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덕사 대웅전

수덕사, 라면 이름은 무척이나 많이 들어봤지만 그전까지 한 번도 가보지 못한 곳이었다. 그러던 곳을 이번에 직접 찾았는데 그 아름다움에 얼마나 놀랐는지 모른다. 게다가 이제는 나름 공부한 것이 있어 건물의 조형 원리와 방식을 알게 되니 부재 하나하나가 각별하게 다가와 그 감동이 더했는지 모른다. 단청이 되어있지 않은 채로 칠백 년이 넘는 동안 그 모습 그대로 서 있는 나무들에 얼굴을 대어보는 일은 그야말로 경이로운 일이었다.

이제 수덕사의 건축 구조를 다시금 정리해보려 하면서 그날 사진기에 담아온 것들을 하나하나 열어보는데또다시 가슴이 뛴다.솔직히 지금은밤을 새워정리한 구조의 내용은 저만치 달아나고, 그날 법당 안으로 들어갔을 때 전해지던 숭건한 그 느낌만 되살아나고 있다.그러나 지금은그 감동은 감동대로 간직하되, 마음의 울림을 가라앉혀 그 건물이 어떻게 그 오랜 세월을 버티고 서 있어왔는지를 되짚어보려 한다. 여기에 놓는 사진들은 그날 직접 담아온 따끈따끈한 것들이고, 도면들은 이곳에서 얻어왔다.

이곳은 예산에 있는 수덕사이고, 대웅전이다. 봉정사에서는 극락전을 살펴보았고, 부석사에서는 무량수전을 살펴보았는데 지금 살필 곳은 '대웅전'이다.중생들의 현세를 관장하는 석가모니 불을 모신불전,때로는 석가모니불 곁으로 문수보살(지혜의 상징)과 보현보살(실천의 상징)을 함께 모시거나 아미타여래와 약사여래를 함께 두어 삼세불을 모시기도 하고, 가섭존자와 아난존자 같은제자두 분을 나란히 모시기도 하는데 그러한 때는 대웅보전이라 한다고 한다. 수덕사 대웅전은1308년에건립된 고려말의 대표적 목조 건물이다. 봉정사 극락전이나 부석사 무량수전은 묵서명과 고식의 수법을 통해건립연대를 추정하고 있지만, 이 당시 건축물로 건립년도가 확인되로기는 수덕사 대웅전이 유일하다. 보다시피 맞배 지붕 건물이어서 고려시대 맞배 지붕 건물의 특성들이 대부분 그대로 적용되고 있으며, 사찰 자체는 산지에 입지해 있다. 그래서 지난 번 수덕사를 찾아갈 때도 그 입구에 덕숭산 등산로 표지판이 서 있었고, 대웅전까지 가려면 가파른 비탈을 한참이나 올라가야 했다. 그래서 이 건물은 토축을 쌓는다면 마당을 넓힐 수도 있겠지만, 건물의 위계를 극적으로 높이기 위해 장대석으로 기단을 높이 쌓기만 했다. 장대석으로 기단을 쌓는 것은 주로 고려시대에 자주 쓰인 방식인데, 여기에서 특징적인 것은 아랫돌보다 윗돌이 더 두껍다는 것이다. 비록 이 건물만큼 높이 올리지는 않았지만 봉정사 극락전도역시 장대석으로 기단을 쌓지 않았던가. 이것들에 견줘부석사 무량수전은면석을 이용한 가구식 기단이었고, 기단 자체가 가장 낮았다.계단을 보면 봉정사 극락전은전면의 가운데 하나가 있고, 부석사 무량수전은 양측면까지 하여 셋이 있는데 수덕사 대웅전은가운데 계단이 없고 측면에만 있다. 이것은사찰의 진입 자체를 양 측면으로 유도한 것으로 외부공간 계획부터 아주 치밀하게 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맨 위의 사진에서보다시피 전면은 세 칸, 세 칸의 크기가 어칸과 협칸 모두 같다. 그리고 고려시대 전형적인 입면 구성 양식인 판장문이 아니라 전면에 창호를 설치했다. 이 모습은 부석사 무량수전에서도 그러했는데, 판장문이 아닌 전면 창호를 한 까닭 또한 부석사 무량수전과 같다고 볼 수 있다. 물론 어칸 가운데에는 문이 있기는 하지만 이 문으로는 주지 스님이나 큰 스님만 다니는 곳으로 일반 예불자에게는 문으로 기능을 하지 않는다. 그러니까 정면의 문 또한 광창의 역할을 한다 볼 수 있고, 이렇게 전면에 창호를 설치한 것은내부 공간으로 빛을 유입하여 은은하고 신비로운 공간감을 조성하기위한 의도였다.

기둥은 배흘림 양식으로 되어 있고, 고려시대 배흘림 기둥 가운데에서는 강릉 객사문 다음으로 배흘림이 세다.주심포 건물에서 배흘림 기둥을 쓴 까닭을역학적으로 말하면 좌굴파괴 현상을 막기 위함이라 할 수 있는데, 이 좌굴파괴라는 것은 상부의 하중을 받아 그것을 받고 있는 부재가 휘어지거나, 끝내부러지게 되는 현상말하는 것이다. 그러니 이와 같은 주심포 양식 건물에서는 기둥 위로 포가 짜여지게 되니 더 많은 하중을 받아내야 하고, 시각적으로도 기둥 위가 너무 무거워보이니 좌굴파괴 현상을 방지하고 시작적 안정감을 주기 위해 기둥 삼분의 일에서 오분의 이 지점을 두툼하게 해주는 것이다.

종단면을 보면 구체적인 구조 파악이나 부재 설명에 들어가기 전에 일단 부재 자체가 굉장히 힘차면서도 화려하다는 느낌을 들게 한다. 부석사 무량수전만 봐도 그 건물의 특징은 뭐라 했는가? 작은 단위부재들을 중첩하여 사용함으로써 상부 하중을 자연스레 분산, 완충시킨 것이라 하질 않았나? 한 눈에도 수많은 가로부재들이 겹겹으로 쌓여 있어 자칫 복잡하다는 인상을 주기에 충분했다. 그러나 여기 수덕사 대웅전은 부재의 쓰임이 아주 시원시원하다. 가운데 대들보가 떡하니 지나가고 그 위에 있는 종보 역시 여느 대들보의 춤만큼이나 묵직한 느낌으로 걸려 있다. 그렇게 강직한 부재들로 힘찬 느낌을 주는 한 편 이 건물에는 양쪽으로 대칭되게 무지개다리 모양으로 곡을 이루며 내려가는 우미량이라는 부재가 한 눈에 띄고, 높이를 받쳐주는 받침재로는 화려한 파련형 화반이 쓰인 것이 또한 눈에 띈다. 수덕사 대웅전은 이렇게 굵고 큰 부재들의 강직함과 우미량이나 화반 같은 부재들의 우아함과 화려함이 조화를 이뤄가장 아름다운 측면부를 형성하고 있다고 많은 이들이감탄을 아끼지 않는다. (나 또한 보면 볼수록입이 벌어지기만 했다. 바깥에서 볼 때도, 안에 들어가 발소리를 죽이고 다니며 법당 내부를 둘러볼 때도.)

일단 기본적인 양식이나 부재 사용은 굳이 자세한 설명없이도 짚어 지나갈 수 있겠다. 도리가 주심도리부터 일삼오칠구 아홉 개 쓰이는 9량집이고, 보다시피 내진공간 앞뒤로 전후 퇴칸이 있는 전후 대칭구조 건물이다. 맞배지붕이기 때문에 횡력의 취약함을 보강하기 위한방형의 납도리를여기에도 하중도리에서 쓰고 있다. 솟을 합장은 부석사 무량수전에서처럼 종도리와 상중도리사이에만 쓰고 있다. 주심도리까지 계속 내려가는 것은 봉정사 극락전 뿐! 역시 솟을 합장재는 아직까지 내반곡을 가지고 있는 고려시대 양식이며, 부석사 무량수전에서 쓰인 것과 다른 점은 도리와 도리를 직접 결구시키고 있다는 것이다. 부석사 무량수전에서는 종도리 밑을 받는하부구조에 결구해 다시 상중도리의 하부구조에 결구. 역시 천정이 노출된 연등천정 구조이며, 보를 쓴 형식은 내진 공간에 굵직한 대들보를 두고 전후 퇴칸으로는 툇보를 쓰고 있다는 점이다. 대들보가 외목도리 끝에서 반대편 외목도리 끝까지 하나로 이어진 것은 봉정사 극락전에서 볼 수 있었고, 이와 같이 내진공간의 대들보와 퇴칸의 툇보를 쓴 형식은 무량수전에서 보았던 것이다.이러한 모습은 측면부의 종단면도에도 나타나지만 측면을 그대로 바라보는 모습에서 확연히 나타난다.

우와, 보기만 해도 시원스럽다. 다시 한 번 확인을 해 보면 주심도리부터 일삼오칠구, 구량가 건물에 횡력 취약함을 보강하기 위해서 쓴 하중도리의 납도리. 종도리에서 상중도리까지만 이어진 내반곡의 솟을합장, 내진 공간 열의 대들보와 전후 퇴칸을 받는 툇보.

이 사진에서는 하중도리를 방형의 납도리로 쓴 것이 뚜렷이 보이지 않는데 다음 사진들을 보면 좀 더 확실히 확인 할 수 있다.


이 사진은 서쪽 측면부의 처마 밑에서 올려찍은 사진인데왼쪽 귀퉁이에 살짝 보이는 것이 외목도리, 그 위에 있는 것이 주심도리 그리고 그 위가 하중도리에 고주 윗부분에 위치한 중중도리까지 보인다. 다른 도리들은 모두 원형의 굴도리인데 하중도리만 방형의 납도리!

그것을 다시 사찰 내부에서 확인하게 해주는 사진이다. 외진열과 내진열 사이에서 툇보 위에 화반이 놓여지고, 가로받침재 위로 길게 지나가는 방형의 부재가 바로 하중도리다. 이로써 다시금 정리가 되었다. 주심도리는 외진기둥 위에, 중중도리는 내진기둥 위에, 하중도리는 그 사이에 놓인 툇보의 가운데 지점에서 화반과 내진고주에서 나오는받침부재를 딛고 그 위에!

바로 전에 본 사진과 같은 위치에서 찍은 모형 사진이다. 이것으로 한 번 더 확인! 툇보 위에 화반, 그 위에 창방에서 나오는 가로받침재, 그 위로 방형의 하중도리가 지나감. 어이쿠야, 이거이거…. 이 모형도 원형과 다르게 되어 있네. 이것 참…. 뭐가 뭔지 모르고 그냥 볼 때는 몰랐는데, 이제 구조를 알고 부재의 위치와 쓰임을 분명히 알게 되니 눈에 들어온다. 이야, 이건 좀 너무하네. 하긴 뭐, 부석사 대웅전의 측면 서까래 부분도 원형과 너무 다르게 되어있기는 했지만, 여기에서도 작은 실수 정도가 아니다. 자 그럼, 요걸 수수께끼로 내놓고 가야지. 이 모형도가 원형과 다르게 되어 있는 곳은 어디일까요? 푸하. 위에 있는비슷한 위치,비슷한 각도의 두 사진을 놓고 비교하면 답을 찾기는 어렵지 않을 거야. (요번 상품은 뭘로 할까? 영월 중앙시장에서 부쳐 파는 메밀전병 되겠습니다. 아, 수수께끼 파리날린다. 장사 안 되네, 이거~!)

아무튼 이로써 주심도리와 하중도리, 중중도리가 놓이는 자리만큼은 확실히 알게 되었다. 그렇담 상중도리와 종도리는 어떨까?상중도리는 종보 끝에 걸쳐지듯솟을합장 밑뿌리와 함께 결구되고, 종도리는 당근 종보의 화반대공 위 꼭지점에 위치한다. (그걸 어떻게 아냐고? 밑에 있는 사진에 짠 하고 보여지거든.)

그렇담 종단면도를 보았을 때 당시의 전형적인 구조나 양식말고 이 건물만의 특징은 어떠한 게 있을까? 사실 그건 앞에서 이미 한 차례 언급하고 지났다. 이 건물의 강직함에 우아함과 화려함을 보태주는 것! 그 하나는 우미량이라는 부재의 사용이고, 또 한 가지는 화려한 초각의 화반을 쓰고 있다는 것.

먼저 우미량을 보자. 요 위에 있는 사진에도 양 옆 대칭으로 폭포 물줄기 같기도 하고, 무지개 모양 난간처럼 내려가고 있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부석사 무량수전에서는 종보와 대보 사이의 뜬 공간에 계량을 중첩하여 씀으로써 그것을 받아주는데, 여기에서는 우미량이라는 부재가 종보 밑에서 중중도리로 이어주면서종보 받침부재들과 함께 그 하중을 분산시켜 아래로 전달한다. 아참, 그런데 이 사진은 측면 벽부를 찍은 것인데, 내부 구조에서는 구조가 조금 다르다. 가운데 내부에 없는 가운데 각기둥이 쓰이고 있는 거야 뒤에서도 강조해 얘기할 부분이기도 하여 알아보기가 쉬운데, 종보와 대들보 사이에서 화반들을 놓고 가로로 놓인 부재가 내부에는 없다는 것이다. 요 위에 위에 위에 위에 위에 있는 종단면도 그림을 보면 확인할 수 있다. 측면부에서는 이 더욱 안정감을 주느라 이 가로부재를 썼겠으나 내부에서는 연등천정의 공간감을 살리기 위해 이 가로인방재까지는 쓰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아래 그림을 다시 보자. (우와, 난생 처음 포토샵으로 색칠이라는 걸해봤음 ^ ^)


보다시피하나는 벽부의 종단면도이고, 하나는 측면 내부의 종단면도인데 몇 가지 다른 점이 있다. 파란색으로 서 있는 것이 맞배집 횡력의 취약함 때문에 측면부에 둔 각기둥이고, 빨간색들은 바깥 기둥열의 창방에 해당한다 볼 수 있겠다. 그런데 가둔데 기둥들이 높아서 기둥 중간에 끼우는 꼴이 되기는 했지만 아무튼. 그 위의 연두색은 역시 중고주들과 가운데 각기둥들을 이어주는 창방이라 할 수 있겠다. 이러한 부재들 역시 측면의 벽체부에만 있으니 내부를 그린 종단면도에는 나타나지가 않는다. 그리고 위에서 말한 대들보와 종보 사이의 가로부재 역시 내부 공간에는 없다. 그래서 하는 말이었다. 우미량을 살피면서 찍어온 사진들을 보고 있노라니 벽체를 찍은 것이라 종단면도하고 뭔가 다르다 싶어 하나하나 따져보니 이렇더라는 말이다. (아! 이 도면들이 위에서 낸 수수께끼의 결정적 힌트가 되겠구나 ㅎㅎ)아무튼 우미량 부분을 다시 보면 도리와 도리의 높이 차이를 이어주면서상부의 하중을 우미량과 그 받침부재들로아래쪽에 전달하고 있지를 않은가? 종보의 하부에서 시작한 우미량은 그렇게 중중도리에 결구되고, 중중도리 하부구조에서 시작하여 하중도리로 이어지고, 하중도리 하부구조에서 주심도리로 이어진다.

이제 우미량에 대한 확인은 어느정도 되었는데, 이처럼 종보에서 주심도리까지 계속해서 흐르고, 흐르고 또 흐르는 것은 수덕사 대웅전과 관룡사 약사전 뿐이다. 그런데 관룡사 약사전에서는 우미량과 보가 하나의 부재로 되어 있는 것이어서 제대로 된 우미량이 주심도리까지 이어진 것은 수덕사 대웅전이 유일하다 하겠다.아무튼 이렇게 우미량이 쓰인대표적 문화재 건물이라면 이 수덕사 대웅전과 더불어 강릉 객사문, 개심사 대웅전, 도법사 해탈문, 관룡사 약사전 들이겠는데그에 대한내용은 따로 우미량이라는 게시판에 그림과 함께 올려놓았다.

기왕 우미량을 살펴보는 거 사진 몇 장 더 보고 간다. 이건 사찰 안으로 들어가서 내부에서 찍은 모습. 바로 위에 있는 사진의 반대면이다.

그리고 요건 위에 있는 사진에서 각도를 한 칸 오른쪽으로 틀어서 찍은 사진. 그러니까 그 두 사진을 이어서 보면 하나로 이어지는 모양이 된다. (어이구, 이거 꿈에서 우미량 나오겄네. 이 우미량은 소꼬리 모양이라 하여 지어진 이름이라는데, 다른 자리에서는 홍예초방 혹은 홍예보라 부르기도 한다. 홍예라는 말이 무지개'홍(虹)'에 무지개'예(霓)' 자를 써서 무지개 모양을 가리키는 거라는데, 초방이라 하면 부석사 무량수전에서 외목도리와 주심도리 밑에 높이 차이를 극복해주기 위해 쓰인 받침 부재를 말하지 않았나? 그러니 이 우미량이라는 것도 높이 차이를 극복해주기 위해 받쳐주는 무지개 모양의 초방이라는 뜻으로 홍예초방이라 부르기도 하나 보다. 또는 무지개 모양의 보라 하여 홍예보라고도 하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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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까 종단면도를 보면서 일반적인 양식이나 고려시대 전형적 양식 말고 수덕사 대웅전만의 특징이 되는 것으로 우미량의 사용과 파련형 대공을 쓴 것이라 말했다. 바로 이 건물의 강직함에 우아함과 화려함이라는 것을 조화시켜주는 부재 양식들이다. 그래서 먼저 우미량을 살펴본 것이고, 이제 파련형 대공을 보려 하는데, 일단 몇 가지 헷갈리고 있는 부분부터 확인한 뒤에 보는 것이낫겠다 싶다.앞서 봉정사 극락전을 볼 때는 그 범주에 드는 말로 '복화반'이라는 것이 나왔고, '人'자 형 대공이 썼다는 말과 '솟을합장'을 썼다는 말이 혼용되어 쓰였다. 부석사 무량수전을 살필 때 역시 '파련형 대공'과 '솟을합장'을 썼다는 말이 나온다. 그리고 이 수덕사 대웅전에서는 '파련형대공'을 썼다는 말도 있고 '포대공'을 썼다는 말도 있다.그 가운데 내가 헷갈려 한 것이 몇 가지 있는데 이를테면 솟을합장은 그 자체로 '솟을합장'이라는 부재, 그러니까 대공과는 다른 것인 줄로 알았다. 대공의 종류 안에서 '人' 자형 대공이 솟을합장과 비슷한 원리를 갖는다는 소리구나 정도로 넘어가곤 했는데, 이번에 다시 책과 자료들을 찾아보니 그게 아니다. 대공의 종류 가운데 '人'형 대공에 여러 모습이 있는데 그 가운데 하나가 솟을합장이었다. 그래서 어느 자료에서는 솟을합장을 두고 '솟을대공'이라는 표현을 쓰기도 하고 있는 것이다. (아, 아니다. 건축용어사전을 보니 거기에서는'대공 옆에 도리가 양쪽으로 구르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人자형의 보조 부재를 다는 경우가 많은데 이를 솟을합장이라 한다. 人자대공과 유사하여 혼동하는 경우가 많다'라고 쓰여 있다. 으이구, 이건 또 뭐여. 그렇게 말하는 이 책에는 대공의 분류에 '솟을대공'이라는 말이 아예 없다.ㅠㅠ)

또 한 가지는 '포대공'이라는 말을 정확히 이해하지 못했는데 자료에 보면 포대공이란 '여러 개의 조각을 교차하여 포작으로 짜올린 대공'이라 설명하고 있다. 나는 솔직히 사진이나 그림으로만 보면서 뭔가 화려하게 초각되어 있는 받침 부재들을 모두 혼용하여 '포대공'이니 '파련형대공'이니, '파련화반'이니 '화반' 따위로 혼용하여말하는 거다 싶었는데 그게 아니었다. 그러니까 마치 우미량을 홍예보 또는 홍예초방이라여러가지로 말하고, 초방이니 초공, 계량, 포인방 같은 말들을 섞어서 쓰듯이 포대공, 파련대공, 파련화반 같은 말들을 그냥 다 비슷한 말이라 얼버무려 지났는데 그게 아니었다.

다시 정리를 하면 '포대공'이란 마치 공포를 짜듯 작은 조각 부재(첨차)들을교차 조립하여 쌓은 대공을 말하는 것이고, '파련대공'이란 '화반형대공'의 여러 형태 가운데 하나를 뜻하는 것이다. 그렇담 '화반형대공'은뭔지 설명하기를 '초새김한 화반으로 이루어진 대공', '판대공이나 키대공에 물결, 구름, 꽃 등 여러모양을 새긴 대공'이라 했다.그러면서다시 설명하기를 '하나의 판재를 초엽 무늬나 연봉, 구름모양으로 입체적으로 화려하게 초각 장식'한 것이라 하는데, 휴우 자꾸만 정의가 왔다갔다 한다. 어쨌든포대공이 어떻게 다른지만큼은 일단 알겠다. 그러면 파련대공을 화반형 대공의 여러 형태 가운데 하나라 했으니 '화반'이라는것부터 다시 한 번 되짚어보자. 용어사전에 나온 정의는 간단하다.주심포나 익공 양식에서 다포의 간포 자리 그러니까 포와 포 사이에서 장혀를 받치고 있는 부재라는 것이다. 봉정사 극락전의 복화반을 떠올리면 쉽게 수긍이 간다.이것을 모양에 따라 파련형화반이니 人자형화반이니 동자주형, 사다리꼴, 원형, 방형, 첨차형… 으로 갈라진다니 그것도 알겠다. 그런데 파련대공을 '화반으로이루어진 대공' 이라 설명하는 건 또 뭔가? 화반과 대공은 역할에 따른 부재 분류고, 그 안에서 모양새에 따라 사다리꼴형이니, 人자형이니, 파련형이니 하고 나뉘는 것 아니었나? 화반이면 화반이고 대공이면 대공이지, 화반으로 만들어진 대공은 또 무슨 소리? 아놔, 이 사람들 지금 장난하나!

기본에서부터 다시 정리하자. 화반은 공포와 공포 사이에서 장혀를 받는 부재이다. 이 화반은 꼭 화려하라는 법은 없다. 용어사전 책에서 여러 모양으로 보여주듯 그냥 방형의 각재일 수도 있고, 사다리꼴 나무토막일 수도 있다. 이 가운데 초각이 많이 들어간 파련형이 있고, 운공형이 있고, 화엄사 구층암에서처럼 동물 모양이 있기도 한 것이다. 그리고 대공은 종보나 대들보 위에서 위에 있는 도리를 받아주는 부재이다. 이것에도 또 그 모양에 따라 동자대공이니 人자대공, 포대공, 판대공, 화반대공 따위로 나뉜다. (이것 참… 그러더니 화반대공을 화반모양의 대공이란다. 으휴, 증말! 화반은 모양에 따라 원형, 방형, 동자형, 운공형, 파련형… 같은 것들로 나뉘어진대매! 그래놓고 화반모양 대공이라니, 이게 도대체 말이냐, 막걸리냐 @@)

역시 이 부분에서도 아직 우리 건축계에서는 정리가 깜끔하게 되지 않았기 때문일까? 학자마다 달리 말하고, 학자와 목수가 달리 말하고……. 다른 자료에서 서로 말이 다른 것도 모자라 한 권의 책에서조차 앞뒤 말이 안 맞기도 한다. 이를 테면 파련형은 가운데가 잘룩한 절구통 모양의 판재에 파련을 조각한 거라더니, 예를 들어 설명한 사진은 사다리꼴 모양이다. (어쩌라구!)그저 감으로 익히고 알아들어야 할 일인 것인지. 하여튼뚜렷한 것 하나는 파련대공은 하나의 판재에 불로초나 당초, 구름 따위 모양을 입체로 조각한 대공을 뜻하는 것이고, 포대공은 공포를 짜듯 첨차의 교차 결구로 짜 올라가는 대공을 뜻하는 것이다. 또한 파련대공과 포대공은 쓰이는 자리가 조금 다른데 파련대공은 주로 종도리 밑에서 많이 쓰이면서 간혹 오량에서 쓰였고, 포대공은 주로 오량에서 쓰였고 간혹 상량에서 쓰였다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포대공이 간혹 상량에서 쓰인 예가 바로 수덕사 대웅전이라는 것이다! (박수, 환호) 아니, 그런데 이게 뭐야? 뭔가 이상하다 싶었더니 우리 교재에는 수덕사 대웅전에 파련형대공이 사용되었다고 굵은 글씨로 되어 있다. 아, 힘빠져. 다른 건 몰라도 기껏 파련형대공과 포대공만큼은 구분해냈다고 생각했는데 왜 이러냔 말이다. 그러나 아하하, 아하하, 아하하하! 드디어 답을 찾았다. 아, 고마워라, 두산백과사전.


한 번 더 포대공에 대한 설명을 다시 찾아보다가 드디어 열쇠를 발견했다. 포대공의 모양에도 종류가 많은데 그 가운데 가장 많이 쓰이는 것이 포대공에 화반대공을 복합시킨 거란다. 이러한 양식은 주로 중보에 쓰이고, 종보에는 쓰이지 않는데 수덕사 대웅전과 부석사 조사당에 쓰인단다. 야호! 드디어 답을 찾았다. 수덕사 대웅전에 쓰인 대공은 포대공이기도 하며 (파련형)화반대공인 것이다. 그 둘이 복합된 양식이어서 어떤 이는 포대공이라 했고, 어떤 이는 파련형 대공이라 한 것이다. 그런데다가 종보 위에서는 이러한 양식이 아주 드물게 쓰였기 때문에 강의 교재에는 파련형 대공 사용을 아주 굵은 글씨로 써놓았을 테고 말이다. 다시 말하면 여러 조각(첨차)이 교차로 짜여진 대공인데 그 조각 가운데 하나가 파련모양의 화반이어서 함께 짜여진 것이다.그래서 파련형 대공이며 포대공이다. (후아, 머리에 열난다, 하지만속이 다 시원하다.)

자, 이제 다시 수덕사 대웅전의측면 내부를 다시보자. 종보 위에서 종도리를 받치고 있는 것은 파련형포대공이다.

그리고 여기, 대들보 위와

툇보 위에도 종보 위의 파련형대공과 유사한 무늬를 가지고 있는 화반이 놓여 있는 것은 눈으로 확인이 되는데 이것을 그 윗부재들과 함께 포로 짜여져 있다고 봐야할지, 아님 화반이 놓인 위로 첨차와 장혀, 계량 같은 것이 결구되어 있다 해야 할지 아무튼 그렇다.(솔직히하나의 존재물을 놓고 그 어떤 분류 안으로 밀어넣는다는 건 자칫 분류를 위한 분류, 끼워맞추기가 될 여지가 많다.분류라는 것은 양식을 이해하기 위해 있는 것이며 구조 계통을 설명하기 위해 지나지 않는 것일 테니 말이다. 벌써 그 분류라는 것도 학자들마다 다르며 현장에서 또한 다르게 쓰이고 있으니, 정작 알아야 할 것은 양식상의 특징이며 구조를 이해하는 것이다.)여튼 대들보와 툇보 위에도 유사한 무늬를 가지고 있는 파련형화반(혹은 파련형포대공)이 놓여 있다는 것을 볼 수 있다.거기에 한 가지를 더 들어 말하자면 대들보와 종보 아랫부분에도 마찬가지로 유사한 무늬로 되어 있는 보아지 같은 것이 받아주고 있다는 것.





이렇게 우아하고 화려한 초각들이 나름의 통일성을 가지고 곳곳에 놓여 있는 것이 바로 수덕사 대웅전의 아름다움을 더해주고 있는 것이다. (아, 이 사진들로 보니 대들보와 툇보 위에 놓인 것은 대공이라 볼 수 없고, 단지 초각무늬의 화반이 놓여 윗 부재들을 받아주고 있다고 보는 것이 옳겠다 싶다. 어느 사진자료에서 포대공이라고 써 있기에 잠시 헷갈렸더랬음.)


종단면도를 보며 한 가지 더 짚고 간다면 내진 안쪽으로 불단이 놓이는 자리가표시된 부분이다.이렇게 수덕사 대웅전은 사찰의 어칸 내진공간에 불단이 조성되어 있고, 거기에 모셔진 불상들은 정면을 바라본다. 가운데가 석가모니불, 그 왼쪽에 아미타불, 오른쪽에약사불.

휴우, 이렇게 해서 종단면을 들여다보며 뜯어볼만큼은 다 뜯어본 것 같다. 휴우, 이제 겨우 종단면. 수덕사 대웅전에서 가장 주목해야 할 부분은 아직 건드리지도 못했는데 말이다.

횡단면을 본다. 횡단면을 보며조목조목 뜯어봐야 할 점들이야 이미 봉정사 극락전과 부석사 무량수전에서 자세히 했으니, 여기에서는 그 부분들을 다시금 상기하는 정도로만 지나도 좋을 거다. 일단 딱 보면 뭔가 일정하다는 느낌을 받는다. 뭐가 일정하냐, 네 개의 기둥들 위로 짜여져 있는 모양들이 일정하다. 다들 같은 모양의 대보가 가로지르고, 그 위로 종보가 질러간다. 이것을 두고 고려시대 맞배 지붕집들의 전형적 양식이라 몇 번이고 강조했다. 내부가구 구조가 측면부까지 동일하게 간다는 것. 물론 측면 벽체에는 횡력의 취약함을 보강하는 각기둥도 들어가고, 몇 가지 인방재가 더 쓰이고 있기는 하지만 대보가 측면에서 측면까지 다 쓰인다는 게 그렇다는 것이다. 조선시대 건물로 가면 그렇지가 않다. 어칸 기둥열에는 대들보가 쓰이지만 측면에는 그렇지 않다는 것! 이것이 가장 큰 차이이고, 이러한 점 때문에 계속 강조가 되고 있다. 이런 관점에서 보자면 봉정사 극락전 역시 측면 벽부에는 종보까지 올라가는 어미 기둥이 있기도 하고, 어칸의 앞쪽에 없는 중고주가 서 있어 조금 다르다 할 수 있겠지만 역시 대들보 사용을 보면 같은 구조의 반복이라 할 수 있겠다. 부석사 무량수전이야 팔작지붕 건물이지만 네 기둥열의 가구구조가 모두 똑같이 반복된다. 그것이 조선시대에 들어 바뀌게 되는 것은 맞배지붕 건물의 측면 보강 방식이 바뀌기 때문인데, 그것은 조금 뒤 조선시대 건물 양식을 살피는 것이 나을 성 싶다.

또 한 가지, 고려시대 전형적인 양식이면서 이 횡단면도만 봐도 한 눈에 들어오는 것은 바로 보의 모양이다. 역항아리 단면 형태의 보. 봉정사 극락전에서도, 부석사 무량수전에서도, 이 뒤에 살펴볼 강릉 객사문에서도 모두 같은 양식이다. 앞서 말했듯 시각적 안정감을 꾀하기 위한 것이면서 다른 부재와 결구를 쉽게 하기 위한 수법이다. 사진도 많이 찍어왔는데 사진으로 한 번 더 확인하고 갈까?

전퇴칸에 걸려 있는 툇보의 모습이다. 위쪽은 엉덩이처럼 두툼하다가 밑으로 갈수록 좁아진다. 그리고 맨 밑면은 한 뼘 정도 넓이로 면이 깎여 있다. (사진이라도 뭐, 눈에 잘 들어오지는 않는구나. 어쨌든 축소 모형 건물을 볼 때는 손을 넣어 만져보기도 했는데, 정말 눈으로 볼 때보다 훨씬 그 부피감이 느껴졌다. "정말이네, 정말! 밑에만 잘룩하네." 그러면서. 실제 건물에서야키가닿지 않으니어디 만져볼 수야 있겠나. 아무튼 그렇다.엉덩이 모양 아니, 역항아리 형태의 보!)

그리고 요것도 또다른 횡단면이다. 그러니까 앞의 것은 내진공간에서 싹둑 잘라서 본 단면이고, 이것은 후퇴칸에서 싹둑 잘라서 보는 모습이다. 그러니까 앞엣 것은 불단이 표현되어 있고, 대들보와 종보가 표현되어 있었겠지. 이 단면에서는 불단도 없고, 대들보, 종보도 없고 대신 툇보가 표현되어 있다. 이 역시 마찬가지로 역항아리 형태의 보. 조금 전 사진으로 본 그것이다. 그리고는 뒷면에 나 있는 판장문 형식의 창호가 보여지고 있는 것이다. 어차피 이 건물의 뒷면은 배면도를 보면서 다시 눈여겨 볼 테니 판장문 형식의 창호는 거기에서 얘기하는 것으로 남겨둔다. (아, 도면 밑에 보면 아주 조그맣게 무슨 고누판 같기도 하고, 주사위 같기도 한 그림이 있는데, 그게 이 단면이 어디를 잘라서 보고 있는지를 설명해주는 건가 보다. 그러니 이 단면에는 후퇴칸에 줄이 가 있고, 저 위 그림은 내진공간에 줄이 가 있지. 아하하하, 도면 읽기의 기본도 없어서 이제야 이렇게 더듬더듬 알아가네. 건축 전공한 사람들이 보면 웃겠다.)



이제 측면을 본다.위의 것이 동쪽에서 본 모습이고, 아래가 서쪽에서 봤을 때의 모습. 전퇴칸 쪽에 문이 있으니 둘의 그림은 문 위치만다를 뿐완벽한 대칭을 이루는 같은 그림일 뿐이다.게다가 이 그림은 앞서 종단면도를 봤을 때인이 박히도록 보던 모습과 비슷하질 않은가? 하다못해 내가 난생 처음포토샵으로 색칠까지 해가면서 이 그림과 종단면 그림을 비교까지 했었으니 말이다. 그러니까 종단면도와 다른 점이라면색칠해 넣은 곳들과 문, 그리고 하나가 더 있는데 맨 위에 있는 파련형 대공의 모양 뿐이다.

먼저 파란색 기둥은 앞서도 몇 번이나 강조한 것처럼 맞배지붕 집의 횡력 취약을 보강하기 위해 쓴 것으로 사실 이 기둥이 없다 해도 건물이 서있는데는 별 문제가 없다. 단지 횡력이 발생했을 때 측면으로 넘어가는 것을 보강해주려 쓴 보강재일 뿐. 봉정사 극락전에서는 그 보강재로 긴 어미기둥을 쓴 것이고, 수덕사 대웅전은 각형 기둥을 쓴 것 뿐 기본 원리나 역할은 같은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잘 보면 각형 기둥은 대들보에 직접 닿고 있지 않다. 그것은 대보가 받아오는 하중을 더 넓게 받아오느라 기둥 위로 포를 짜 올린 것으로 보여진다. 그리고 또한 이 때문에 기둥 옆으로 난 창방 위에서 포를 받느라 놓여진 소로 밑부분이 볼록하게 튀어나온 것이 보인다.쉽게 생각하면소로가 받침재인데 무엇하러 소로 밑에 또 받침을 만드나 할 수도 있겠는데, 이 당시에는 소로나 주두, 첨차들이 다들 나름으로 정해진 규격으로 쓰여지고 있었으니 다른 위치의 소로들과 통일감을 위해서라도 그 위치의 소로만 춤이 깊게 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 대신 소로가 놓일 창방의 자리가 볼록 튀어나오도록 만든 것이고, 그것을운두라 부른다. 이 측면도에서는 각형기둥의 양옆에 하나씩, 그리고 고주의 내진공간 쪽으로 하나씩 하여 한 측면에 네 개가 보인다.

사진으로 다시 확인. 각형기둥 위에 주두가 놓여 있고 그 양옆으로 화반을 받기 위한 소로가 있다. 그 소로 밑에 받침턱이 있는 것, 그것이 운두다. 각형기둥 위에는 양쪽으로 있고, 고주에는 안쪽으로 하나씩.

이건 운두 부분만 크게 찍은 사진이다. 솔직히 나는 이 모형을 보면서도 운두라는 게 정확히 무얼 말하는지를 처음에는 잘 몰랐다. 분명히 공책에는 필기를 해놓았는데, 그게 도대체 어디에 있다는 것인지 잘 모르겠어서 나중에는 뜬창방이라 되어 있는 저 부재 위를 손으로 쓸며 찾아본 뒤에야 아, 이거다! 하며 소리치며 좋아했으니 말이다. 보이지 않을 때는 암만 봐도 안 보이더니 그렇게 해서 찾게 되니까 이제 한 눈에 보인다. 도면으로 볼 때도 도통 보이지가 않더니 역시 눈에 확 들어오게 되었고 말이다. 아무튼 저 운두라는 것은 이 수덕사 대웅전 말고도 개심사 대웅전에서도 쓰였는데,나중에는 그리 쓰이지 않는 양식이 되었다. 왜냐하면 더 돌출된 받침턱을 만들려면 애초부터 창방을 깎을 때 그 높이만큼 두꺼운 나무를 써서, 그 돌출 부위만 남기고 나머지는 다 깎아낸다는 것인데 그러려면 나무의 낭비도 너무 많고,공도 너무 많이 들기 때문이다.이것을 거꾸로 말하면고려시대에는 부재 하나하나의구조와 기능, 의장에 필요하다여겨지는 것에는 아무리 공정이 힘들고 어려워도 그만큼완벽을 기해 공을 들여 만들었다고 얘기할 수 있다. 앞서 살펴본통장혀를 만드는 모습이나 하인방을 주먹장으로 기둥과 결구시키는 방식들에서도 그러한 면모를알 수 있고 말이다.그렇다고 이러한 면모가 후대로 갈수록 쉽고 간편한 쪽으로바뀌게된 것을단순히 장인정신이 그만큼못미치게 되었다고깎아내릴 수는 없을 것이다. 공정을 좀 더 손쉽게 하고,효율적으로 함으로써기술의 전파도빠르게하려는 노력이라 평가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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측면부에서는 뭐니뭐니 해도 가장 눈에 띄는 것이문이 있다는 것이다. 앞서 살핀 봉정사 극락전이나 부석사 무량수전에는 측면에 문이라는 것이 없었다. 그런데 수덕사 대웅전에 이렇게 측면 문이 있다는 것은,정면에서 기단부를 볼 때 계단이 양옆으로만 있었다는 것을 함께 떠올려야 한다. 이것은 처음부터 측면 진입을 유도하여 외부계획부터 치밀하게 했다는 것으로 해석된다. 이렇게 사찰 건물에서 측면 출입문을 볼 수 있는 것은 조선시대의 것들인데, 수덕사 대웅전은 고려시대 건물이면서 측면 출입문을 두었다.물론 정면에도 전면을 살창으로 하면서 어칸에는 문을 두기도 했지만, 기단부가 짧고 그 밑으로는 가파른 석축이 있어그곳은 누가 보더라도 여러 사람들이 다닐만한 곳은 되지를 못한다. 아마도 정면 출입문은 출입의 기능을 거의 하지 않는, 마찬가지로 광창의 기능을 하면서 사찰의 주지 스님이나 큰 스님만이 다녔을 거라 보여진다.

측면부를 볼 때면 빠뜨리지 않고 살피는 곳이 한 군데 있는데, 바로 박공의 이음을 어떻게 처리했는가 하는 것이다. 앞서 살핀 봉정사 극락전의 박공 그리고 부석사 무량수전의 합각부 박공은 모두단순한 모양새의 꺽쇠철로 된 거멀정을 썼는데, 수덕사 대웅전에서는 지네철 비슷한 것을 쓰게 된다.조선시대에 가면 지네철을 쓰게 되니 그진화의 과정에서 나타난 모양이라 할 수 있겠다.

그 밖에는 종단면도에서 조목조목 살핀 내용들이 그대로 적용된다 하겠다. 우미량의 사용이나 방형의 하중도리 사용, 그리고 초각 무늬가 된 화반 사용 등이 눈에 띄고, 뒤에서 자세히 살필 공포부와 보머리의 초각 양식도 눈에 들어온다.아무튼 이렇게 수덕사 대웅전은측면 구조의 모습으로는 우리 전통 건축물 가운데 가장 빼어났다고 많은 이들이 입을 모아 말할 정도로 아름답다.요 사진에는 꺼벙한 내 뒷모습이 들어 있기도 한데, 내가 아주 조그매보일 정도로 건물 자체는 매우 크고 웅장하다. 하긴 도리가 9량으로 쓰였다는 것만 해도 가히 이 건물의 규모를 짐작할 수 있지 않겠나? 그러나 그 정도로 커다란 건물임에도 불구하고 나는 조금도 어떤 위압적인 느낌이나 화려함이 지나친, 혹은 거만하다 싶은 느낌 따위를 받지 않았다. 그 전까지만 해도 작고 소박한 건물에서 아름다움을 느껴왔고, 커다란 건물들이라 하면 아무리 웅장함이 어떻고 장엄함이 어떻고 얘기를 하더라도 거부감부터 드는 게 솔직한 심정이었다. 그런데 수덕사 대웅전에 가 보고는 그렇게나 커다란 건물이면서도 예쁘다 하는 말이 몇 번이고 절로 나왔다. 수업 시간에 들은 얘기를 빌어 말하자면 굵고 힘찬 부재들로 단순하고 강직해보이면서도 우미량이나 화반 초각 같은 멋으러움이 자연스레 조화되어 있었고, 우뚝 선 건물이면서도 그 위엄이나 위세를 잘난 척하며 드러내지 않은 채 단정하게 서 있는 모습. 심지어는 이 커다란 건물이 포근하다고 느껴지기까지 했으니, 그것은 작고 소박한 집에서 느껴지는 포근함과는 다르면서도 비슷한 그런 느낌이었다. 아, 정말 예뻐, 예뻐. 최고다, 수덕사!

이제 뒷면 모습을 도면으로 그린 배면도다. 창호의 모습이 전형적인 고려시대 판장문 형식이라는 것은 이미 수차례에 거쳐 입에 단내가 나도록 얘기했으니 그냥 넘어가도 좋겠다. 지금은 가운데만 창이 남아 있고, 양옆에는 창틀만 남아 있는 채 미장으로 처리가 되어 있다. 아, 그런데 지금 가운데만 창이 남아 있다고 말을 했겠다, 그 말은 뭔고 하니 가운데에 있는 것도 문이 아니라 창이라는 것이다. 봉정사 극락전, 부석사 무량수전에서는 다들 뒤쪽으로 문을 하나씩 두고 있질 않았던가? 다시 상기해보면 봉정사 극락전은 뒷면 세 칸 중에 가운데에는 문이 있고, 양 옆의 협칸에는 문도 창도 없었다. 부석사 무량수전은 뒷면 다섯 칸 중에 가운데에는 문이고 양 옆의 협칸에는 전형적인 모습의 살창, 그리고 양 끝의 퇴칸에는 아무 것도 없었다. 그런데 수덕사 대웅전은 뒷면 세 칸 어디에도 문은 없고 가운데에 창, 양 옆의 협칸에는 창호의 흔적만 있다는 것.도면을 보라, 가운데에 나 있는 것을 자칫 문이라 착각할 수도 있겠으나창인지 문인지 하는 것의 바닥틀이 기단에서부터 높이 올라가 있다.그러니 이 곳은 껑충하게 건너 드나드는 문이 아니라 창이라는 걸 다시금 확인하게 해주는 것이다.뒷면에 문이 없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수덕사 대웅전은 오로지 측면으로만 드나들도록 했다는 것이다.

얘가 가운데 칸에 나 있는 창이다. 저게 문이라면 하인방이 있는 자리까지 더 내려와 있어야 하질 않겠는가? 허들을 넘듯 뛰어 넘으라는 게 아니라면.

그리고 얘는 창호의 틀만 남아 있는 협칸의 모습이다. 창호부재들이 모두 미장으로 가려져 있는 고려시대 전형적인 고식 수법이 그대로 드러난다.

평면의 모습이다. 두 개의 도면이 있는데 위에 있는 것은 완전 땅바닥에서 가까이를 잘라서 보는 단면이고, 아래 있는 것은 건물의 어느 높이, 말하자면 종아리 쯤을 잘라서 보는 단면이 되겠다. 먼저 이 평면도는 딱 보자마자 드는 느낌이 거의 정사각형에 가깝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그만큼 내부공간이 깊다는 뜻이 되겠고, 안쪽으로는 많이 어두워 전면에 광창이 필요했음을 역으로 말해준다.

도면 두 개 가운데 위엣 것을 보면 기단부까지 나타나고 있는데, 정면의 모습을 살필 때 말한 것처럼 이 사찰은 경사지에 입지해 있고, 그 가파른 경사면을 장대석을 이용해 축대를 만들어 기단을 쌓았다. 계단이 양 옆으로 있으니 바로 계단을 올라 측면 전퇴칸에 나 있는 양쪽의 문으로 출입을 유도하려는 것이었고, 이 건물 또한 어칸과 협칸의 너비가 똑같다.

아, 이제 드디어 공포부를 살핀다. 언제나 가장 애를 먹이는 공포부! 공포스럽기만 하던 공포부! 그만큼 이제는 미운정 고운정 마구마구 쌓여가고 있는 공포부. 게다가 이 수덕사 대웅전에서는 '한국 건축 역사상 커다란 진보'라고까지 표현되는 '헛첨차'가 처음으로 쓰였으니, 사실 앞에서 살펴본 수많은 구조와 양식에 대한 이야기보다 이 건물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헛첨차에 대한 긴장은 살짝 뒤로 하고 먼저 반복적으로 얘기되어 오거나 가볍게 짚고 넘어갈 수 있는 부분부터 먼저 봐두고 가고 싶다. 이 역시 주심포 양식의 건물이니 창방의 두께가 수장폭이라는 것은 여전히 되풀이되고 있는 것이며, 이 역시 아직 첨차에 공안을파고 있다.첨차와 첨차가 밀착되어 있지 않고 뜬 공간이 있기 때문에 그 사이를 자연스럽게 보이게 해주느라 첨차 윗면을 살짝 파주는 거라 할 수 있겠는데, 이제 여기에서부터 좀 다른 얘기가 시작된다.


부석사 무량수전 공포도 △ 수덕사 대웅전 공포도

공포를 측면에서 보는 위의 그림을 보면, 여기에서는이전의 첨차들과 확연히 모양이 다르다. 봉정사 극락전과 부석사 무량수전에서 보아오던 첨차하고는 아주 달라서 도대체 뭐가 첨차란 말인가, 싶을 정도로 말이다. 그러나 일단 모양이어찌되었건, 구부려뜨렸건, 요상하게 무늬를 새겼건, 조금 더 길어졌건 그런 건 상관치 말고구조면으로만 의식해 보자는 것이다. 좀 더 쉽게 보자면 이번에는기둥에서부터 올라가지 말고 위에서부터 따라내려오며하나하나 확인할 수 있겠는데, 맨 위에 무지개 모양으로 굽은 것이 우미량이다. 우미량은 당근주심도리를 받고 있다. 주심도리 밑으로 받침재가 하나 있고 외목도리가 놓여 있다. 이 모습은부석사 무량수전에서도 그대로 보던 것, 툇보가 바로 외목도리를 받지 못하니까 받침재 하나를 두는데 그 이름을 초방이라 하지 않았나? 부석사 무량수전에서는 외목도리에도 초방, 주심도리에도 초방이 있어받침재 역할을 했는데, 이 수덕사 대웅전과 다르다면 주심도리 밑에는 초방 대신 우미량이 받는다는 것 뿐 외목도리 쪽은같다. 그러면 그 아래 있는 것은 당근 툇보, 꼬부라져 나간 것은 툇보 머리를 초각한 것이겠다.여기까지도 부석사 무량수전과 그리 다르지 않아, 부석사 무량수전은 툇보 끄트머리를 갈고리 모양의 앙서처럼 초각했는데수덕사 대웅전의 툇보 끄트머리는 거기에서 쬐금 더 화려한 초각이 들어갔다는 것 뿐.그리고 그 아래 부석사 무량수전에서는 익숙한 모양의 대첨차가 놓이고 있는데, 수덕사 대웅전에서는 저게 첨차인가 싶은 모양의 것이 놓여져 있다. 첨차 맞다! 첨차가 바깥 쪽으로는 역시 툇보 끄트머리 비슷하게 조각을 했을 뿐이고, 안에서는 좀 더 화려하게 조각을 해 놓은 것이다. 이러한 모양을 살미첨차라고 하는데, 그에 대한 설명은 조금 뒤에.그리고 그 밑으로 부석사 무량수전에는 소첨차가 있는데, 수덕사 대웅전은 주두와 기둥이 먼저 있고, 기둥을 파고 나오면서 무언가 내밀고 있다. 그러니 말하자면 이게 수덕사 대웅전의 소첨차인데, 이렇게 주두 밑에서 기둥에 끼워져 있는 것을 헛첨차라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소첨차를 대신하는 헛첨차이다. 휴우, 그러면 이제 수덕사 대웅전 공포도만 보겠는데, 모양이나 위치가 확 바뀌고 있는 살미첨차(대첨차의 위치)와 헛첨차(소첨차의 기능)에 대한 더 자세한 설명은 일단 미뤄두고, 그 두 첨차의 뒷뿌리, 건물 안쪽부터 일단 집중. 헛첨차의 뒷뿌리와 살미첨차의 뒷뿌리가 마치 한덩어리의 보아지, 초각 장식이 되어 있는 보아지처럼 찰싹 붙어서 툇보를 받고 있다. 바로 이 사진에서 보이는 것처럼 말이다.

기둥과 수직 방향으로 툇보가 지나가고, 그 툇보 결구 부위에서 밑을 지지해주는 보아지처럼 되어 있는 것. 그것이 바로 기둥 위에서 보 방향으로 밖으로 내민 헛첨차와 살미첨차의 뒷뿌리들인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까지는 어떠했던가? 봉정사 극락전부터 부석사 무량수전, 수덕사 대웅전까지 '첨차간 수직 거리 이격'과 '첨차의 공안'을 말하며 첨차들이 서로 빈 공간을 두고 떨어져 있다는 것에 주목하지 않았나? 조선시대로 가서야 첨차들이 아주 딱 달라붙어 밀착하게 될 거라면서 말이다. 그런데 수덕사 대웅전에서는 벽체를 기준으로 건물 바깥에서는 첨차들이 서로 떨어져 있고, 건물 내부에서는 이처럼 한덩어리가 되었다. 이렇게 하여 점점 첨차들이 붙어가기 시작하게 된다는 것이다. '첨차들 간의 수직 거리 이격'에서 '첨차들 간의 밀착'으로 가는 중간 단계라고나 할까.

이것을 살펴보느라 하나하나 짚어 오는 과정에서 몇 가지 특징에 대한 설명도 함께 되고 있었다. 보머리와 살미첨차 끄트머리를 화려하게 초각했다는 것. 봉정사 극락전은 이분두의 보머리에 첨차 마구리는 직각으로 깍둑 잘라내었고, 부석사 무량수전 보머리는 갈고리형 초각에 첨차 끝은 빗각으로 깎질 않았던가. 또한 두 건물에서는 모두 첨차의밑면이 연화두형임을 확인했더랬다.

'한국 건축 역사상 커다란 진보'라 할만하다는 '헛첨차'에 대한 내용도 알게 모르게 설명을 하며 지나왔다. 부석사 무량수전의 공포부와 비교를 하니 그 차이는 아주 단순했다. 봉정사 극락전이나 부석사 무량수전은 기둥이 서고 그 위에 주두가 올라앉은 다음에 소첨차를 내미는 것으로 처마내밀기를 시작하는데, 이 헛첨차라는 녀석은 겁도 없이 기둥 위에 주두가 올라앉기도 전에 기둥머리에서 바로 시작한다는 것! 그러니 이처럼 헛첨차가 쓰일 때는 주두 위로 도리방향 소첨차만 있고, 보방향의 소첨차는 굳이 있을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이미 그만큼을 내밀고 있는데 무엇하러 한 번 더 같은 폭으로 내밀겠는가? 그러니 주두 위에서는 바로 대첨차부터 내밀게 된다. 그러니 주두 위에서부터 포를 짰을 때보다 부재 하나를 줄이면서 동일한 폭으로 처마를 내밀 수 있게 되지 않았나? 부재를 하나 줄였다는 말은 그만큼 높이를 낮췄다는 말도 된다. 처마가 높이를 한 단 낮추면서도 동일한 폭으로 처마를 내밀게 되었다는 뜻. 동일한 정도의 처마를 좀 더 낮은 높이에서 시작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 바로 헛첨차를 씀으로써 가능해졌다는 말이다. 처마를 내밀기 위해 지붕이 높아지는 것은 사실 처마 그늘을 만들거나 비 들이치는 걸 막는 데에 큰 효과를 주지 못한다. 내민만큼 올라갔으니 그 각을 그닥좁혀주지는 못하지 않는가? 그러니 그건 결국 지붕하중만 커지게 할 뿐이다. 그러나 처마내밀기를 낮은 높이에서 하게 되었다는 것은 얼마나 경제적이며 또한 효과적인가.이것이 바로 헛, 헛, 헛! 헛첨차의 발견으로 이뤄낸 것이고, 이러한 양식은 수덕사 대웅전에서 최초로쓰이게 된 것이다.

고건축박물관에서 수덕사 대웅전의 공포부만 크게 확대, 따로 모형으로 만들어놓은 것과 그것을 도면으로 그린 것이다. 이 도면에서는 헛첨차가 창방과 결구되는 것을 그려주지 않고 있는데, 모형도에서 보는 것처럼 헛첨차는 창방과 십자결구 되면서 기둥머리에 꽂히게 된다.

좀 전에 본 사진과 그림이 벽체 바깥에서 정면으로 본 공포의 모습이라면 이번 사진과 도면은 벽체 안쪽에서 보는 모습들이다. 벽체 바깥에서 보게 되면 출목으로 나온 행공첨차와 그 선에서 올라가는 외목도리가 보이느라 그 너머의 기둥 열에서 올라가는 모습을 잘 알아보기 어려운데, 이렇게 벽체 안쪽에서 보면 기둥열에서 짜여지는 공포 모습을 시원하게 볼 수 있다. 기둥머리에서 창방과 십자결구를 하고 있는 헛첨차의 뒷통수가 보이고 그 위로 주두와 도리방향 소첨차, 그 위로 보방향의 길게 내뻗은 대첨차(살미첨차) 뒤꼬리가 초각되어 있는 것이 보인다. 헛첨차 뒤통수와 한덩어리로 보를 받는다. 그 위로 뜬장혀가 지나가면서 보와 결구하고 있고, 소로들을 받친 위로 도리방향 대첨차가초방의 뒷부분과 결구하고 있겠지. 보에 가려져 보이지는 않지만, 그리고 그 위로 우미량이 놓이고, 주심도리와 장혀가 얹혀지겠지.

이 도면은 뭔가, 알아볼 수가 없었는데 아하! 이제 알겠다. 가운데 까맣게 칠이 된 동그라미가 기둥, 그러니까 기둥열에서는 주심도리가 가고, 그 위로 보이는 기둥 앞옆에는 외목도리가 가는 걸 표현한 것이겠다. 그러니까 말하자면 공포부를 위에서 내려다 보며 들여다 본 그림. 외목도리는 초방이라는 걸 깔고 앉아 있고, 그 밑에 보머리와 행공첨차가 십자결구 하고 있다는 뜻이겠다. 보머리 밑에는 그와 비슷한 모양으로 길게 뻗은 살미첨차가 한 번 더 받쳐주고 있는 것일 테고 말이다. 그리고 기둥열에서 보면 주심도리와 장혀가 우미량을 타고 앉았을 테고, 우미량은 외목도리부터 받치고 있는 초방 뒷부분에 걸쳐 있다. 도리방향 대첨차가 그 초방과 결구를 하고 있을 테고, 그 밑에는 보와 결구하고 있는 뜬장혀가, 또 그 밑에는 살미첨차와 결구하고 있는 소첨차가, 그 밑에는 주두, 주두 밑에는 창방과 헛첨차가 기둥머리에서 결구하고 있을 것이다.


다시, 공포를 이루는 부재 하나하나를보자면 기둥머리에서 헛첨차가 보방향으로 내밀고, 그 뒤에 주두가 놓이고, 도리방향의 소첨차가 놓인다. 이제 보방향으로는 소첨차를 놓을 필요가 없어 바로 대첨차를 놓는다. 이랬을 때 이렇게 놓인 대첨차들을 앞으로는 살미첨차라는 용어로 부르게 되는데, 여기에서는 그 끄트머리가 화려하게 초각까지 되어 있다. 그리고 살미첨차 위로 도리방향의 뜬장혀와 초각이 된 툇보 끄트머리가 결구되고, 그 위로 도리방향 대첨차가 놓인다. 그리고 살미첨차를 통해 출목이 나간 곳에서는 보 머리가행공첨차라 하는 도리방향 소첨차와 결구하면서 소로들을 사이에 두고 초방이라 하는 받침목을 올린 뒤 단장혀와 함께외목도리가 얹혀진다.다시 그 초방 뒤쪽에 우미량이 놓이면서 그 둘을 딛고 주심도리가 얹힌다.그리고 벽체 안쪽에서는헛첨차와 살미첨차의 뒷뿌리들은 내부에서 한덩어리처럼 하나로 붙어 툇보의 보아지 역할을 한다는 거. 와우, 수덕사 대웅전 공포도 정리 끝!

어이쿠야, 외목도리를 받고 있는 행공첨차가 부러져 있다. 수덕사 대웅전 건물의 뒷벽부였는데, 그 때도 저거 보면서 어, 어, 어…? 아, 저거 내가 보수해야 하는데, 시험에 붙고 나서 내가 보수하러 온다! 하면서 웃던 게 떠오른다.


왼쪽 것은 소로에 대한 도면이고, 오른쪽 것은 주두 도면이다.굳이 분류를 하자면 소로 도면의 왼쪽 것은 사방으로 트여 있는 '사갈소로'이겠고, 오른쪽 것은 한 방향으로만 길이 열려 있는 '행소로'가 되겠다. 보방향이든 도리방향이든 한쪽 방향의 부재만을 받칠 때에는 행소로를 쓰겠지만 그것들의 십자결구 지점에 놓일 때에는 양쪽방향으로 트여야 하기 때문에 마치 주두를 축소해놓은 것 같은 '사갈소로'를 쓰는 것이다.

그림에서 보듯 소로와 주두 모두 굽을 가지고 있는데, 부석사 무량수전에서처럼 내반곡이 없다. 그에 비해 봉정사 극락전은 내반곡은 있지만 굽받침은 없었다. 아, 이 세 건물의 주두와 소로 양식을 보기 좋게 비교해 정리해보면 아래와 같다.

봉정사 극락전

부석사 무량수전

수덕사 대웅전

안으로 굽은 내반곡

O

O

X

굽받침

X

O

O


아, 이제 겨우 살펴볼만한 것들은 다 챙겨보았나 보다. 때로는 머리가 아프기도 했고, 내 말로 정리를 해보면서야 비로소 또렷이 할게 되는 것들이 제법 있었다. 하지만 역시 다시 떠올리자면 그 구조니 양식이니 하는 것보다 그 단정하면서도 멋스러운 모습이 먼저 떠오른다.정말 언제라도 다시 또 가보고 싶은 곳, 자주 가보고 싶은 곳이다.

어쩌면 이 건물은 그 자체의 아름다움도 아름다움이겠지만,건축구조를 공부한 뒤로 처음 찾은 실제 건물이기에감동이 더했는지도 모르겠다.그렇다면 앞으로 다른 곳들도 하나하나 직접 찾아다니게 될 때마다받게 될 저마다 다른 매력의 감동들은 또 어떠할는지 미리부터 가슴이 뛴다. 하나하나 도면과 자료를 찾아가며 미리 조사할 일들도 설레고, 그리로 찾아갈 발걸음을 생각하는 것도 설렌다.

1266146719_수덕사 대웅전.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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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냉이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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