가 선 자리부터 불단이 있는 곳까지는 마치 내진 기둥들이 양쪽에서 도열해 있는 듯 늘어서 있게 된다. 이 때 칸의 간격이 동일한 정도로 놓여져 있기에 예불자는 불상을 향한 몰입감을 한층 더 느낄 수 있는 것이다. 일반적인 구성처럼 어칸을 협칸보다 넓게 했다면 기둥 사이의 거리는 불규칙하게 되어 오히려 그러한 몰입감에 방해를 받게 된다. 기둥의 배열에서 더 깊은 몰입감을 얻으려면 안으로 갈수록 거리가 짧아지게 하는 방법이겠지만, 바깥에서도 최소한의 대칭을 이루자면 그렇게는 할 수 없었다. 어쨌든 주어진 조건 안에서 그 몰입감을 가장 극대화시킬 수 있는 방법을 찾아 평면을 구성하고 기둥을 배치한 것이다.

5. 게다가 천정은 수직감을 느끼게 해주는 고깔형, 원추형의 노출된 연등 천정이다.

이 다섯 가지 물음과 답을 모아보면 전면에서는 광창을 통해 은은한 빛이 투과, 퇴칸을 지나면서 산란하여 신비로움을 감돌게 하고, 일정한 기둥 간격으로 불상을 향한 몰입감은 극대화되고, 수직감을 주는 연등천정으로 공간의 위계는 한층 높아진다. 당시 이 건물을 짓던 사람들은 이러한 효과를 얻기 위해 전면의 입면 구성 양식을 달리 했고, 불단의 위치나 불상의 방향에 파격을 주었으며, 문을 내는 위치나 동선의 문제까지도 고려해칸의 폭이나 문을 내는 방향 하나하나까지 치밀하게 계획한 것이다. 그러니부석사 무량수전은 종교의 교리를 완벽하게 이해하고, 공간 연출에 대한 확신 속에서만 지을 수 있는 집이라 할 수 있다. (수업 시간 교수님은 이 부분을 설명하며 '가장 뛰어난', '엄청난', '수작'이라는 말을 몇 번이나 했는지 모른다.)

평면도를 가만히 살펴보면 내진 기둥들이 바깥 둘레의 외진 기둥보다 더 굵다는 것도 볼 수 있는데, 이것은 팔작지붕의 상부 하중을 많이 받아 굵게 쓴 것이기도 하면서 동시에 내진 공간의 위엄을 돋우는 기능 또한 한다 할 수 있다.

글쎄, 위에서 설명한 느낌의 공간감을 표현해줄만 한 사진이 있을까 했는데 마땅한 것이 없어 이것으로나마 대신한다. 아미타여래불이 있고,그 쪽이 서쪽이다. 서방 극락정토를 바라보듯 서쪽의 불상을 바라보게 된다. 기둥 간격이 일정하여 불상 쪽으로 몰입감을 더해주고, 수직감을 주는 고깔형 연등 천정으로 공간의 위엄을 더욱 높인다는…….

공포를 구성하는 부분을 모형과 실제 건물의 사진들, 그리고 그에 대한 도면들을 모아놓은 것이다. 이렇게 공포부만을 따로 떼어 보고 있지만, 실은 앞서 구조나 양식에 대한 설명을 하면서 대부분언급을 하고 지난 것들이다. 포벽부를 설명하면서 포 짜임 (소첨차의 십자결구 위로 인방재 없이 대첨차의 십자결구)랄지, 퇴량 뺄목의 갈고리형 초각 양식이랄지,퇴량 위로 외목도리를 올릴 때에도 초방이라는 받침 부재를 써서 한 단을 더 올려준달지, 주심도리를받쳐주는 초방부재의 쓰임이랄지, 하중도리 밑의계량과 초공, 중중도리 밑의 이중 계량……. 사실 처음에는 이렇게 개별 건물들의 도면들을 보면서'공포의 짜임'이라는 것이 그야말로 가장 공포스럽고 두려웠는데, 구조 전체를 공부하다보니 오히려 공포야말로 가장 기본이 되고 쉬운 부분이 되어 버렸다. 문제는 이것들을 보지 않고 내 손으로 쓱쓱 그려낼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인데, 아직 작도 연습에 들어가지 않았다는 것이 살짝 불안하긴 하다. 첫 강의 때부터 교수님은 오늘부터 날마다 하나씩 도면을 그려봐야 한다고, 그래야 시험장에서 익숙하게 그려낼 수 있다고 했는데, 아직 나는 이렇게 구조를 파악하기에도 더디고 바쁘기만 하니 말이다. 어쨌든 최대한 구조에 대한 이해와 해석을 따라간 뒤 다음 주부터는 하루에 하나씩 그림을 그릴 수 있어야겠다.

어쨌든 포 짜임에 대해서는 이미 충분히 되짚고, 되짚어 본 것 같고, 여기 부석사 무량수전의 공포부에서 봉정사 극락전과 한 가지 다르다 할만 한 것은 주두와 소로의 부재 양식이다. 봉정사 극락전에 쓰인 주두와 소로는 주두굽이 없는 형식이었는데 부석사 무량수전에는 그 부재들에 굽이 있는 것이 또렷이 보인다. 첨차의 끝이 직절되어 있지 않고 비스듬히 깎여 있는 것도 봉정사 극락전과 다른 점이다. 그 밖에는봉정사 극락전과 그리 다를 것이 없다. 주두와 소로의 경사면이 안으로 굽은 내반곡을 가지고 있다는 거며 첨차 밑면이 연화두형으로 되어 있는 점, 첨차에 공안이 있다는 것, 창방이 수장폭으로 되어 있다는 것, 단장혀를 쓰고 있다는 것……. 어쨌든 이제 문제는 도면을 내 손으로 그려내는 것이다. 이미 전체에 대한 이해는 어느 정도 되었으니 뜻도 모른 채 마구잡이로 외워야 하는 상태는 벗어났다. 휴우.

용케도 부석사 무량수전에 대해서는 주두와 소로의 치수가 기입되어 있는 도면까지 찾을 수 있었다. 치수까지 기억해두어야 하는지는 아직 잘 모르겠고, 이 도면으로 봐서도 주두와 소로 밑면에 있는 굽과 아래 경사면의 내반곡을 다시금 확인할 수 있다.


이 그림들은 둘 다 하늘 위에서 집을 내려다 본 것인데, 하나는 눈에 보이는대로 그린 지붕의 모습(아래)이고, 또 하나는 그렇게 내려다 보면서도 중간을 잘라서 본 단면의 모습이란다. 그냥 눈에 보이는대로 그린 것을 와복도, 단면으로 잘라서 들여다 보는 걸 앙시도라 한다나? 하이고 참, 도면 종류도 무지하게 많다. 정면도, 배면도, 평면도, 측면도, 횡단면도, 종단면도, 앙시도, 와복도……. 아무튼 이 그림들을 보면 지붕의 곡들이 네 면 모두 안으로 휘어들어간 것이 확인되는데 그것이 처마의 안허리곡이라 하는 것이다. 부석사 무량수전은 기둥에서는 귀솟음과 안쏠림, 지붕에서는 안허리곡과 앙곡, 보의 역항아리 형태 등 시각적 불안함을 해소해주기 위한 곡들이 많이 쓰였다. 그리고 아직 지붕 구조에 대해 공부가 들어가지 않아 그러한데 용마루와 처마마루, 내림마루 들에도 자연스러운 곡들이 쓰였을 것이고 말이다.

강의 시간에는 아직 앙시도나 와복도를 보며 배워보지는 않았지만, 아마도 이 앙시도가 중요한 것은 안허리곡을 읽어내느라 중요한 게 아니라 추녀부와 합각부를 구성하고 있는 양식을 보라고 있지 않을까 싶다. 역시 아직 팔작지붕의 지붕 가구구조를 공부하지 않았기에 거기에 대해서는 할 수 있는 말이 하나도 없으니, 이 도면들을 놓고 겨우 안허리곡이나 얘기하고 있구나 싶다. 아는만큼 보이게 되는 거라더니,아직 내 눈으로는 그 정도 밖에 볼 줄을 모르는 것이다.(공부하자 팔작지붕! 팔작! 팔작! 팔작지붕!팔작, 팔작, 팔짝, 팔짝, 팔짝팔짝! ㅎㅎㅎ)


휴우, 다 떠들었다. 부석사 무량수전은 봉정사 극락전에 견줘 훨씬 간단하게 정리하고 지날 줄 알았더니 해 보다 보니 오히려 할 이야기가 더 길어진 것도 같다. 일주일 진도는 건물을 열 개, 스무 개씩 짚어 나가는데 건물 하나에 이렇게 오래 붙잡고 있어도 되나 싶기도 하지만, 그러나 기분이 좋다. 알 것 같은 마음, 훨씬 더 가까워진 것 같은 느낌. 아마 앞으로 다룰 수십 개의 사찰 건물만 보더라도 그 가운데 내가 그나마 가장 여러 차례 가 본 곳이 부석사 무량수전일 텐데, 이렇게 공부를 하다보니 여태 한 번도 못 가본 절이라도 되는 양 새롭고 신기하기도 하자. 그 전에야 사실 뭐, 단풍이나 보러 갔겠지,산을 오르는 기분으로 다녀왔겠지, 단체로 간다니까 어울리느라 갔던 거겠지……. 기다려라, 부석사야. 네 얼굴에 있는 주근깨, 등 뒤에 나 있는 여드름까지 꼼꼼히 보며 눈에 담아올게. 더 좋아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더 친해지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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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냉이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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